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27화 (27/152)

■ 제 27장 :

이미 잡아 놓은 멧돼지의 등목 부위를 한손에 든 후 금아를 타고 초금의가 근처에서 내린 은성이는 멧돼지를 들고 초금의가로 들어갔다.

해적단의 부하들은 초금의가의 상빙고 금처에 임시 움막을 짓고 거처하고 있었다. 은성이가 저녁이 되어도 돌 아오지 않자 임시 움막 앞에서 은성이를 기다리고 있던 해적단 일행 중에서 덩치가 크고 얼굴에 털이 부숭부 숭한 해적 하나가 은성이를 보고 잽싸게 달려와 멧돼지를 받아 들었다.

"이 의원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일행중 지룡과 노룡만을 남기우고 부하들을 움막으로 보낸 용왕이 상빙고로 막 들어가려는 은성이에게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부리로 연신 털을 고르고 있는 금아를 어깨위에 얹어놓은 채로 은성이가 말을 받았다.

"오늘 몸이 완쾌된 것 같아 다친 이후 처음으로 몸을 풀 겸 무공을 시연해 보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혹 아직도 불편하신 곳이 있는지요?"

"아... 아닙니다. 실은 무공을 시연해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진기의 운행이 훨씬 순조롭고 무공 경지가 다 치기 전에 비해 몇 단계 높아져 있었습니다."

"하!하! 축하합니다"

"저..., 노룡과 지룡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룡은 사문의 숙원인 비도술이 팔성 단계에서 갑자기 십성 단계로 도 약된 것 같다고 합니다. "

옆에서 은성이와 용왕의 대화를 듣고 있던 노룡이 한마디 거들었다.

"이 은원님, 믿어 주시기 어렵겠지만 이번 저의 도약은 이삼십년의 수련을 건너뛰어 버렸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인데 어떤 연유인지 알려 주실 수는 없는지요?"

평상시 이미 죽은 광룡 이외에는 이처럼 긴 말을 한번도 하지 않던 노룡이었다. 하지만 무공이 갑자기 상승의 경지에 들어서자 심부 깊은 곳에서 스며 나오는 희열에 항상 짧은 대화체 만을 구사하던 노룡조차도 대화에 수식어를 붙이고 있었다.

"음... 용왕님, 실은 세분을 치료하면서 일행들에게 그간 해적단이 왜구들을 막아 주고 또 그 때문에 이렇게 큰 부상까지 당하였다고 들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의가에서 태어났고 운이 좋아 동방파의 제자로 무공을 배운 바 있어 세분을 치료하면서 벌모 세수를 시전 하였습니다."

"예! 벌... 벌모세수!"

은성이의 말을 듣고 있던 용왕과 노룡, 지룡은 입을 딱 벌릴 수 밖에 없었다.

'벌모세수'

은성이가 비록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고 있지만 벌모세수는 일반 무사들은 꿈도 꾸지 못할 단어이었다.

벌모세수는 아무나 시전할 수 있는 절학이 아니었다. 내공이 노화 순청의 단계를 넘어서야만 간신히 펼칠 수 가 있었다. 게다가 한 사람의 벌모세수를 해 주기 위해서는 노화 순청의 경지를 넘어선 무인이 최소한 세명은 필요하였다. 세명의 고수가 천지인 삼재의 방위중 한 곳씩을 맡아 진력을 손상해 가면서 최소한 세시진 이상 을 시전해 주어야만 하는 것이 벌모세수에 대한 정설이었다.

그런데 내공이 노화 순청의 단계를 넘어서는 고수가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고수가 될수록 심리적 으로 그 동안 쌓아 온 진력에 의지하는 바가 커져 갔다. 어렵게 쌓아 놓은 내공이 감소된다면 그 동안 쌓아 놓은 명성을 한순간에 무너트릴 수가 있는 것이다. 어느 누가 어렵게 쌓아온 진력을 손실해 가면서 벌모세수 를 베풀 어 준단 말인가... 가끔 이름난 문파에서 자질이 매우 뛰어난 제자에게 벌모세수를 베풀어 주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것조차 매우 드문 일이었다.

'털썩'

갑자기 용왕이 은성이를 향해 무릎을 꿇자 노룡과 지룡도 용왕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비록 벌모세수가 대단하지만 해적단의 그간 공로로 보아 큰 보답도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큰 내력 손실도 없었습니다. 일어나시지요."

