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37화 (37/152)
  • ■ 제 37장

    검후 고은하는 운공 조식에 들어간지 이틀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마지막으로 숨을 크게 들이쉬며 탁한 공기를 내뱉고 살며시 눈을 떠 보니 바로 옆에 은성이가 결과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삼매경에 들었는지 눈을 반 쯤 내리 감고 있는 은성이의 검고 긴 속 눈썹이 매우 가지런해 보였다. 짙은 눈썹에 오뚝한 코, 그리고 잡티 하나 없이 희고 매끄러운 피부는 시샘이 날 정도였다.

    조용히 손을 들어 은성이의 얼굴로 나아가던 검후가 화들짝 놀라며 손끝을 거두었다. 장난이라도 치다가 걸린 어린아이 마냥 수줍어 하는 검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열여섯살 처녀의 호기심은 마냥 순수하기만 했다. 혹시라도 은성이가 깨어날까봐 조심하며 동굴 바깥으로 나선 검후는 아직도 만괴수살진이 건재하자 안 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만괴수살진을 펼치는데 사용한 부적들을 꺼내었다.

    '아니...'

    부적들을 바라보던 검후가 놀란 듯 기음을 토해냈다. 부적에 붉은 색으로 그려 놓은 괴물들의 형상과 글들이 거의 대부분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은하! 무슨 일 있어?"

    은성이의 목소리였다. 혹시나 자기가 부주의하여 삼매경에 빠져 든 은성이가 깨어난 것은 아닌지 미안해하며 검후가 말을 받았다.

    "대단한 고수들이 진세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아요. 십팔 괴수진중 십칠 괴수진이 깨어지고 마지막 관문만이 남 았어요."

    "진법 깨어지면 내가 막는다. 은하는 쉬어라!"

    역시나 믿음직한 은성이였다.

    검후는 잔살대주와 세명의 잔살대원이 은성이에게 당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은성이가 어떤 초식을 사용하는지 직접 보지는 못한지라 은성이의 무공 경지를 일반 고수급 정도로 추정하고 있었다. 물론 잔살대주 정도 되는 고수를 일수에 물리치기 위해서는 잔살대주보다도 훨씬 더 고수여야 하지만 예외가 될 수 있는 변수는 너무나 많았다. 백면서생같이 연약해 보이는 은성이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판단하고서 아무런 방비 없이 몸을 날 린다면 잔살대주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고수도 일수에 당할 수가 있는 법이다.

    무공을 익히고 강호 초행의 제자에게 사부가 가장 먼저 해주는 말이 있었다. 어린아이와 연약해 보이는 여자 를 조심하라고...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익혔어도 무방비 상태에서 날아오는 암전은 쉽게 피하기 어려운 법이다. 은성이가 자기 를 지켜 주겠다고 말하자 검후의 마음속에 감동의 물결이 쏴 하고 밀려 들어왔다. 검후가 입가에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으며 은성이에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비록 십칠 관문이 깨어졌지만 마지막 관문은 쉽게 깨지지 않을 거예요."

    "왜 은하를 공격하지?"

    은성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을 하자 검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후 말을 이었다.

    "당금 강호는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몇 개의 사파의 무리도 있지만 마교와 무림맹으로 크게 양분돼 있는 실정이예요. 보타문은 마교에 대항하는 정도문파중의 한곳인데 제가 보타문의 장문이라서 마교 무리들이 이렇듯 극성스럽게 덤벼들고 있는거죠."

    "진세안의 무림인들 마교인이야?"

    "아마 그럴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만괴수살진의 마지막 관문이 발동되면 진세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선명히 볼 수 있으니까요."

    검후의 말이 끝나갈 무렵 동굴안에 있던 금아가 날아와 은성이의 어깨 위에 앉았다.

    "은성아!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는거야? 배고프다."

    이틀동안 벽곡단 두 개로 배를 채운 금아는 매우 허기지다는 듯이 한쪽 날개로 금빛으로 빛나는 부드러운 털 로 뒤덮인 배를 슬슬 문질렀다.

    "아니, 지금은 안돼. 배고파도 조금만 더 참어. 벽곡단 더 줄까?"

    "싫다. 둘이서 많이 먹어라."

    투정대며 금아가 다시 동굴안으로 들어가자 진세에 변화가 일어났다. 만괴수살진이 펼쳐진 동굴 앞의 대지가 나직이 울리며 가는 떨림을 보이더니 검은 묵연이 서서히 겉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은성이의 눈에 진 법속의 상황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아...'

