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39화 (39/152)
  • ■ 제 39장 :

    안휘성에 도착한 은성이와 검후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눈에 제일 먼저 띄는 객잔으로 들어섰다. 금아는 이틀동안 벽곡단 두알만을 먹고 버텼던 동굴 속의 악몽이 생각났는지 은성이에게 나아갈 방향만을 묻고는 산 속 깊숙이로 날아가 버려서 일행은 둘밖에 없었다.

    '다정객잔'

    이름이 매우 정감이 가는 작고 아담한 객잔에는 식사 시간이 지나서였는지 손님이 한명도 없었다. 원탁에 은 성이와 마주보며 앉은 검후가 점소이를 불러 송이구이와 완두 볶음밥을 주문하였다. 그런데 음식을 주문한 검 후는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지 고개를 숙인채 두 손가락을 맞잡고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은하!"

    은성이가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예! 왜요?"

    "식사 하는데 모자 벗어야지!"

    "..."

    은성이와 만난 이래로 지금까지 한번도 면사에 챙 깊은 모자를 벗어 보지 않던 검후였다. 무림맹으로 가는 길 에 마교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 얼굴을 가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굳이 손님이 한명도 없는 식당에서 조차 면사에 모자를 쓸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동안 정들었던 검후의 진면목을 꼭 보고 싶은 것은 은성이가 한참 호기심이 충만한 나이탓 만도 아니었다...

    "왜 그래? 무슨 사정이 있는거야?"

    "..."

    지금까지 활달했던 검후가 모자와 면사를 벗으라는 말에 고개를 숙인채 묵묵부답(默默不答) 상태가 되자 은성 이는 검후가 얼굴에 자신이 없어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피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하! 사람은 얼굴보다 마음이 중요해. 마음이 곱고 착한 여자가 이쁘지만 악독한 여자보다 백배 천배 낳아."

    검후를 만나서 이런 저런 말들을 하는 사이에 은성이의 중원어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가고 있었다.

    은성이는 검후가 미모에 대한 자격지심(自激之心)에 자신을 어려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탁자 너머로 손을 뻗어 검후의 손을 잡아 다정히 감싸 주었다. 검후의 손은 부드럽고 따뜻하였다. 잠시후, 은성이에게 맡 긴 손을 살며시 거둔 검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저..."

    "왜 그래? 말해봐!"

    "이 공자님..., 저에게 선물 하나만 주실래요?"

    망설이고 망설이던 검후는 무슨 결심을 했는지 다시 활달한 목소리로 난데없는 선물 타령을 하였다.

    "선물..."

    "예, 뭐든지 좋아요."

    "응, 알았어."

    은성이가 입고 있던 백의 장삼의 안주머니에 오른손을 넣어 무엇인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붉은 수 실로 내용물이 빠지지 않게 잘 동여 매어진 파란색의 복주머니로 은성이가 절강성에 도착하여 구입한 것이었 다. 복주머니 안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목함이 들어 있었는데 은성이는 그 중 크기가 큰 목함을 들어 검후에 게 건네 주었다.

    "은하! 선물이야."

    "고마워요, 이 공자님..., 저...제가 오라버니라 불러도 돼요?"

    이미 은성이가 자기보다도 한 살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검후의 난데없는 제안에 은성이가 혼쾌히 찬성하였 다.

    "하하! 그럼..., 하매!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아?"

    은성이가 검후에게 '하매'라고 부르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하였다.

    "물론 궁금하죠. 제 생애 최초의 선물이자 마지막 선물일 터인데 안 궁금할 리가 있겠어요?"

    "..."

    뜻 모를 말을 하여 은성이를 침묵시킨 검후가 목함을 열어보더니 여는 속도보다도 몇 배는 빠른 속도로 목함 을 닫았다. 그러자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검후의 주변을 영롱한 빛으로 물들이던 보광이 목함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뭐... 뭐예요?"