용왕이 갑자기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자 은성이는 난처해 하며 용왕을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었다.

"주공 ! 저희가 몸은 각기 다른 부모님에게서 물려 받았지만 오늘 새로운 부모를 만나 다시 태어나게 되는 영 광을 얻었습니다. 비록 저희가 부족한 점이 많지만 오늘부터 새로 태어나게 해주신 주공의 수하로 들어가고자 하오니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용왕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해적단의 그간 행적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작은 선심을 베푼 것 뿐입니다. 그리고 제 나이가 이제 열입곱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말도 되지 않는 부탁이며 천부당 만부당 합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하지만 용왕 일행은 땅에 무릎이 못이 박힌 듯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때였다. 용왕의 뒤쪽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노룡이 품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바로 얼마전 그의 가 슴속에서 생살을 찟고 꺼낸 왜구의 표창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표창을 꺼내든 노룡이 갑자기 윗옷을 벗고 상처 자욱이 있는 가슴 부위에 시퍼렇게 날이 선 표창을 대며 단호히 말을 하였다.

"주공, 만약에 저희들이 주공의 수하가 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되시면 저희도 주공께서 베풀어 주신 호의를 거절하겠습니다."

노룡이 표창을 가슴에 박으려고 하자 해적단의 갑작스런 제의에 갈팡질팡하던 은성이가 다급히 소리쳤다.

"아니! 왜.. 왜 그러십니까? 알겠습니다. 재발 손을 멈추십시오."

은성이가 할 수 없다는 듯이 해적단의 제의를 승낙하자 용왕 일행이 매우 기뻐하며 움막에 있는 해적단의 부 하들을 불러 소집하였다. 시끄러운 상황에 정집사까지도 밖으로 나왔다.

"오늘부터 우리가 주공으로 모시게 될 분이시다. 자, 나를 따라서 주공께 충성을 맹세하자!"

용왕이 해적단과 함께 은성이에게 주공으로 받들어 모시기 위한 예를 취하려고 하자 은성이가 급히 만류하였 다.

"잠깐만요. 용왕님! 오늘 제가 과분하게도 여러 영웅님들의 상전으로 받들어 지게 될 것 같은데 이를 수락하 는데 따른 세 가지의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주공. 백가지라도 모두 들어드리겠습니다."

"첫째, 저에 대한 호칭 문제입니다. 저는 대협도 아니고 또 주공이라는 호칭은 너무 과분하므로 여러분들이 저를 계속 이 의원이라고 호칭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공! 그것은 매우 어려운 조건입니다. 조직은 일사분란 해야만 되고 호칭은 엄격해야만 합니다. 조직이 커 질수록 이는 단호히 적용되어야만 하는 규칙입니다."

용왕의 뒤에 서 있던 지룡이 난처하다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지룡! 그런 문제는 별도로 내부 규칙을 정해서 해결해도 될 것 같다. 우리가 주공으로 모시려는 이 의원님의 첫 번째 부탁인데 거절하면 되겠느냐?"

"이 의원님, 첫 번째 명은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역시 한 조직의 수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비록 지룡이 전략과 전술, 조직 관리에 탁월한 재 능을 가지고는 있지만 지도력과 기민한 상황 판단은 용왕이 한 수 위였다.

"좋습니다. 그럼 두 번째 조건은 우리 해적단의 목표를 분명히 하는 문제입니다. 저는 우리 조직의 목적을 애 국 애민에 두고자 합니다. 백성들을 보호하고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는 정의로운 조직이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이 의원님, 두 번째 명도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의외로 용왕을 비롯한 해적단이 은성이의 조건을 쉽게 수락해주자 은성이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세 번째 조건은 조건이라기 보다도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한 부탁입니다. 제 개인적인 일로 조만간 중국에 다녀와야 될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제 신변 문제를 해결한 이후에야 해적단의 수장으로서의 임무를 할 수 있 을 것 같습니다."

"음...,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의원님, 중국에 가실 때 저희들이 따라가면 혹 도움이 안되겠습니까?"

"용왕, 세 번째 조건도 수락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제가 여러분들의 상전이 되었으니 호 칭에서 존칭을 생략하겠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제가 처리해야 할 일은 매우 사사로운 일이니 저 혼자 다녀 오겠습니다."

"이 의원님, 저만이라도 모시겠습니다."