    은성이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소리가 베어 나왔다. 진세안으로는 두 부류의 무림인들이 들어서 있었다.

    마지막 관문을 오른쪽 방향에서 들어오는 세명의 무림인의 뒤에는 대략 삼십여구의 무림인들이 여기 저기 땅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관문을 왼쪽 방향에서 들어오는 오십여세 정도의 대머리 무림인의 뒤로 는 시체 한 구 없이 은성이가 날라다 놨던 돌덩어리들의 깨진 잔해만이 남겨져 있었다.

    "은하! 저 사람들 죽었어?"

    자신이 날라다 놓은 돌덩어리에 부적만을 대고 주문을 외웠는데도 삼십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은 듯이 땅 바닥에 쓰러져 있자 은성이가 물었다.

    "예, 대부분이 죽었을 거예요."

    "대부분?..."

    은성이가 검후의 대답에 의문을 느끼는 듯 하자 검후가 부가 설명을 했다.

    "만괴 수살진은 저의 태사조님이 도통을 한 후 도력을 부적에 불어넣어 만든 절진이예요. 부적에 그려진 괴물 들이 실제 상황처럼 진속에 들어온 침입자를 공격하는데 괴물들에게 당한 사람들은 허상에 불과한 괴물이 실 제한다고 믿었던 것처럼 괴물에게 당한 후 자신이 실제로 죽었다고 느끼게 돼요. "

    "그럼, 살아 있는거야?"

    죽었다고 하다가 실제로는 죽지 않았다고 하자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이 은성이가 반문했다.

    "일종의 최면이자 자기 암시인데..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의 의지가 급격히 소멸하면서 실제 로 죽음에 이르게 되죠. 하지만 정신력이 매우 굳건한 사람은 죽어가는 속도가 느리거나 아니면 살아 나기도 한데요."

    "흐음, 무섭네... 그 진법 계속 사용할 수 있어?"

    진법의 위력이 생각보다.무섭고 실제로 무림 고수까지도 죽일 수 있다고 하자 새삼 무림의 험난함을 느꼈는지 은성이의 어조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아니요, 아깝지만 태사조님이 어렵게 만드신 만괴수살진은 눈 앞에 있는 적룡 배사진 만이 남아 있네요. 적 들의 능력으로 보아 적룡배사진도 안심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요. 적룡이 죽으면 태사조님의 유품인 삼대 절 진중 만괴 수살진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예요."

    "저들도 우리 보여?"

    은성이가 적룡 배사진속에 들어와 적룡과 대치하고 있는 네명의 무림인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니요, 저곳은 아직도 검은 안개로 가득 차 있어요."

    악귀대주는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흉악한 성성이 같이 생긴 외모에 지렁이 같은 상처와 수북 한 털투성이를 반쯤 가려주던 상의 조차도 없어졌는지 군데 군데 피칠까지 하고서 악만 남은 눈초리로 적룡을 노려보고 있었다.

    혈안 마공을 운용한 상태에서 별의 별 괴물들과 악전고투를 벌이느라 내공이 평상시의 칠할 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양호한 편이었다.

    뒤를 따르는 악살귀와 대두도를 들면 눈에 보이는게 없다는 악귀대 제이의 고수인 광도살부(狂刀殺夫)는 아직 까지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희한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처참한 형상이었다.

    하지만 이들도 악에 받쳐 있는 것 같았다. 눈에서 악귀대주에 버금가는 혈광을 독살스럽게 내뿜으며 악다구니 처럼 걸음을 옮기는 이들에게 죽음은 차라리 안락한 사치로 여겨질 것 같았다.

    초열 지옥에라도 들어섰는지 하늘에서 살을 태울 듯한 태양빛이 내려 쏘이고 발 밑에서는 발바닥이 익어갈 정 도의 열기가 솟아 올라오자 악귀대주는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째진 입술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나오자 마자 증발 되어지는 땀방울 속의 염분 때문인지 짠 맛이 혀에 가득하고 목구멍이 거칠거칠할 정도로 심한 갈증이 온몸을 엄습해 왔다.

    사방이 모레 투성이인 이곳은 열사의 사막이었다. 그런데 바람 한 점 없이 덥디더운 모레 바다위에 온몸이 붉 은 화염에 둘러싸인 붉은 용 한 마리가 반쯤 몸을 드러내 놓고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몸 두께가 반장은 될 것 같은 적룡은 드러낸 몸체 길이만 오장이나 되었는데 두 갈래로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 거리며 상체를 좌우 로 흔들고 있었다.

