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29화 (29/152)

■ 제 29장 :

천밀영은 십삼인의 죽음의 전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천밀영은 왜국을 암중 장악하고 있는 실세이었 다. 아직까지 천밀영의 눈을 벗어나고서 살아 있는 사람은 전무하였다. 심지어는 왜왕조차도 천밀영을 위해서 선물이라는 이름의 공물을 매년 받쳐 오고 있었다.

그 천밀영에서 세 번째 서열인 자신과 아홉 번째, 그리고 열 세 번째 서열의 삼인의 협공에서도 앞에 있는 소 년은 쓰러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자신은 필살의 초식인 혈룡비를 시전하느라 전투 능력을 상실 하였고 유술의 고수인 열세번째 서열인 혈의인 조차도 오른손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게다가 자신들에게 한발 한발 다가서고 있는 소년은 가까워질수록 창백해진 얼굴이 재 혈색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일보 일보 내딛고 있는 걸음걸이에 일종의 현기가 어리어져 있는 것 같자 뚱뚱했던 혈의인이 절로 눈을 감았 다.

조사지공인 '일시무시일' 보법을 펼치며 한발 한발을 내딛고 있는 은성이는 중단전에 잇는 태극진기를 이용하 여 폭주하고 있는 하단전의 진기를 이미 제압하여 안정화를 시키고 있었다. 내상이 심한 상태이지만 적수들을 아직 한 명도 쓰러트리지 못한 상태인지라 오장 육부를 보호하기 위해 별도의 진기를 남겨 놓을 수가 없었다.

조사지공인 일시 무시일은 현기가 담기어져 있어 정신을 안정화 시키고 기식을 조절하는데 이상적인 보법이었 다. 게다가 불시의 기습 등에 순간적인 대응까지 할 수 있는 무공이었다. 은성이가 뚱뚱했던 혈의인과 오장여 정도에 이르자 충만한 태극진기가 내상으로 인한 아픔조차 잊도록 만들어 주었다.

갑자기 은성이가 뚱뚱했던 혈의인에게 달려들자 왜소한 혈의인이 은성이에게 덮쳐 왔다. 왜소한 혈의인은 오 른손이 뽑히는 중상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덮쳐오는 기세나 빠르기는 처음의 위세와 별 다름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처음의 기세에 살기까지 실리어 더욱 살벌해져 있었다.

몸을 날리던 은성이의 왼손이 앞으로 뻗어 나갔는데 아직도 삼장여나 떨어진 위치에서 뒷걸음치고 있던 뚱뚱 한 복면인의 허리에 꽂혀져 있는 화룡도가 쏘는 듯이 은성이에게 날아왔다. 극성에 다다른 허무경 육단계의 흡자결 '허공섭물' 이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화룡검 보다는 왜소한 복면인이 한 걸음 더 빨랐다.

은성이가 화룡검을 잡는 것을 방해라도 하려는 듯 은성이의 눈앞에서 공중으로 솟아오른 왜소한 혈의인의 족 영이 순식간에 열 세개로 늘어났다. 그리고 족영 사이로 은밀하게 수영(手影)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비마 십삼각'과 '암영수'의 절묘한 조화로 왜소한 혈의인을 천밀영의 위치에 올려 놓은 절기가 펼치어 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태극 진기를 전력으로 운기하고 있는 은성이었다. 가공할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한 은성이가 '회 룡파운'의 초식을 펼치자 청색의 폭룡이 하늘로 솟구치며 하늘 위에 있는 모든 것을 갈갈이 찢어발겨 놓았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혈우도 폭룡의 광폭함에 놀랐는지 순간적으로 발생되어지는 돌개 바람에 튕겨져 흩뿌려져 버렸다. 가공할 속도로 회전하던 은성이가 서서히 회전하던 몸을 멈추는 시점에서야 초식을 펼치느라 허공섭 물의 흡자결을 잠시 중단한 여파로 땅바닥으로 떨어지려던 화룡검이 다시 위쪽으로 솟구쳐 올랐다. 은성이가 막 화룡검을 받아 쥐려는 순간이었다.

은성이와 화룡검의 사이에서 갑자기 생겨나기라도 하 듯 순신간에 나타난 혈의 복면인의 손에서 빗살보다 빠 른 도강이 은성이를 내리쳐 왔다. 공간중에 몸을 숨기었다가 나타난 것처럼 혈의인의 등장 시점은 갑작스러웠 으며 또한 공격 시점도 절묘하기 그지 없었다. 은성이가 화룡검을 막 받아드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은성이가 비록 검을 빼앗겼지만 검 이외에 다른 무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집중적으로 검을 수련한 검사임을 이미 눈치챈 혈의 복면인이었다. 검이 없는 검사는 검법 이외의 무공으로 대결할 수도 있지만 검을 손에 든 검사는 검으로 대결을 하려고 하는 것이 검사의 본능이자 운명이었다.