노룡이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은성이가 혼자서 중국행을 한다는 말에 노파심이 생기는 듯 말을 받았다.

"노룡! 이것은 세 번째 조건이며 이미 수락되어진 일이네. 그리고 해적단의 전력에서 자네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무거운데 자네가 빠질 수는 없지 않은가?"

이미 해적단의 수장이 되기로 마음 먹은 탓인지 은성이는 용왕에게만 존칭을 하여주고 노룡과 지룡에게는 하 대를 하였다.

"알겠습니다.이 의원님"

"오늘은 우리가 이 의원님을 상좌로 모시는 영광스러운 날이다. 모두 축하하는 의미에서 잔치를 벌이자."

역시나 호쾌한 용왕이었다.

은성이의 단독 중국행이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에게 벌모세수를 시전하여 줄 정도의 고수이며 또한 이미 마음을 굳힌 듯 하자 용왕이 자칫 무거워지려는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켜 주었다.

즉각 해적단 부하들에 의해 금아가 잡아 온 멧돼지가 통째로 불에 구워지고 간단한 식사거리가 만들어 졌으며 해적단 부하들이 몰래 숨겨놓은 술도 상위에 올려졌다. 잔치는 밤 늦도록 벌어졌고 난생 처음 술을 마신 은성 이는 축하한다며 계속 건네어지는 건배주에 인사불성이 되어 잠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아침에 일어난 후 어젯밤에 과음한 용왕과 노룡이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리다며 엄살을 부렸지만 그들 보다도 더 과음한 은성이는 숙취가 전혀 없었다. 아마 오장육부에 상주하는 태극진기의 공능 때문인 것 같았다.

왜놈 인자들의 무공 수준을 감안하면 무엇보다도 해적단의 실력 향상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은성이는 해적단에 게 무공 수련에 박차를 가하도록 명령 하였다.

용왕은 금종조와 박룡수를 끼고 시전하는 만파절무수를 특기로 하고 있었다. 박룡수는 재질이 가죽인 것은 확 실하지만 도검이 뚫을 수 없을 정도로 질기면서도 부드러운 용왕 이무기의 보물 일호이었다. 이미 은성이의 벌모세수로 인하여 금종조와 만파절무수가 경지에 들어선 것을 확인한 은성이는 시선을 노룡에게로 돌리었다.

노룡은 비도술만을 집중적으로 익히고 있었다.

지금 시전하고 있는 비도술의 '일비진천' 초식은 은성이도 감탄할 정도였다. 노룡은 해동에서 비도술만을 전 문적으로 수련하는 뇌음도문(雷音刀門)이라는 문파에 투신했었다. 왜구에게 가족이 처참히 유린되는 장면을 목격한 뇌룡의 살의는 그를 무공광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하루 두시진 이상을 자본적이 없이 오직 피나는 수 련만을 거듭한 그를 보는 사문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노룡의 성격이 붙임성이 없고 무뚝뚝한데다가 광기에 번들거리는 그의 안광이 상대방에게 적대감을 주고 있었 기 때문이다. 사문에 발을 들인지 십오년... 장문인에게서 직접 무공을 사사받은 사형과 사제들 중에서 그의 실력은 당연 발굴이었다. 비도로 십장밖에 날아가는 제비까지도 떨어트린 적이 있을 정도였다. 뇌음도문은 타 문파와는 달리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장문인을 뽑고 있었다.

전대 장문인이 그랬으며 현 장문인도 그랬다. 게다가 장문인의 명령은 절대 반복될 수 없을 정도로 무소불위 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십오년동안 뇌음도문에 들어와서 피나는 수련을 하고 있던 노룡의 목표는 단 한가 지 뿐이였다. 뇌음도문의 장문인이 되어 문도들을 이끌고 왜구들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문인은 차기 장문 후보로써 그가 아닌 그의 사형을 발탁하였다.

뇌음도문에서 가장 비기로 삼고 있는 비도술인 일비진천을 대성할 수 있는 인재는 노룡이 아니라 그의 사형이 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상승의 비기는 절대적인 심신의 고요함을 필요로 하는데 노룡에게는 성급함만이 있고 차분하고 고요함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비진천을 대성할 수는 없다는 설명이었다. 야음을 틈타 뇌음도문을 빠 져나와 방랑하며 혼자서 왜구들을 소탕하던 노룡은 사문의 눈을 피하고 평생 숙원인 왜구들을 소탕하기 위해 서 해적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올해 삼십이 되는 노룡이 이십오세 되던 날이었다. 현재 노룡의 일비진천 초식은 십성 단계에 와 있었다. 십 일성 수준에 이르면 은은한 뇌음이 흘러 나오고 그리고 사문의 개파조사 조차도 완성하지 못한 경지인 십이성 대성은 절대무음, 무광의 절세 무적의 초식이 바로 일비진천이었다.