    자신이 손에 든 목함 속의 구슬에서 찬연한 보광이 흘러 나오자 깜짝 놀란 듯한 검후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 어 보았다.

    "음, 바다 속에서 우연히 얻었어. 마음에 들어?"

    은성이는 별 것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장신구나 보석 종류에 대해 가치를 식별할 수 있는 안목 이 있는 검후는 목함 속의 구슬이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성 한채를 주고도 사기 어려운 보물을 선물 받았다고 생각되자 검후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하였다. 한 문파의 장문인이 되고 보니 평소 신외지물이라고 생각하던 금전에 대한 인식이 뒤바뀔 수 밖에 없었던 검후였 다. 비록 보타문이 문도들에게 검소와 소박함을 생활 신조로 삼고 몸소 실천하라고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건물 을 개·보수 하고 수많은 문도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고 있었다.

    보타문에서는 차를 재배하고 보타문 소유의 농지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재정을 충당하고 있었지만 소용되고 자 하는 액수에 비해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이 항상 부족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문의 일년 예산안을 결정하는 것은 장문인의 권한이면서도 부담스러운 업무였다.

    "예, 고.. 고마워요 오라버니."

    너무나 값진 선물에 검후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흠, 하매가 마음에 들어 하니 정말 다행이다."

    선물을 받은 검후보다도 더 기쁜 듯 은성이가 흥에 겨운 목소리를 내는 동안에 점소이가 주문한 음식을 내오 기 시작하였다. 넓직한 접시에 파릇파릇한 솔잎을 깔고 그 위에 갖은 양념으로 잘 구워낸 송이 구이와 화력이 강한 불에 큰 볶음 냄비를 달구어 연기가 날 때 냄비 가장자리에 향미를 치며 볶은 울긋 불긋한 완두 볶음밥 이 식탁 위에 올려졌다.

    점소이가 원형으로 된 식탁 위에 주문한 음식을 올리는 동안에 검후의 챙 깊은 모자가 벗겨져 검후 옆의 의자 위에 올려졌다. 그러자 검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긴 생머리 밑으로 검후의 반듯하고 하얀 이마가 드러났다.

    모자에 이어 면사까지 거침없이 벗은 검후가 조금은 수줍어 하면서도 은성이의 표정을 궁금해하는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은성이를 응시했다.

    검후가 면사를 벗고 고개를 든 순간 식탁위에 주문한 음식을 다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젓가락을 내려놓던 점소 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그리고 검후가 면사를 벗는 것을 담담히 지켜보던 은성이도 두 눈을 크게 뜨고 멍청히 검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오라버니! 왜 그래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검후가 한 손을 들어 도화빛으로 물든 빰 근처에 대며 은성이에게 말을 걸자 그때서야 은성이가 정신을 차린 듯 더듬거리며 말을 하였다.

    "아..아니."

    검후의 아름다움은 은성이에게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은성이는 그 동안 서책에서 미인을 지칭하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니 화용월태(花容月態)와 같은 단어들을 많 이 보아 왔으며 실제 그에 버금가는 미녀들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여자의 미태에 혹해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 물속으로 가라앉고 하늘을 나는 기러기가 날개짓 하는 것을 잊어 땅으로 떨어진다는 침어낙안(沈魚 落雁)이라는 웃지 못할 단어를 보면 과장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였었다.

    하지만 검후의 옥용은 그 모든 미사여구를 전부 다 사용해도 재대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봐요! 젓가락 안 줄 거예요?"

    점소이가 젓가락을 든 채로 자기만 바라보자 검후가 점소이에게 화난 듯한 기색으로 톡 쏘아 부쳤다. 그런데 화내는 듯한 검후의 표정이 그렇게 귀엽고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점소이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쉬움이 가 득 담긴 눈빛으로 식탁을 떠나가는지, 허기진 배속에서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빨리 달라고 아우성을 치 는지 은성이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은성이가 넋 나간 표정으로 자신만을 바라보자 싫지는 않지만 부끄러운 듯 검후가 눈을 흘기며 말을 하였다.

