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34화 (34/152)

■ 제 34장 :

지금까지 팔짱을 끼고 장내를 주시하고 있던 사람이 소리를 지르자 고은하에게 죽음을 무릎쓰고 덤벼들던 검 은 옷의 무리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검은 옷을 입은 무리의 수장쯤으로 생각되는 사람은 자신의 뒤쪽으 로 와서 질서 정연히 서있는 부하들은 일별도 하지 않은 채 고은하를 향해 말했다.

"과연 '검후의 검은 폭염도 가르고 무공은 인세를 흔든다' 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겠구나."

"흥, 과찬이다."

"과찬이라..., 만년한철에 천잠사까지 섞이어 검기조차도 견디어 낼 수 있는 천잠망이 조각 나고 왠만한 문파 쯤은 하루 저녁에 소멸시켜 버릴 수 있는 잔살대의 절반 정도를 차디찬 땅 위에 누워 있도록 한 실력에 대한 찬탄이 과찬이라니... 으드득."

"잔살대?, 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마교의 무리로구나."

고은하는 마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듯 '마교'라는 단어에 유독 힘을 주며 말했다.

"그렇다. 검후 네년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고 하여도 몸 성히 무림맹까지 도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음..."

고은하가 낮게 신음하였다. 극비리에 무림맹까지 가기 위해서 문도 한명 대동하지 않고 얼굴까지 감추고 길을 떠났건만 마교의 정보망에 걸리고 만 것이다.

"어차피 네년을 죽이지 않고는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 마환을 복용해라!"

검은 옷의 수장이 말을 꺼내는가 싶자 뒤쪽에 있던 이십여명의 무리들이 일제히 무엇인가를 꺼내 입속에 털어 넣었다. 역시나 무엇인가를 꺼내 조금 씹더니 꿀꺽하고 삼킨 수장이 명령을 하였다.

"교를 위해 희생함은 내세에 천년의 영광을 약속할 수 있지만 교를 배신하고 적을 두려워 함은 만년의 수치이 자 지옥의 고통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잔살 극마진을 펼쳐라!"

그러자 잔살 대주의 뒤쪽에 있던 이십여명의 잔살 대원들이 고은하를 중심으로 넓게 원을 형성한 후 서서히 원을 좁혀왔다. 방원 사장여 정도에 이르자 십여명이 앞쪽으로 나오고 그 사이로 한 발정도 떨어져 십여명이 뒤따르는 진세로 되었다.

그런데 고은하를 포위하는 잔살 대원들의 눈빛이 정상이 아니었다. 처음에도 잔악하고 흉악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이제는 생기 대신에 극악한 사기가 죽음의 빛이 되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잔살 극마진 이라는 진 이 삼장여 정도로 좁혀져 오자 갑자기 고은하의 몸이 진의 한쪽으로 달려가며 차디찬 한광이 이는 검기를 뿜 어댔다. 그러자 고은하의 뒤쪽에 있던 잔살 대원들이 순간적으로 신법을 변화 시키며 고은하의 등뒤로 도기를 날렸다.

일순 앞쪽을 공격하던 한광이 크게 원을 그리며 뒤쪽으로 쓸어 나가며 검망을 날리어 왔다. 그러자 검망의 공 격권 안에 있던 잔살 대원들의 도가 한곳으로 뭉쳐졌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강력한 도강지기가 흘러나와 검 망을 잘라내어 버렸다.

'채챙, 챙'

예상보다 몇배나 강한 반격에 당황한 고은하가 앞쪽으로 반보쯤 밀려 나가며 다급히 호신 검막을 유지 하였다. 다행히 앞쪽에서 날아오던 몇 개의 도기가 호신 검막에 튕기어져 나갔지만 측면에서 잔살 대원 오명이 뭉친 도강지기가 다가오자 재빨리 호신 검막을 거두고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키며 도강지기를 가까스로 피해 낼 수 있었다.

잔살 대원들은 처음보다도 신법이나 공력이 몇 배나 증가되어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합벽진이 괴이신랄 하 고 몇 명이 도기를 모여 도강지기를 방출하기 까지 하자 면사에 가려진 고은하의 미간에 살기가 어리어졌다.

뒤쪽으로 세 가닥의 도기가 다가오자 고은하의 신형이 좌우로 흔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뒤돌아 섰는지 투명 검을 도기가 이는 곳으로 휘둘러 갔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휘둘러 대는 투명검에는 한자는 될 듯한 하얀 검강이 어려 있었다.

'으윽'

세 개의 도가 세 개의 손목과 함께 피에 젖어 땅바닥으로 떨어지자 느긋하게 현장을 주시하던 잔살 대주의 눈 에 경악성이 어리어졌다.