    "흥! 좋다. 우리 악귀대의 최후를 네놈과 같이 한다면 결코 밑지지는 않을 것이다. 악살귀!, 광도살부!"

    악귀대주가 큰 소리로 악살귀와 광도살부를 불렀다.

    "예."

    악살귀와 광도 살부가 눈앞의 적룡을 바라보며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느꼈는지 숙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후에 지옥에서 보자. 하지만 저 붉은 지렁이도 데려가자. 먼저 가 있는 악귀대와 지옥에서 술 한잔 하려 면 안주감이 필요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악귀대의 삼 인이 세 갈래로 몸을 날려 적룡에게 달려들자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껏 공격하지 않 고 있던 적룡이 악귀대주를 향해 붉은 불길을 내뿜었다. 불길은 쇠조차도 녹일 수 있을 정도로 뜨거웠지만 호 락호락하게 당할 악귀대주가 아니었다. 급하게 경공을 발휘하여 옆으로 순간 이동한 악귀대주는 언제 또 내뿜 었는지 눈 앞에 붉은 불길이 닥쳐오자 모레속으로 파고들어 불길을 피한 후 공중으로 솟아 올랐다.

    악귀대주의 빠른 몸놀림에 당황한 듯 적룡이 분노의 굉음을 발했다.

    '쿠아아앙'

    울음소리에 적룡의 주변에 있던 모레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하늘을 뒤덮었으며 공중으로 솟아 오르던 악귀대주 도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큰 충격을 받지는 않은 것 같았다. 몸에 부딪혀오는 모레들을 튕겨내며 악귀대주 의 몸이 적룡에게로 바짝 다가갔다. 일장여 정도 남았을까... 갑자기 모레더미 속에서 무엇인가가 튀어 올라 악귀대주를 몰아쳐 갔다. 광포한 기세로 갑자기 휘둘러쳐 오는 그 무엇인가는 모레더미 속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적룡의 꼬리 부분이었다.

    악귀 대주가 적룡의 꼬리에 적중되려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붉은 섬광이 작열하는가 싶더니 가까스로 악귀대 주를 피해서 적룡의 꼬리가 방향을 틀었다. 악귀대주가 적룡에게 당하려는 순간에 악살귀와 광도살부는 적룡 과 가까운 곳까지 다가가 있었다.

    적룡의 굉음 소리에 둘 다 내상을 입었지만 어차피 살기를 포기한 목숨이었다. 악살귀의 새하얀 검날이 빛을 발하며 적룡의 배에 있는 커다란 비늘과 등에서부터 빼곡이 뒤덮여 있는 붉은 비늘 사이를 겨누고 살수의 날 카로운 감각으로 찔러 들어갔다. 그리고 광도 살부는 대두도에 모든 내력을 쥐어짜서 싣고는 무식한 방법으로 적룡의 몸통을 일도 양단의 수법으로 후려쳤다.

    '꽝'

    악살귀의 공격은 적룡에게 아무런 상처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검기가 실린 검은 찔러 들어간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튕겨져 나왔는데 검기에 찔린 적룡의 가죽 부위는 멀쩡한데 반탄진기라도 있는지 검과 함께 튕겨 져 나오는 악살귀의 입가에는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대신 광도살부의 공격은 약간의 효과가 있 었다. 대두도에 맞은 부위의 비늘 몇 개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하지만 광도살부는 손해본 장사를 한 셈이었 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노한 적룡의 입에서 쏘아져 나오는 붉은 화염을 피하지 못한 것이다. 새까만 숯덩이처럼 변한 광도살부가 그 의 대두도와 함께 모레 위로 떨어져 내리고 대두도는 모레속으로 파고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쿠어억'

    노한 적룡의 울부짖음에 내공을 운용해 패쇄시켜 놓았던 청각조차 흔들리고 정신이 혼미해져 오자 다급히 신 법을 발휘해 적룡에게서 멀어진 악귀대주가 사방을 살펴 보았다.

    죽음의 순간에 자신을 구원해준 그 무엇인가를 찾기 위함이었다. 사방이 탁 트인 사막이어서 그런지 악귀 대 주는 찾고자 하는 것을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적룡과 반대편에 붉은색 옷을 입은 대머리 노인이 서 있었다.

    감사의 표시로 포권을 하려던 악귀대주는 붉은 옷의 대머리 노인의 정체를 알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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