이미 은성이의 권법 수준이 파천황적임을 눈치챈 혈의 복면인은 상대방의 약점을 극단적으로 파악하고 이용하 는 인자답게 절묘한 수단을 강구한 것이다. 바로 은성이가 검을 손에 잡는 순간적인 시각을 이용한 공격이었 다. 상대방이 검을 받아 쥐고 이를 뽑고 휘두르는 시간을 충분히 감안한 후 상대방의 심리까지 파악하여 회심 의 일초를 도강까지 발휘하여 휘두르던 혈의인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눈앞으로 무엇이 지나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빛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빠르고 안 지나갔다고 하기에는 왠지 찜찜한 그 무엇이었다.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는 혈의인의 이마위로 가는 혈선이 내보이기 시작하였다. 혈선은 이마에서 콧잔등을 타고 턱까지 이어 져 내려오고 있었다. 도강을 흘리던 무적의 신도에서는 이제는 도기조차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혈의인의 눈에 애인보다도 사랑하고 한번도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그만의 애도 '혈빙아'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 투영되어져 갔다. 이미 신화의 경지에 들어선 유성검법의 빠르기를 간과한 혈의인의 어이없는 최후이었 다.

한편 한쪽에 있던 뚱뚱했던 혈의인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혈룡비의 자루가 굳게 잡혀 있었다.

인자술을 극성으로 익힌 천밀영의 아홉번째 형제가 생을 달리하는 순간 이미 혈룡비는 그의 뱃속 깊숙이 박혀 들어가 있었다. 혈룡비를 한쪽으로 서서히 민후 직각으로 올라가는 그의 손은 전혀 떨림이 없었으며 안색도 두려움은 커녕 담담하기 조차 하였다. 이윽고 뚱뚱했던 혈의인의 안광이 빛을 잃자 은성이는 발길을 돌리려다 가 다시금 몸을 돌려 세웠다. 이미 마교 적발지마와의 대결에서 죽었으리라고 생각하던 적발지마의 혼이 빙의 된 신검을 도망치도록 하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었지 않은가?

게다가 이들은 살부지인(殺父之人)들 이었다.

은성이의 검지에서 금빛이 어리는가 싶더니 금빛은 뚱뚱했던 혈의인의 심장이 있는 부위로 쏘아져 나갔다. 미 륵지에 맞았건만 이미 죽은 혈의인은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급히 태극진기를 내상 부위로 보낸 은성이는 최소한의 공력으로 경공을 펼쳐 초금의가로 몸을 날렸다.

초금의가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한밤중에 은성이가 옷 입을 겨를도 없었는지 잠옷만 입은 채 행방불 명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몸 놀림 소리에 이어 상체가 피에 얼룩진 채로 은성이가 나타나자 용왕과 해적단 일 행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의원님! 대체 무슨 일이신지요? 잠결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 밖에 나와보니 이 의원님이 안 계셔서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용왕이 옆에 있는 부하에게 은성이의 겉옷을 가져오라고 명령을 한 후 은성이의 안부를 물었다.

"죄송합니다. 모두의 잠을 깨운 것 같군요.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니니 마저 눈을 붙이시길 바랍니다."

온몸에 피칠을 한 후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니라니 선뜻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부하에게서 은성이의 겉옷을 받아 든 용왕이 지룡과 노룡을 빼고 부하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용왕님!"

"예! 이 의원님"

은성이의 겉옷을 받아 은성이를 덮어주던 용왕이 공손한 어조로 대답을 하였다.

"제가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상빙고에서 며칠 조식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상빙고의 출입을 통제 시켜 주시지요."

은성이는 상체가 피에 묻어 있는 것 외에는 안색도 좋고 어디 다친 데도 없는 것 같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용왕이 깜짝 놀랐다.

"알겠습니다. 이 의원님. 저희가 목숨을 걸고 그 누구도 상빙고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은성이가 내상을 입은 것 같자 대답하는 용왕의 표정은 엄숙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하였다. 상빙고에 들어선 은성이는 삼일 밤낮동안 진기 요상법을 펼친 후에야 간신히 정상적인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번 대결을 통해 은성이가 배운 것은 매우 많았다. 무엇보다도 부족했던 실전 경험을 통해 초반에 검을 빼앗 기고 유술을 쓰는 혈의인에게 어처구니 없이 당한 것 그리고 혈룡비에 당한 것을 회상하며 방심의 위험함과 공수의 요령에 대해 배웠다.