    "오라버니! 식사 하셔야죠?"

    "그.. 그래야지. 하매도 많이 먹어."

    이제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은성이가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먹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식사를 하면서도 무엇이 그리 좋은지 실실 웃는 것을 보니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이틀동안 식사를 하지 못했던 은성이와 검후는 접시가 바닥을 보일때까지 젓가락을 내려놓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검후는 면사만을 봇짐 속에 넣고 모자는 식사를 하는 동안 괜시리 비어있는 식탁을 닦는다고 부산을 떨 면서 눈을 흘깃거리던 점소이에게 기증한 후 식당을 나왔다.

    중원인들은 차를 마시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성내에는 멋들어진 이름의 다루(茶樓)가 많이 있었 다.

    '조천향(朝天香)'

    이름이 매우 운치가 있다며 다루에 들자는 검후의 말을 거절할 은성이가 아니었다. 다루는 겉보기 보다는 넓 었는데 은은한 향취가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창가에 자리를 잡은 검후가 녹차(綠茶)를 주문하자 심부름을 하 는 아이가 녹차가 든 주전자 모양의 다관과 흰색 찻잔을 가져왔다.

    검후가 주전자를 들어 먼저 은성이의 앞에 높인 잔에 차를 따른 후 자기 앞에 놓인 잔에도 맵씨 있는 자세로 차를 따랐다. 알싸한 다향이 벽녹색 차속에서 옅게 풍겨져 오자 마음까지도 상쾌해 지는 것 같았다. 검후가 두손으로 찻잔 을 감싸쥐고 천천히 향기를 음미하고는 찻잔 받침은 탁자 위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찻잔에 든 녹차를 세 번에 걸쳐 나누어 마신 후 여운을 즐기자 아직 차 마시는 방법이 생소한 은성이도 검후를 따라 마셨다.

    "후후! 오라버니. 차 마시는 방법에 대해서 아세요?"

    은성이의 차 마시는 모양새가 조금은 촌스러워 보였던지 검후가 한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을 하였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잘 들으세요. 처음에는 입안을 적실 정도만 한 모금 머금고 두 번째는 조금 더 마셔서 차의 향기와 맛을 느 끼며 세 번째는 남은 양을 모두 마셔서 입안에 있는 그윽한 향기를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예요. 아셨죠?"

    "그래."

    차 마시는 방법을 설명하는 검후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웠던지 은성이는 검후만 바라보며 건성으로 대답을 하였다.

    "하매!"

    "예!"

    "하매. 정말 아름답다. 아마 천상에 있다는 선녀도 하매보다는 아름답지 않을거야."

    은성이의 진심 어린 칭찬에 검후의 얼굴이 붉어졌다.

    "오라버니도 참... 놀리지 말아요 잉."

    검후는 은성이의 칭찬에 부끄러운지 몸 둘 바를 몰라 하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렇듯 예쁘고 명랑한 검후가 왜 모자와 면사를 벗는 것을 그토록 망설였을까 의문이든 은성이가 무심코 말을 던졌다.

    "그런데 하매는 왜 면사를 쓰고 다녔던 거야?"

    어찌보면 우문이랄 수 있지만 검후가 면사를 쓰고 다니며 한사코 벗으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가 꼭 마교 때문 만은 아닌 것 같아 속내에 깊이 감추고 있었던 의문이 튀어 나온 것이다. 만약에 마교 때문만 이라면 식당을 나설 때 다시 면사와 모자를 챙겨 써야 할 것인데 검후는 커다란 속박에서 벗어나기라도 한 듯 거침없이 면사 와 모자를 벗어 던진 것이다.

    "왜요? 오라버니는 제가 다시 면사를 쓰는 것이 좋겠어요?"

    밝게 웃음짓던 검후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은성이에게 되물었다.

