■ 제 50 장 :
소교주를 안고 경신술을 전개하는 권마황은 한 마리 야조와 같았다.
은성이에게 치명상을 당해 온전하지도 못한 몸으로 무리를 해 가면서 길도 없는 험한 야산위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흘낏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 추적해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다. 일반 조무래기 들이야 추적해올 능력도 없겠지만 따라왔다고 하여도 신경 쓸 필요 조차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연거푸 두 번이나 충격을 주고 내상을 입힌 나이어린 놈이라도 추적해 온다면 오늘 이 이름 모를 야 산에서 자신은 물론 소교주까지도 뼈를 묻어야 할 것이었다.
몸을 날리면서도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나뭇가지 하나라도 부러지지 않도록 조심 스럽게 경신술을 전개하던 권마황은 안개에 싸인 오목한 계곡 안에서 몸을 숨길만한 장소를 발견해 내었다.
품안에 있는 소교주의 상태가 매우 위태로움을 확인한 권마황은 망설일새도 없이 바윗돌에 가려 입구가 교묘 히 위장되어 있는 동굴속으로 몸을 들이 밀었다. 동굴은 깊이가 이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입구가 좁고 내 부가 넓어 몸을 숨기고 상처를 치료하기에는 적당하였다.
동굴속에 소교주를 눕히고 입구에 있는 커다란 바윗돌을 움직여 안쪽에서 동굴 입구를 거의 막다시피한 권마 황은 이제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깊은 한숨을 내리 쉬었다. 내상을 당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공력이 흐트 러지지는 않아서 평상시의 삼할 정도의 내공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천행이라면 천행이었다.
숨쉴 공기 구멍만을 남겨 두고 동굴 입구를 막은 권마황은 다급히 소교주의 몸을 추궁과혈해 주기 시작하였다.
그 자신의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닌데 무리하게 공력을 사용함은 내상을 더욱더 키우는 행동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권마황은 내력을 돋워 소교주의 몸을 치료해주고 있는 것이다.
권마황이 자기 희생을 하면서 추궁과혈을 시작한지 이각 정도 지나자 얼굴에 핏기하나 없이 푸르른 빛을 띄고 있던 소교주의 안색이 조금씩 혈색을 되찾아 가기 시작하였다. 대신 권마황의 얼굴에는 옅지만 푸른 빛이 감 돌기 시작하였다. 일각 정도가 더 지난후 피로에 지친듯한 권마 황이 추궁과혈을 멈추고 얼굴에 혈색이 도는 소교주를 일으켜 가부좌를 틀게 하였다.
여기서 치료를 멈추면 소교주의 목숨에는 지장이 없지만 무공은 전폐될 것이 분명하였다. 비록 소교주의 막힌 혈맥을 뚫어주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공력이 줄고 내상도 깊어져서 한달여 정도는 꼼짝없이 운공만 하여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마교 천하를 이루기 위해서는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권마황은 한치 의 주저함도 없이 소교주의 명문혈에 진기를 주입해 주기 시작하였다.
일각.. 이각 조금씩 시간이 지나자 소교주의 텅빈 단전에 서서히 내력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권마황 의 내력에 도인되어 소교주의 경락을 돌기 시작하였다.
막힌 경맥을 뚫어주고 소주천에 이어 대주천에 이를때쯤 해서 권마황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였다.
이미 소교주의 막힌 경맥이 대부분 치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한없이 자신의 내공이 소교주의 몸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기(氣)만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교주의 몸으로 자신의 정(情)까지도 억제할 수 없는 속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크게 놀라 소교주의 명문혈에 붙인 장심(掌心)을 떼어 놓으려 하던 권마황은 낙담(落 膽)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정기를 빨아들여 자신보다도 훨씬 더 정기가 충만해진 소교주의 몸에서 발생되 는 흡력 때문에 장심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기를 조정하여 소교주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아 보려고 하였지만 그 또한 불가능 하였다. 자신의 기 를 불어넣어 주던 처음과는 달리 이제는 소교주의 몸에서 가공할 흡력으로 자신의 정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문득 권마황의 머리속에 마교내에서도 익히는 것이 금지된 공포스런 마공이 떠올랐다.
