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41화 (41/152)

■ 제 41장 :

장종무가 새삼스럽게 다시 보이는 은성이였다.

"고낭자, 용정차는 다음(多飮)하면 피부가 옥과 같이 고와진다고 하오. 낭자는 백옥 보다도 더 하얗고 고운 피부를 가지고 있지만 제 성의이니 한잔씩 더 드시지요."

하면서 장종무는 먼저 은성이의 찻잔에 벽녹색 용정차를 가득 따른 후 검후와 자신의 찻잔에도 용정차를 따랐 다. 검후는 은성이가 용정차를 시음하면서 그 맛에 감탄해 하였으며 자신도 처음 마셔본 용정차의 맛과 향취 가 아직도 입가에 남겨져 자꾸만 유혹하고 있었으므로 장종무가 찻잔에 차를 따르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종무가 조금전에 약한 아가씨들을 괴롭히는 파렴치한 놈들을 협의도를 발휘해 통쾌하게 모욕을 준 후 쫒아내는 것을 보고 처음과는 달리 약간의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형, 좀전에 듣기로는 무림맹에 가는 길인 것 같은데 실은 나도 무림맹에 아는 친척 분이 있어 한번 가볼까 하는 중이었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말동무나 하면서 같이 갔으면 하는데 이형 생각은 어떻소?"

장종무가 애원하는 어투로 은근하게 부탁해오자 차마 거절하기가 난감한 은성이는 눈을 들어 검후를 바라봤다.

검후는 은성이가 결정하는 데로 따르겠다는 뜻인지 별 표정이 없었다.

"좋습니다. 장형이 협의도를 따르는 분 같고 목적지도 같으니 같이 동행하지요."

하지만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들고 왜 그런지는 몰라도 조금은 불안한 은성이었다.

"그런데 장소협의 친척 분은 누구신지요? 혹 명호가 알려지신 분인지요?"

은성이와 장종무의 대화를 듣던 검후가 궁금한지 장종무에게 물었다.

"하하! 글쎄요. 저의 외삼촌 형이 무림맹의 수성원 내당에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못 뵌지가 오래되어 명호를 가지고 있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소이다."

"그래요, 그런데 좀전에 장소협의 무위를 보니 대단한 경지에 이르신 것 같은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장소협 의 사문을 알려 주실 수는 없는지요?"

"대단한 경지는요! 하찮은 재주입니다. 그냥 이리저리 떠돌다가 한 두가지 배워 익힌 정도라 딱히 사문도 없 소이다."

장종무가 사문에 대해 공개하지 않는 한 굳이 말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무림의 법도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법의 고절함으로 보아 어렸을 때부터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수련을 거치지 않았다면 절대로 현재의 나이에 그만한 무공 경지에 이를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것도 대단한 능력의 스승과 뼈를 깎는 수련이 없다면 아무리 무공의 천재라 하여도 현재와 같은 경지에 달할 수는 없으리라...

"그런데 외삼촌은 무슨 일로..."

무림맹과 관계가 깊은 검후이고 또한 앞으로 무림맹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검후인지라 정체를 알 수 없 는 고수인 장종무가 무림맹에 간다고 하자 궁금증을 풀기 위해 질문이 많아지고 있었다.

"사해를 정처없이 떠돌며 명승고적(名勝古蹟)이나 이름난 곳은 모조리 찾아 다니고 구경은 원 없이 하였지만 남는 것이 하나도 없군요. 지금껏 세상의 이름난 곳을 모두 알아봤으니 이제는 세상에 나의 이름을 알려줘야 할 차례인 것 같습니다. 외삼촌에게 부탁해서 무림맹에 이름을 올려볼까 해서요."

말을 하는 장종무의 전신에서 호기가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나이어린 소녀의 방심을 온통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멋진 대사와 사내다움이 물씬 풍기는 표정이었지만 검후 의 눈빛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제가 보기에는 장소협이 무림맹에 가입한다면 천무당(天武黨)의 적무대(赤武隊)에 들어가도 금새 두각을 보 일 것 같네요."

"아니! 고 낭자도 무림맹 소속이십니까? 어찌 그리 무림맹에 대해서 잘 아시고 있는지요?"

"아니오! 저도 무림맹에는 초행길입니다. 하지만 무림맹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 계셔서 귀동냥으로 간단하게 나마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왠지 자신의 신분을 장종무에게 노출하는 것이 꺼려지는 검후였다.

"장소협이 굳이 저희와 같이 가고자 하고 오라버니도 승낙하셨으니 어쩔 수 없지만 그럴려면 이것 하나는 약 속해 주셔야겠어요."

"무엇입니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낭자와 같이 절세의 어여쁜 미녀와 함께 갈 수 있는 기회이니 한 가지만이 아니라 열 가지 백 가지 라도 승낙하겠습니다.

장종무는 여자들을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자고로 칭찬에 강한 여자는 없는 법이다. 설령 속이 들여다 보이는 칭찬이라도 그것이 아름답다는, 또는 아름 다워졌다는 칭찬이라면 거울을 봐도 한번 더 들여다 보는 것이 여자이다. 자신을 세상 여자들 중에서 가장 아 름다운 여자로 봐 주는 남자가 있다면 아무리 악한 이라도 선량한 사람으로 둔갑시키는 것이 또 여자이다.

그런데 검후에게는 잘 먹혀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흥, 무림맹까지 가는 동안의 여정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나와 오라버니가 결정하겠어요. 동행하고 싶으시면 그냥 따라 오시던지 아니면 혼자서 무림맹으로 떠나세요."

"알겠소이다 고낭자, 내 무림맹까지 가는 동안은 이래라 저래라 한마디 없이 그저 고낭자 뒤만 졸졸 따라 가 겠으니 제발 내치지나 마시구려 하하!"