    "아니! 나는 하매가 앞으로 얼굴을 가리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깟 마교놈들은 내가 다 막아줄게."

    "고마워요 오라버니. 그리고 제가 굳이 면사를 쓰고 다녔던 것은... 참! 제가 오라버니에게 선물하나 할께요. "

    하면서 검후는 품속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수줍은 듯 은성이에게 건네 주었다. 은성이가 손수건을 받아 펼 쳐 보니 백설보다 더 새하얀 손수건의 가장자리에 용봉이 어우러진 그림이 수놓아져 있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제게 준 선물만은 못하지만 제가 처음으로 선물하는 물건이니 잊어 버리면 안돼요."

    "그럼. 누가 준 선물인데. 오늘부로 나의 보물 일호가 바뀌어졌네."

    "예? 무슨 말이예요?"

    "하하! 지금까지 내 보물 일호는 바로 이 화룡검이었거든, 하지만 오늘부터는 하매가 선물한 이 손수건이 보 물 일호이고 화룡검은 보물 이호가 되는 셈이지."

    은성이가 옆에 찬 고풍스러운 검을 가리키며 말을 하였다.

    한눈에 보아도 자신의 여래혼 만큼이나 귀중하고 가치있어 보이는 검이었다. 무인의 제 이의 생명이나 마찬가 지인 검보다도 자신이 준 보잘 것 없는 손수건을 더 소중하게 여기겠다고 은성이가 말을 하자 검후의 가슴에 뿌듯한 감동이 물결쳐 왔다.

    이런 감정을 행복이라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일까?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은성이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한 검후였다.

    "오라버니. 그 검 이름이 화룡검 이예요?"

    지금까지 검후와 함께 마교인들을 상대하면서 은성이가 사용한 무공은 지풍 한가지였다.

    검후는 은성이가 사용하는 지풍의 경지가 마교의 절대고수인 뇌살자까지도 물리칠 수 있을 정도의 지대한 경 지에 올라 있다고 생각하여 왔지만 은성이가 검을 차고 있다는 것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화룡 검이라는 검에 은성이가 크게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자 은성이의 검법 실력이 궁금해져 왔다. 아니, 지풍과 검법 말고도 또 다른 절세 신공을 익혔는지도 몰랐다.

    검후도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만큼 무공에 대한 관심은 범인과 남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응, 화룡의 정기가 녹아 있는 검이야."

    화룡검을 톡톡 두들기며 말을 하던 은성이는 갑자기 자신에게 화룡검을 맡긴 귀선문의 고진인이 생각나자 조 금은 숙연스러운 어조로 말을 마쳤다. 은성이가 화룡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은 분위기가 숙연해지자 그 미묘한 분위기를 파악한 검후가 얼른 말머리를 돌리었다.

    "어! 차가 다 식어 버렸네요, 다시 데워야겠어요."

    검후는 심부름을 하는 아이를 불러 다관에 든 차를 다시 데워 오라고 하였다.

    다루에는 손님이 꽤 많은 편이었다. 구석진 자리에는 젊은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으며 아가씨들 서너 명이 큰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할말 이 왜 그리도 많은지 말 한 번 끊이지 않고 조잘 조잘 대는 탁자도 있었 다. 꽃이 있으면 나비가 모여드는 법, 그렇게 아가씨들만 앉아 있는 탁자 옆에는 귀공자 차림의 젊은이들도 삼삼오오 모여 재주껏 눈치를 주며 아가 씨들을 꼬드기고 있었다.

    다루가 넓은 만큼 빈자리도 많았지만 은성이와 검후가 자리한 탁자 주변에는 빈 탁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 고 탁자에 앉아 있는 대부분의 손님은 젊은 남자들이었다.

    은성이가 다시 데워 온 차를 따라 마시려는 순간이었다. 혼자서 다루에 온 듯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고독하게 찻물을 자작하던 서생 차림의 젊은이 하나가 은성이 일행에게로 다가오며 말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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