'흡정마공(吸情魔功)'
타인의 정기를 흡수하여 자신의 공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초 단기간에 절정의 고수가 될 수 있는 마공이었다.
하지만 흡수된 내공들이 단전안에서 혼합되어 머무르고 그 성질이 순후하지 못하여 반발을 일으키기 때문에 내공이 깊어지면 깊어 질수록 주화입마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성정(性情)도 변해 잔인해지다가 급기야는 광인 이 되는 금단의 마공이었다. 이 때문에 이 마공서는 혼마각이 아닌 마교 교주만의 전용 서고에 보관 되고 있 었는데...
소교주에 의해 정기가 썰물처럼 빠져 나가자 권마황의 육체가 눈에 띄게 쪼그라져 가기 시작하였다. 퀭한 눈 동자에서는 생기가 급격히 사라지고 그토록 탄탄하던 근육들이 쭈그러져 뼈에 가죽만을 입혀 놓은 듯 하더니 마침내 목내이처럼 말라 비틀어진 시체가 되어 소교주의 등뒤에서 떨어져 쓰러져 버렸다.
대신 소교주의 몸에서는 엷은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다 죽어가던 창백한 안색은 붉은 혈색이 감돌고 몸 주변 에서는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더니 서서히 소교주의 콧구멍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눈을 번쩍 뜬 소교 주가 일어나 동굴 입구를 막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향해 두 주먹을 내뻗자 바위가 두부처럼 부서지며 돌덩어 리들이 사방으로 비산해 뿌려졌다.
"크하하하하!."
자신의 공력이 크게 늘었음을 실감한 소교주가 야산이 떠나가도록 큰 웃음 소리를 질러대자 메아리들이 온 산 에 가득히 울려 퍼졌다. 미친 듯이 광소를 터트리던 소교주가 동굴 밖으로 나가려다가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 섰다. 그리고는 권마황의 시체를 향해 한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혼비장'
바로 권마황의 파황신권에 실린 무공이었다. 권마황의 시체를 산산조각내어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든 소교주는 일만의 양심이라도 남았는지 동굴 내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권마황! 재수가 없다고 여겨라. 그래도 너의 독문신공에 최후를 마쳤으니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기를 바란 다. 어떻게 내가 너의 독문신공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를 알면 미치고 펄쩍 뛰겠지만 말이다. 크흐흐흐흐!'
나직하니 괴소를 지른 소교주의 신형이 갑자기 동굴 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디에서 불어온건지 한줄기 음풍이 권마황의 죽음을 애도하러 들어왔는지 동굴 안쪽으로 들어와 한바퀴 휘돌 더니 나직한 신음소리를 내며 역시나 사라져 버렸다.
침대에 누워 권마황이 사용했던 무공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던 은성이는 무공의 심오함을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무공의 깊이는 파고들수록 더욱 오묘해지고 정교해져서 그 끝을 다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권마황과의 결투 중에 깨우친 무공에 대한 이치를 사신권법 등 그가 익힌 무공에 접목시켜가며 명상을 하는 동안 정오는 화살 처럼 다가왔다. 검후가 들었던 방앞에 선 은성이가 노크를 하자 방안에서 검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안으로 들어 오세요."
방안으로 들어선 은성이는 방문앞에 서 있는 검후를 볼 수 있었다.
아!..., 검후의 미모는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검후는 목욕을 하고 새옷으로 갈아 입은 것 같았는데 옅게 화장을 하여 더욱더 성숙해 보이는 옥용(玉容)에 귀고리와 목걸이등 장신구를 착용하여 선녀같은 미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볼때마다 새롭고 그때마 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검후를 넋이라도 빠진 듯이 멍하니 바라보던 은성이가 자신도 모르게 걸어가 검후의 두 손을 꼭 쥐었다.