잃은 것 보다는 얻은 것이 많았던 대결이었다. 게다가 살부지원을 일부나마 풀었다는 안도감에 그 동안 한쪽 가슴위에 얹어져 있는 복수의 원념이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중원으로 가서 고진인의 한을 풀어주고 사부님의 안부를 확인할 일만 남은 것 같았다.

몸이 회복된 후 은성이는 해적단 일행과 작별 인사를 하면 괜히 같이 가겠다고 할 것 같자 정집사와 용왕에게 간단한 쪽지만을 남겨둔 채 금아만 데리고 초금의가를 벗어났다. 용왕에게 남긴 쪽지에는 즉시 해적단을 이끌 고 이전의 본부인 흑산도로 가서 단원을 늘리고 왜구들을 방어하라는 부탁 아닌 명령을 적어 놓았다.

해안가... 칠흑처럼 어두운 밤바다를 헤치고 작은 쪽배 하나가 거침없는 속도로 다가서고 있었다.

쪽배에는 사람의 형상을 한 인영이 한명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노를 젓거나 돛을 달지도 않았건만 쪽배는 쏜살 같은 속도로 해안가 절벽 아래까지 달려왔다. 절벽아래에서 쪽배의 속도가 조금 느려지는가 싶더니 일순 배에 타고 있던 괴인영이 절벽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수중에 무엇이 있는지 삼장에 한번씩 절벽을 탁 탁 치며 그 반동으로 오르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아찔할 정도로 높은 절벽 위에까지 다 올라왔다. 괴인영은 절벽 위에 지어져 있는 사당까지 조심스럽게 다가서며 한참을 경계하는 것 같더니 홀연히 모습이 사라졌다. 아마도 사당안으로 들어선 것 같았다.

잠시 후에 다시 사당 안에서 밖으로 나선 혈의인은 사당과 십장쯤 떨어진 곳에서 목표하던 것을 찾았는지 잽 싸게 몸을 날리었다. 이상하게도 적막함과 고요함에 천지가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괴인영 이 몸을 날리는데 따른 소리가 전혀 발생되지가 않았다. 이마에서 사타구니까지 일자로 갈라진 시체 앞에서 으드득 이를 가는 소리를 발하던 괴인영은 근처에서 앉은 채로 절명한 시체를 발견하고는 다시금 그리로 몸을 날리었다.

한참동안 시체의 이곳 저곳을 살펴보던 괴인영이 돌연 시체앞에 가부좌를 한 후 앉았다. 이각 정도나 지났을 까? 괴인영에게서 뭉클뭉클 피어오르던 칠흑보다.검은 묵기가 앞에 있는 시체를 뒤덮기 시작하였다.

이때였다. 지금까지 눈을 감고 좌정한채 묵기만을 발하고 있던 괴인영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그런데 괴인영 의 눈에서는 붉은 광채가 줄기 줄기 세어 나오고 있었다. 검은 묵기 속에서 붉고 사악한 요기를 내뿜던 괴인 영의 손이 춤을 추듯이 시체를 향해 흐느적 거리는가 싶더니 이상한 주문 같은 소리가 들리어 오기 시작하였 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미 죽은 시체의 눈이 번쩍 뜨여진 것이다. 그런데 시체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사기를 줄줄 흘리고 있는 백안만이 전부였다. 앞의 괴인영이 무엇이라 소리치자 시체의 입이 벌어졌 다. 그리고는 생기가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무어라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일각동안이나 시체와 대화를 주고 받던 괴인영이 이번에는 시체가 간직하고 있는 영상마져 훔쳐 가려는 듯이 시체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주문을 외우던 괴인영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윽고 매우 피곤한 모습으로 다시금 좌정에 들어가자 시체의 눈도 천천히 감기어지기 시작하였다.

한참 후 좌정을 마친 괴인영이 앉아 있는 시체와 이등분된 시체를 들어 절벽 아래로 버린 후 절벽을 타고 내 려가기 시작하였다. 역시나 삼장에 한번씩 절벽을 탁탁 치면서 떨어지는 속도를 줄이며 절벽 아래로 내려 갔 는데 순식간에 절벽아래 파도에 휩싸여 이리저리 휘돌던 쪽배위로 올라섰다. 그러자 처음과 같이 쪽배는 어둠 만이 넘실거리는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처음과 다른 것이라고는 쪽배의 방향이 바다쪽으로 향했다는 것과 괴인영이 서 있지 않고 앉아 있다는 것 그 리고 배의 속도가 올 때 보다는 늦어 졌다는 것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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