은성이와 검후에게서 무림맹까지 같이 동행해도 좋다는 말을 들은 장종무는 예상 이상으로 즐거워 하고 있었 다.

가구는 별로 없지만 하얀 침상보로 덮여진 침대가 있고 반쯤 열어 놓은 창가로 들어오는 월광이 창 앞에 놓인 탁자 위의 난초 잎새 사이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객방은 깨끗하고 나름대로 운치도 있었다.

얇은 분홍색 이불을 덮고 누운 검후는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무척이나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하루였 다. 곰곰이 하룻동안 벌어진 일을 생각하던 검후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은성이가 선물 했던 목함을 꺼내고는 조용히 쓰다듬었다.

이대로는 잠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검후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둥그런 만월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반겨 주었다.

해시초쯤 되었을까... 보석가루를 뿌려 놓은 듯 찬연히 빛나는 별빛 속에서 갑자기 유성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긴 꼬리를 사그라트리며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문득 유성이 떨어지기 전에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생각난 검후는 혹시나 또 다른 유성이 떨어지는지 보기 위해 밤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 았다.

그러나 일각 이상이나 지켜 보았지만 더 이상 유성은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무심한 하늘이었다.

하늘에서 시선을 거둔 검후의 시선이 검후의 방과 한칸 떨어진 방 앞에서 멎었다. 은성이가 묵고 있는 방이었 다. 작은 연못을 둔 정원을 가운데 두고 방들이 빙 둘러서 지어져 있는 객방은 오늘따라 손님이 많아서 검후 와 은성이 그리고 장종무 모두가 동떨어져 방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맞은편에 방을 잡 은 장종무와는 달리 은성이가 위치한 방은 검후의 방과 한칸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은성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잠을 자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을 생각하며 잠을 못 이루고 있을까?

헤어진지 두시진도 안됐는데 갑자기 은성이가 사무치도록 보고파진 검후가 발걸음을 옮겨 은성이의 방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다 늦은 시각에 다 큰 처녀가 남자의 방으로 들어설 수는 없었다. 무정한 문고리만 바라 보 며 한참을 망설이던 검후는 힘없이 뒤돌아 섰다.

그런데 방안에서 은성이가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예의에 벗어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 만 검후의 호기심은 공력을 청각에 집중시켰다. 그러자 방안에서 은성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검후의 귀에 들려 왔다.

'하매, 눈을 감으면 온통 그대의 고운 얼굴 뿐이구려.'

은성이의 중얼 거리는 소리를 들은 검후는 은성이가 자신이 몰레 엿듣고 있는 것을 알아 차린 것은 아닐까 생 각하며 얼굴을 붉히고 몸을 사렸다. 하지만 방안에서 몸을 뒤척이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들려 오는 소리에 안 심을 할 수 있었다.

'아! 하매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면서 침대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다시 침대에 눕더니 또 다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 다.

'하매도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고 있을까? 휴...'

한탄 소리와 함께 다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오자 검후는 왈칵하는 감정의 기복과 함께 은성이의 방문을 열고 자 하는 강한 욕구를 느꼈다. 하지만 사문에서 무공을 수련하며 함께 익힌 청정심(淸淨心)과 이성이 문고리 앞에까지 다가간 손짓을 간신히 만류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은성이가 자신을 이처럼 사모한다는 생각이 들자 검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조금은 불안 하던 가슴이 훤히 트이고 기분까지 이루 말 할 수없이 좋아졌다. 혹시나 들킬까봐 조용하게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서 침대에 누웠는데 잠은 더 오지 않았다. 두 눈을 감고 눈속에 아른거리는 은성이 의 모습을 바라보는 검후의 입가에는 행복에 겨운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검후는 방안에서 나온 이후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질투에 가득 찬 눈초리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음 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대지조차 잠에 들었는지 사위가 조용함에 묻힌 자시말 무렵... 한 사내가 객방의 창 가에 바짝 붙어 창문에 내기를 쏘아 대고 있었다.

'부르르르르...'

창문이 학질에라도 걸린 듯이 기이한 소리를 내면서 울려댔다.

'마교(魔敎)'

창문이 떠는 소리에 깨어났는지 방안에서 기대했던 목소리가 흘러 나오자 창가의 사내도 작은 목소리로 급히 답을 하였다.

'천세(千歲)'

사내가 천세라고 말을 하자 창문이 소리도 없이 열려졌다. 사내의 몸이 좁은 창문으로 소리도 없이 스며 들어 간후 창문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닫혀졌다. 참으로 절묘한 신법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선 사내 는 내기로써 창문을 닫은 직후 방안에 있는 사내에게 한쪽 다리를 꿇고 부복( 伏)했다.

"목검문의 동태는 어떻더냐?"

방안에 있던 사내는 창으로 들어선 사내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주종의 관계처럼 처음부터 거 침없이 하대의 말투였다.

"예, 놈들이 조금은 낌새를 눈치챈 것 같습니다. 며칠새에 연달아 사라진 육합문과 양가보 때문에 목검문뿐만 아니라 안휘성의 모든 무림 문파가 경계태세를 강화하였습니다."

"흐흐 그래! 제깟 놈들이 아무리 경계를 강화해도 고양이 앞의 새앙쥐일 뿐이지... 준비는 다 되었느냐?"

"지시하신 대로 생쥐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게 철저하게 준비하였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강호상에서 목검문이라는 문파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되실 것입니다."

"그래야지 , 그리고 본교의 소행임을 알 수 없도록 사후 처리에 만전을 기하도록 해라! 작전 지역내의 생명체 는 개새끼라고 하더라도 모조리 죽여 버리고 마지막에는 불을 질러 모든 증거를 인멸하도록!"

"알겠습니다, 소교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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