은성이가 보기에도 노룡의 수법에서 초식상의 결함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비도술을 펼치기에 완벽할 정도로 단련된 근육과 감각을 가지고 있는 노룡에게 이제 남은 것은 내공 수련과 깨달음 뿐이었다.

좀처럼 자신의 무공 실력을 보이지 않는 지룡의 절기는 선법(扇法)이었다. 왜구들과의 싸움에서 잃어버린 부 채를 대용하기 위해 급조한 듯한 부채였지만 그 동작은 매우 표홀하고 상대방의 혈도를 찍어가는 듯한 초식은 날카롭기 그지 없었다. 지룡도 은성이의 벌모세수로 인해 무공 경지가 한단계 향상된 것 같았다. 은성이가 자 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조차도 의식하지 못한 채 지룡은 부채를 폈다 접었다하며 가공의 적수를 향해 맹공격 을 가하고 있었다.

그외 십오명의 부하들이 있었지만 무공 실력은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모두들 열심히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은성이도 한켠에 가서 무공을 수련하였다. 귀선문의 절세 신 법인 '묵귀영' 이었다. 묵귀영은 심해에서 수련하여야만 진정한 법리를 깨우칠 수가 있는 무공이라서 왠지 어 색하고 자연스럽지가 않았지만 고진인과 마교 적발지마와의 대결에서 개안을 하고 깨달음을 얻은 은성이는 어 느정도 흉내는 낼 수가 있었다.

미륵산의 삼대 험지중의 한곳인 천방벽(天防壁)에서는 오늘도 금아와 은성이의 유희가 벌어지고 있었다. 내공 으로 몸을 가볍게 한 후 금아의 등에 올라타고 저공 비행을 하던 은성이는 이제는 고진인의 흉내를 내서 화룡 검 위에 올라탄 후 내공을 돋우어 금아와 함께 공중 비행을 하고 있었다.

고진인은 그의 스승이 입적하면서 모든 내공을 쏟아부어 만들어 준 비천검에 의지하여 날 수 있었지만 은성이 는 화룡검에 태극진기를 주입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신검합일(身劍合一)의 경지에 이르른 것이다. 이처럼 검에 내공을 주입하여 하늘을 나는 것은 고도의 정신력 및 막대한 진력의 소모 때문에 왠만한 고수는 시도하기 조차 어려웠다. 그리고 비록 성공한다고 하여 도 아주 짧은 순간만 가능하고 진력이 소모되어 곧바로 지상으로 추락사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은성이의 태극 진기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 있었다.

하단전에 있는 태극진기 만으로도 충분히 화룡검을 조정하여 공중비행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금아를 따라 계곡과 나무 사이로 곡예를 하다.보면 어느새 태양은 서산 너머로 기울어져 갔다.

해적단의 부하들을 동원하여 초금의가의 불타버린 잔해를 청소한 후 임시로 세운 목조건물 속으로 달빛이 고 요 하게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자시 말쯤 되었는지 한낮에 후끈 달아 올랐던 대지도 더 이상 뜨거운 열기를 발산해 내지는 않고 있었다.

잠을 자고 있던 은성이는 무언지 알 수 없는 느낌에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왠지 끈적끈적하고 불안한 감정 이 느끼어졌다. 귀를 벽쪽에 대고 천리 지청술을 발휘하여 보았는데도 주변에 이상한 징후는 없었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계속해서 그의 심기를 자극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심안을 발휘하자 그제서야 그 무엇인가 가 포착 되었다. 심안을 발휘하면 주변에 있는 모든 대상을 전방위적으로 짧은 시간안에 조사를 할 수가 있었 다. 심지어 심장이 박동하는 미세한 파동음과 작은 곤충들이 기어가는 소리 그리고 물체들의 온도 및 물체마 다 갖는 고유한 파장에 따른 주변 대상의 성상까지도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은성이가 거처하고 있는 건 물의 지붕 위에 호흡과 맥박 소리 조차도 완벽하게 감춘 불청객이 한 명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은성이가 불청객이 누워 있음직한 장소로 시선을 돌린후 태극 진기를 운용하자 그곳이 확대되어 보여졌다.