'검후의 무공이 높다는 것을 알았지만 검강지기까지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정도라고는...'

조급하게 현장을 직시하던 잔살 대주의 시선에 조금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검후에게로 시선을 못 박고 있는 은 성이가 띄였다.

'흐흐흐'

다소 징그러운 괴음을 흘러내던 잔살 대주가 급히 몸을 날려 은성이에게로 덤벼 들었다. 은성이와 검후가 조 금이라도 관계가 있다면 은성이를 사로잡아 검후의 집중력을 분산시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차가운 검망을 사방에 뿌리며 잔살 대원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던 고은하의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우려하 고 있었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잔살 대주가 은성이에게 몸을 날리자 걱정이 앞선 고은하는 공력을 배가시켜 검강을 날리었다. 한자 반 정도 로 늘어난 검강지기에 도강지기를 형성하던 잔살 대원들 다섯명중 세명이 맥빠진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쓰 러 졌지만 잔살 대원들은 고은하가 몸을 빼낼 수 있는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오른손을 잘리운 잔살 대원 세 명이 왼손에 검을 거머쥐고 진을 이탈하여 고은하에게 달려오며 검을 암기처럼 던졌다.

'채챙'

간단히 세 개의 검을 쳐낸 고은하는 잔살 대원들이 무공도 익히지 않은 파락호처럼 육탄 공격하 듯 몸을 던져 오자 입술을 질끈 깨물고 투명검을 다시 휘둘렀다. 그런데 몸을 던져오는 잔살 대원들의 자세가 이상하게 변 화 되었다. 칼도 들지 않은 왼손을 일제히 들어 손가락을 쫙 편 후 고은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일순 섬찟함을 느낀 고은하가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 올랐다. 발 밑으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가는 것들이 잔 살 대원들의 손가락 이라는 것을 확인한 고은하의 머리끝이 쭈삣해졌다. 이어서 손가락이 없는 손을 들어 고 은하를 가리키자 팔이 팔꿈치 부근에서부터 끊어지며 검은 핏물을 토해내며 고은하에게로 짖쳐 들어왔다.

공중에서 힘을 빌릴 곳이 없자 급하게 호신 강막을 펼쳤지만 잔살 대원들이 쏘아낸 팔 공격에는 그들의 필생 의 힘이 잠재력 까지 모두 쏟아 부어져 있었다.

'펑, 펑펑'

호신 강막이 크게 흔들리고 급하게 땅에 내려선 후 투명검으로 크게 원을 그려 주변에 검막을 형성해 적의 추 가 공격을 저지한 고은하의 입가에 가는 선혈이 흘러 나왔다. 내상을 입은 것이다. 팔꿈치를 끊어 날려 보낸 잔살 대원들은 그제서야 통나무가 땅에 넘어지듯 빳빳한 몸통이 뒤로 쓰러져 갔다.

이제는 십이명 밖에 남지 않은 잔살대원들은 고은하를 향해 원독의 눈빚을 뿜으며 다시금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시선을 돌려 은성이를 바라본 고은하는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자세를 반쯤 낮춘 은성이와 일정여 정도 떨어진 허공 위로 잔살대주가 머리를 뒤쪽으로 젖힌 채 날아가고 있 었다. 자세로 보아서는 반격이나 후퇴시의 동작이 아니었다. 오직 한가지, 목숨이 끊어져서 신체를 움직일 수 없는 자가 타의에 의해 무방비 상태로 뒤쪽으로 나가 떨어질 때의 자세였다.

뒤로 날아가는 잔살대주의 이마 앞쪽으로 묵혈이 조금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추측은 더욱 신빙성이 있었 다. 은성이가 무사하다는 것을 보는 순간 가쁘게 맥박치던 호흡이 짧은 시간안에 정상을 되찾아 가고 들끓던 기혈도 가라앉아 가는 것 같았다. 반대로 잔살 대주가 죽자 잔살 대원들이 동요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크아악'

잔살 대원들은 잔살대주가 죽자 야수같은 괴음을 지르며 일제히 고은하에게로 덮쳐갔다. 도강에 이어 도가 날 아오고 도를 따라 팔꿈치가 끊어진 팔까지도 한꺼번에 닥쳐들자 고은하의 눈빛에 절망이 어리어졌다.

