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0장 :
이십대 초반은 된 듯한 젊은이는 은성이 못지않게 준수하게 생긴 편이었다. 하지만 눈초리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가 있어 조금은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형씨! 말좀 물어도 되겠소이까?"
녹색의 섭선을 한손에 접어 든 젊은이는 매우 공손한 어투로 은성이에게 물어왔지만 검후와의 행복한 시간을 즐기고 있던 은성이에게는 불청객이나 다름없었다.
"예, 물어보시지요."
그래도 초면인 사람에게 실례를 하지 않기 위해 은성이도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을 하였다.
"형씨가 드시는 녹차는 중작(中雀)인 것 같은데 어찌 선녀같은 아가씨에게 중작을 마시게 하고 있는거요? 이 는 선녀님을 모독하는 것이나 진배 없으니 세작(細作:작설차)으로 바꾸는 것이 어떻소?"
은성이는 중작이니 세작이니 하는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앞에 있는 서생 차림의 젊은 이가 말은 자신에게 하면서도 은근히 검후에게 추파를 던지는 듯 하자 은연중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차는 하매가 직접 주문한 것이오."
"아하! 하낭자 셨구려. 난 아가씨가 인세의 사람이 아니라 옥황상제의 따님이 속세에 강림하신 줄 알았소이다. 네 오늘 하 낭자를 보고 안목을 크게 높인 기념으로 하 낭자의 입맛에 어울릴만한 차 한잔을 대접하겠소이다. "
하면서 젊은이는 허락도 없이 은근슬쩍 검후의 옆자리에 앉은 후 심부름을 하는 아이를 불렀다.
"여기 용정차(龍井茶)가 있느냐?"
"공자님 , 저희 다루에서 어렵사리 구한 용정차가 조금 남아 있지만 이미 예약이 돼 있는 상태라 내드리기 난 감합니다. 그것 말고 죽로차(竹露茶)나 원후차( 茶)는 있읍니다만..."
"하하! 꼬마야,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며, 내일 오실 손님이 왕이라면 오늘 오신 손님은 황제인 법이다. 냉큼 가서 가져 오너라."
하면서 젊은이는 심부름을 하는 아이의 손에 은자 한냥을 살며시 쥐어 주었다. 은자 한냥은 아이가 다루에서 세 달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큰 액수였다. 화색이 만만해진 아이가 주인 어른에게 허락을 얻어 오겠다는 말 을 하며 다실(茶室)로 들어가자 젊은이는 염치가 좋게도 일행에게 자기 소개를 하였다.
"저는 장종무라고 하며 사해를 집삼아 떠돌아 다니고 있는 몸입니다. 오늘 이처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인 연이 닿았는데 조상 팔대의 복연이 이제사 이루어진 듯 하군요."
장종무라는 젊은이가 갑자기 끼어들어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고는 있었지만 얼굴에 영기가 가득하고 호 감이 가는 얼굴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검후를 슬쩍슬쩍 바라보는 것이 기분 나빴지만 인사를 하자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자 은성이도 자기 소개를 하였다.
"저는 이은성 이라고 하며 내 누이는 고은하라고 합니다."
"아하! 하 낭자가 아니라 고 낭자였군요. 그런데 이형은 억양을 들어보니 고향이 중원이 아닌 것 같군요?"
정말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검후와 대화하면서 이제는 거의 중원인 못지 않은 언어 구사 능력을 갖게 된 은 성이였지만 아직도 어투가 조금은 매끄럽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해동에서 왔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그 먼 해동에서 중원은 무슨 일로 왔습니까?"
"예, 무림맹에..."
"잠깐만요!"
옆에서 은성이와 장종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검후가 은성이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장소협은 궁금한 것도 많으시군요. 초면에 너무 많을 걸 물으시는 것이 아닌지요?"
검후가 장종무를 수상쩍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하였다.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원체 호기심이 많아서요. 그건 그렇고 고 낭자는 목소리 조차도 어찌 그리 고우십니 까? 내 오늘 눈과 귀가 이렇듯 호강하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흥"
검후가 샐쭉하니 눈을 흘기며 코 웃음을 쳤다. 검후도 은성이와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는 난데없는 불청객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한번 은성이에게 기운 검후의 가슴속에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존재가 들어설 구석조차 없었다. 장종무가 준수하게 생겼으며 말도 유창하고 자신에게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아 부성 발언을 하고 있었지만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이때 심부름을 하는 아이가 매우 조심스럽게 다관과 찻잔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은성이와 검후가 마시고 있던 다관과 찻잔을 걷어가며 한마디 하였다.
"다행히 손님들에게 선복이 있어 용정차를 내어올 수 있도록 주인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이차는 용정차 중에 서도 상급인 절강성 항주 풍화령에서 채취된 차입니다. 앞서 마신 차값은 무료로 해 드리겠습니다. 맛있게 드 십시오."
"고 낭자 , 이 차는 고관대작과 황제가 즐겨 마시는 차중의 차이며 선차(仙茶)입니다. 한잔 드시지요."
장종무가 다관을 들어 검후의 잔에 따르려 하자 검후가 손을 뻗어 다관을 가로챘다. 그리고는 은성이의 잔과 자신의 잔에 차를 따른 후 장종무 앞에 다관을 밀어 놓은 후 말을 하였다.