수줍은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검후의 앵두같은 입술이 은성이의 눈에 크게 확대되어 다가왔다. 한손을 들 어 가녀린 검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안은 은성이가 빠져들 것 같은 검후의 눈망울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 여 검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은성이의 호홉이 가까이에 느껴져 오자 검후가 속눈썹을 바르르 떨더니 두눈을 감아 버렸다. 가슴이 터질듯한 두근거림으로 다가선 은성이는 검후와 입술이 부딪히는 순간 머리속으로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이 들여오 면서 머리속이 텅 비이는 느낌이 들었다. 따뜻한 검후의 입술속에서 짙은 단내를 맡은 은성이는 다른 손을 들 어 자연스럽게 검후의 허리를 안았다. 검후도 두손을 뻗어 은성이를 힘껏 껴 안았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잠시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은성이는 아쉬운 눈길로 조금 벌어져 있는 검후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어냈 다. 순간 안고 있던 검후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도 눈을 감고 있는 검후의 옥용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은성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느끼어졌는지 도화빛 볼을 한 검후의 속눈썹이 위로 조금씩 치켜 올려졌다. 아련한 향취에 젖은듯한 촉촉한 눈망울이 너무나 사랑스러운 나머지 은성이는 다시 한번 검후의 이 마에 입맞춤을 하여 주었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는 해동에서 태어난 은성이는 어려서부터 예절교육을 철저히 받아 왔었다. 비 록 어찌할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 검후와 입맞춤을 하였지만 혼인도 올리지 않은채 검후와 더 깊은 관계로 나 아갈 수는 없었다. 검후의 두 손목을 다시 한 번 꼬옥 잡은 은성이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검후를 바라 보며 말을 하였다.
"하매..사랑해..."
더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검후가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은성이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은성이의 품으로 뛰어들며 말을 받았다.
"오라버니, 저도요."
은성이는 검후가 자신의 품으로 뛰어들자 검후를 부드럽게 안아주다가 한손을 들어 검후의 찰랑찰랑한 긴머리 를 쓰다듬으며 속삭이듯이 말을 하였다.
"하매, 내가 이 먼 중원땅으로 오게된 것이 모두 하매를 만나기 위해서 였나봐. 우리 죽을때까지 오늘의 이 사랑 영원히 간직하고 지켜 가자. 알았지?"
은성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검후가 샛별같이 반짝이는 두눈을 들어 은성이의 두눈을 올려다 보며 말을 받았다.
"오라버니. 저도 영원히 오라버니 한 사람만을 사랑할께요..."
사랑 앞에서는 신검도 마교도 그리고 보타문의 명예도 모두가 소용없었다. 오직 서로에 대한 관심과 믿음만이 은성이와 검후의 뇌리속에 꽉 들어차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은성이의 품속에 안겨 있던 검후가 슬며시 몸을 빼내어 방문 옆에 늘어 트려져 있는 얇은 줄을 잡아 당기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시장하시지요. 우리 식사를 방안에서 하는 것이 어떼요?"
그말을 듣고 보니 무척 허기가 져 있다는 것을 느낀 은성이가 웃으며 찬성을 하였다.
"그럴까? 그런데 무슨 음식을 먹을까?"
"호호, 잠깐만 기다리세요. 어떤 음식이 가능한지 먼저 알아본 후에 주문을 해야지요."
옥구슬이 부딪히는 듯한 목소리로 흥에 겨운 듯 검후가 웃으며 말을 하였다.
잠시뒤에 식당과 숙소를 같이 운영하는 이 객잔에서 심부름을 하는 점원이 방문앞에 도착하였다. 방문옆에 늘 어 트려져 있는 줄은 점원을 부를 수 있는 신호이었던 것이다. 방문을 열고 검후는 점원에게 이곳에서 가장 잘 하는 음식이 무엇인지를 물은후 오리구이와 팔보반(八寶飯) 이라는 요리를 방안으로 주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