잔살 대원들의 처음 인원은 사십명이었다. 도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들을 지금까지 이십팔명이나 죽이면서 진기의 소모가 너무 막대하였던 것이다. 보타문 비전의 절기인 '옥녀산화(玉女散花)'의 초식을 펼치면 도와 도강은 물론이고 지독한 '팔'의 공격까지 도 간신히 막아 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공력으로 펼치는 옥 녀산화의 위력으로는 공중으로 뛰어올라 공격하는 네명의 공격까지 막아 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아는 정보로는 원래 잔살 대원들의 능력은 이 정도 까지는 아니었다. 원인이 조금 전에 잔살 대원들이 먹었던 '마환' 이라는 환단에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은 것 같았다. 싸움중에 잔살 대원들에게 마환 을 먹을 수 있는 여유를 준 그녀가 실수한 것이었다.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달리 대처할 방법도 없었다.

온몸의 진기를 모두 짜내어 옥녀산화의 초식을 펼치자 고은하의 주변으로 고운 꽃송이 들이 피어 올랐다. 아 름답게 피어오른 꽃송이들이 팽이처럼 돌자 다양한 색상의 화영들이 고은하의 주변을 에워쌌다. 그리고 화영 들은 번개같은 속도로 주변으로 펴져 나갔다. 화영에 닿는 모든 것이 파괴 되어졌다. 도가 부숴지고 묵혈을 흘리며 날아오던 팔이 터져 나가고 도강이 화영과 부딪히며 힘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잔살대원 들의 육체까지도 가공할 속도로 도는 화영의 회전력에 의하여 화탄이 터지 듯 잔인하게 터져 버렸다.

화영은 공중으로도 솟아 올랐지만 극히 일부였다. 공중에서 덮쳐오는 네명의 잔살 대원중 한명만이 화영에 의 해 숨이 끊어졌지만 세명의 잔살대원들이 날린 도기와 뒤따르는 '팔'의 공격은 아무런 저항없이 고은하의 머 리 위쪽으로 쏟아져 내려 왔다.

전신의 모든 진기를 쥐어 짜듯이 하며 옥녀산화의 초식을 펼쳐낸 고은하는 서서히 무너져 가며 조용히 두 눈 을 감았다. 열 여섯 꽃다운 청춘이 여기에서 끝나 버리는 것이다. 세 살때 사부에게 발탁되어 개정대법과 영 약 그리고 속세와의 모든 인연을 끊으셨다는 전대 장문인의 파격적인 무술 전수 등 무공 수련과 학문에만 모 든 심혈을 기울여 오다 두달전 무림맹에 가 계시던 사부가 마교에 의해 운명을 달리하시면서 남긴 유명에 의 해 장문인이 되고 보타문의 중흥이라는 중책까지 넘겨 받았건만...

보타문의 중흥을 위한 무림맹 출도와 마교 섬멸의 꿈도... 열여섯 작은 가슴에 꿈꿔오던 백마 탄 왕자님에 대 한 환상도 여기서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문득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되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은 세 살때 헤어진 이후로 일년에 한 두번 볼 수 있었던 부모님의 얼굴도 아니었고 언제나 자 상하시던 사부님의 얼굴도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은성이의 환한 얼굴이 두눈에 그려졌다.

몇 일 동안의 추억을 생각하며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짓던 고은하는 문득 주변이 조용해지자 다소 이상한 생각 이 들었다. 자신이 죽었기 때문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두렵고 끔찍함에 두 눈 을 더욱 꼬옥 감을 때 꿈결인 양 친근한 음성이 들려 왔다.

"은하, 괜찮아?"

은성이의 목소리였다. 눈을 뜨고 주변을 보자 그토록 악귀처럼 날뛰던 잔살 대원들 중에서 서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고은하는 자신의 눈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은성이를 보자 너무나 반가움에 자신도 모르게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는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하였다. 은성이는 고은하가 갑자기 껴안자 당황하고 난처해 하였지만 갑자기 서럽게 울기 시작하자 동작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대신 팔을 뻗어 고은하의 등을 껴안아 주며 살며시 다독 여 주었다.

"괜찮아? 울지마‥!"

서서히 울음소리가 잦아들던 고은하는 은성이를 껴안던 손을 풀고는 역시나 쑥쓰러운지 은성이의 시선을 피했 다.

"와! 은성아, 고 아가씨 싸움 잘 한다."

어느새 은성이의 어깨로 내려 앉은 금아가 고은하를 바라보며 감탄의 말을 하였다.

"그러게, '검후'라고 불리우던데."

하며 은성이는 고은하를 부축해 주었다. 고은하가 탈진한 사람마냥 부축해 주어도 잘 걷지 못하자 갑자기 은 성이가 고은하 앞에 등을 들이 밀었다.

"업혀!"

어떻게 처녀의 몸으로 다른 남자의 등에 업힌단 말인가? 무척 난처해 하고 쑥쓰러워하던 고은하가 한참 후 조 용히 한 손을 뻗어 은성이의 어깨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러자 은성이가 고은하의 손을 잡아 당겨 등 뒤에 업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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