"장소협의 호의를 거부하기만도 어려우니 오라버니와 저는 딱 한잔씩만 마시겠어요. 나머지는 장소협 혼자 다 마시세요."
은성이는 검후가 자기편을 들어주고 자신만을 챙겨주자 기분이 한결 유쾌해졌다.
차를 들어 향을 맡자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은은한 향취가 퍼져 나왔으며 코 끝에 스치는 향이 그윽하여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맑고 투명하며 은은한 벽녹색이 감도는 찻물은 하얀 찻잔 속에 넘실거리며 향취를 더해주고 있었다. 검후가 설명한 대로 다도에 맞추어 차를 세 번에 걸쳐 나누어 마신 후 입안에 감도는 차의 단맛, 쓴 맛, 신맛, 떫은 맛을 서서히 음미하자니 앞서 마신 녹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말로 좋은 차군요. 오늘 장형 덕분에 선가의 차를 마실 수 있게 되어 감사 드립니다."
씁쓸하니 혼자서 차를 따라 마시던 장종무는 은성이와 검후가 자신이 산 용정차를 따라 마시며 얼굴에 흡족한 표정을 짓자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렇습니까? 고낭자! 낭자는 어떻습니까?"
"뭐 그런대로 향취가 있군요."
그저 그렇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검후의 얼굴에 감탄한 기색이 어려 있는 것을 발견하자 장종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늘은 제가 선계에 놀러 온 기분입니다. 선녀같은 고 낭자와 선가의 차라는 용정차를 같이 마실 수 있는 복 연이 생기다니 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겠소이다."
"그래요, 그럼 평생 못잊을 추억을 간직하고 이만 일어나시는 것이 어떠세요. 저는 아직도 오라버니와 못다한 얘기가 많이 남아 있는데요."
장종무가 앞에 있는 은성이를 무시하는 어투로 자신에게 집적거리자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은성이의 표정 을 살피며 검후가 장종무에게 말을 하였다. 하지만 장종무는 얼굴에 철판을 깔은 것 같았다.
"고낭자, 아직 용정차도 많이 남아 있고... 그리고 또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다 조상님들의 음덕인 데 어떻게 그것을 무시하고 쉽사리 인연을 저버릴 수가 있겠소이까. 이형! 아까 무림맹에 볼일이 있다고 하신 것 같은데..."
장종무가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다루의 한쪽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아까부터 세명의 아가씨들이 앉아있던 탁자 옆에 앉아서 계속해서 수작 을 부리던 젊은이중 한명이 아가씨들에게 다가가 무슨 말인가를 하다가 언사가 거칠어지는가 싶더니 한 아가 씨가 당돌하게도 젊은이의 뺨을 후려친 모양이었다.
뺨을 맞은 젊은이가 욕설을 하며 뺨을 친 아가씨의 뺨을 치자 뺨을 맞은 아가씨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자 젊은이의 일행들이 모두 다가와 흑흑 대며 우는 아가씨의 일행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어 댔 다. 조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평화로웠던 다루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살벌해지고 부산해져 버렸다.
순간이었다. 은성이의 앞에 앉아 있던 장종무의 신형이 뼈 없는 연체 동물인 양 탁자 아래에서 빠져 나와 아 가씨들에게 욕설을 퍼부어 대는 젊은이들에게로 날아갔다.
"짜자자작 짝짝"
그리고는 눈 깜박할 새에 젊은이들의 뺨을 각각 두 대씩 후려 갈겼다. 욕을 하던 젊은이들도 왠만큼씩은 무술 을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뺨을 연타당하고 뒤로 비칠비칠 물러나며 땅에 주저앉던 그들이 일어나며 일제히 갖은 폼을 다 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종무가 고절한 신법으로 자신들에게 날아오다 시피 다가와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뺨을 때렸던 것을 상기하며 애써 분함을 달래고 있었다.
자신들은 백명이 와도 상대할 수 없는 무림 고수라는 것을 알아 보았기 때문이다.
"꺼져라! 이 빌어먹을 잡종놈들아."
장종무의 인격 모독적인 언사에도 불구하고 뺨을 맞은 젊은이 일행은 분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애써 눈알을 아래로 숙이며 비칠거리며 다루를 나갔다. 실력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무림에서 하수들의 비애였다.
흑흑 대는 아가씨를 애써 달랜 장종무가 보무도 당당하게 은성이 일행에게로 걸어가자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울려 나왔다. 장종무가 검후의 옆자리에 앉자 검후도 칭찬의 말을 해 주었다.
"장소협, 매우 잘하셨어요."
"나약한 여자의 뺨이나 때리고 욕이나 지껄이는 놈들은 사람이랄 수도 없지요. 내 이제껏 강호를 주유하면서 그런 놈들은 단연코 용서해준 적이 없소이다."
뜻밖에도 검후에게 칭찬을 듣자 장종무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다.
한편 은성이는 장종무의 신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도 젊은이들의 행패가 심한 듯 느껴져서 좋은 말 로 타이르기 위해 일어서려고 하였었다. 하지만 앞에 있는 장종무가 한발 먼저 탁자에서 빠져 나와 고절한 신 법을 발휘하였는데 탁자에서 빠져 나가던 장종무의 신법은 놀랄만한 경지였다.
자신도 묵귀영의 신법을 펼치기 전에는 흉내조차 내기 어려울 것 같은 절세의 신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