그 천정 부위에서는 언제 뚫었는지 아주 미세한 구멍이 나 있었다. 지금 그 구멍안으로 머리카락 굵기의 대롱 이 절대 무음을 유지하며 서서히 들이밀어지고 있었다. 불청객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 은성이가 오른손 중지에 태극 진기를 주입한 후 불청객을 가리키자 중지에서 금색이 반짝이는 것 같더니 천장을 향해 폭사 되어졌다.

'읔'

지붕위에서 다급한 비명이 들리어오자 은성이는 잠옷 차림으로 머리맡에 놓아둔 화룡검만을 집어들고 몸을 날 려 방문을 연후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음..."

어느새 불청객이 누워 있었던 지붕위로 올라선 은성이가 짧은 신음을 발했다. 지붕위에는 불청객은 보이지 않 고 핏자국 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지붕위로 올라왔는데 불청객은 부상을 입은 몸 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눈에 태극 진기를 운용하여 사방을 살피자 밤인데도 불구하고 사방이 대 낮처럼 보였다. 바람 한 점 없는 밤중이었는데 십장 너머 서쪽 방면의 풀잎들이 무엇이라도 지나갔는지 가늘 게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휘이익'

은성이의 신형이 지붕에서 꺼지듯이 사라져 버렸다.

은성이가 사라진 직후 용왕과 노룡이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은성이가 사라진 후였다. 은성이 가 사라진 방안에는 은성이의 의복만 곱게 개어져 있었다. 불청객은 혈의를 입고 있었다. 혈의에 혈의 복면을 하고 있는 것이 왜구 인자들의 복장이 연상되어지자 추적하고 있는 은성이의 입술이 앙다물어졌다.

왜구들에 의해 처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난 것이다. 조사지공인 일시 무시일에 이형환위의 신법 게다 가 최근에 귀선문의 절대 보법인 묵귀영까지도 수련하고 있었지만 추적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다.

앞에 가는 혈의 복면인에게 추적이 눈치 채이지 않도록 극도로 은밀하게 몸을 이동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무엇 보다도 혈의인의 신출 귀몰하고 예상밖의 행동에 당황스러운 적이 많았다. 혈의인은 어느새 지혈을 하였는지 더 이상 핏자욱을 남기지 않았고 도망하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인지 바위와 나무줄기 만을 밟으며 이동 하고 있었다.

혈의인이 지나간 자리에는 짓이겨진 풀잎 하나도 그리고 꺾어진 나뭇가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발을 댄 바위와 나무줄기 조차도 특수한 수련을 하였는지 전혀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가면 금 방 갈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멀리 돌아 가기도 하였으며 가끔씩 높은 나뭇 가지나 풀속에 몸을 은신한 채 혹시라도 추적이 있는지 확인한 후 몸을 날리고 있었다.

혈의를 입고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나뭇가지 사이에서는 나무가 되고 풀속에 숨어 있을 때에는 풀잎에 동화되 어 은잠하였다. 추적하고 있는 은성이에게 심안의 능력이 없다면 벌써 발각 되었거나 아니면 놓쳤을 정도로 혈의인의 능력과 심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각(30분) 정도나 온갖 기교를 부리며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혈의인이 도착한 곳은 미륵산 너머 해안가에 세 워져 있는 낡은 사당 앞이었다. 사당은 바다와 접해있는 뒤쪽이 보기만 해도 아찔할 정도의 절벽위에 위태롭 게 지어져 있었다.

심안을 펼치자 사당안에는 방금 도망친 혈의인 외에 두명이 더 있었다. 은성이가 혈의 복면인을 발견 즉시 공 격하지 않고 여기까지 추적해온 것은 이들의 본거지를 찾기 위해서였다. 혈의 복면인의 능력은 동방파의 장로 들에 비견될 정도였는데 만약 이들이 그들의 특기인 은신의 술법을 살려 암습을 하려고 마음먹는다면 이들의 마수를 벗어날 수 있는 무술인이 드물 것 같았다.

묵색 복면과 청색 복면의 인자들의 능력도 대단하지만 이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사당안에서 낮지만 분명하 게 왜놈들의 언어가 들려오자 은성이의 눈빛에 살의가 어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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