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25화 (25/152)
  • ■ 제 25장 :

    혼절해 있던 지룡은 은성이가 침술을 시전하였는데도 혼수 상태 였지만 머리속을 꽉 채운 후 조금씩 압박해 오던 암운이 서서히 거치며 잃었던 정신을 서서히 찾아가고 있었다. 몸이 계속해서 흔들거리는 것을 보면 마 차에 실려 이동하고 있거나 누군가에 의해 들것에 실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흔들리고 있는 몸의 상태로 판단하면 전자이었다. 눈을 감은 채 몸 이곳 저곳에 의식을 집중해 보니 전신에 쑤시고 아프지 않은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신의 기혈은 매우 순조롭게 운행되 고 있었다. 몇 시진 전만 해도 심한 내상으로 몇 군데 중요 경맥이 막혀 운기조식 조차 불가능 하였었던 몸이 었다. 누운 채 호흡을 고르며 지룡은 그토록 심한 내상이 조금씩 호전되어져 가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혼절하기 전 해적단의 상황은 바람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었다. 비록 혼절하면서 용왕 이무기에게 최후의 배 수진 전략으로 귀란총에서 왜구들과 접전하라고 조언하였지만 귀란총이 아니라 그 어떤 장소라도 해적단의 몰 살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 들것에 실린 채 저승으로 가고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귓가에 들려오는 발자욱 소리와 얼굴에 느껴지는 따사로운 햇살의 감촉은 그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제일 좋은 방법이 있었다. 지룡은 아직은 다소 무거운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려 보았다.

    그러자 눈이 시린 햇살이 얼굴만이 아니고 마음 깊숙한 곳까지 따스하게 비추어 주었다.

    살아 있다는 환희와 주변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가슴속에 희열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비록 이겼는지 졌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생과 사의 치열한 격전을 마치고 이처럼 평온한 안식을 갖고 있다는 안도감에 지룡은 깊은 날숨을 내 쉬었다.

    '휴우우'

    뒤에서 지룡의 들 것을 들고 가던 부하 하나가 지룡이 깨어남을 확인하고 반가이 말했다.

    "어... 깨어나셨군요. 용왕님! 지룡님도 깨어 나셨습니다."

    지룡과 마찬가지로 들것에 실려 가고는 있었지만 상태가 지룡 보다는 양호한 듯 비스듬하게 반쯤 일어선 자세 로 앞에 가던 용왕이 반색을 했다.

    "그래! 지룡! 견딜만 하나?"

    용왕도 내상을 입었는지 목소리는 나직하였지만 목소리에는 정이 가득 담겨져 있어 평소 용왕이 지룡을 얼마 나 신뢰하였는지를 여실히 알 수가 있었다.

    "예, 견딜만 합니다..."

    비록 말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깃들여 있지 않을 정도로 기력이 부족하였지만 용왕에게 계속 말을 하려던 지룡 은 난데없는 방해꾼의 등장으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환자분께서는 말을 자제해 주십시오. 생각보다.조금 일찍 깨어나셨는데 지금 몸 상태로 많은 말은 건강에 해 롭습니다. 기력을 아끼고 조식해 주시지요."

    지룡이 깨어난 것을 확인한 은성이가 지룡에게 다가서며 노티가 줄줄 흐르는 어조로 의원 행세를 하였던 것이 다. 지룡은 입안에 작은 알약 하나를 넣어 주며 조언을 하는 은성이를 바라보며 궁금증이 많이 생겼지만 은성 이가 의원인 것을 눈치 채고는 하고 싶은 말들을 애써 자재 하였다. 앞에 있는 어린 의원이 입 속에 넣어 준 녹색 알약은 입안에 들어오자 마자 침에 스르르 녹아 목구멍 안으로 넘어갔다.

    입안 가득히 청아한 향기가 풍겨오고 정신이 맑아오는 것이 보통 알약은 아닌 것 같았다. 이처럼 귀중한 알약 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에게 복용시킨 나이 어린 의원이 고맙기도 하고 정체도 궁금하였지만 그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나이 어린 의원의 조언대로 조식을 해서 기력을 되찾는 일이었다. 지룡의 호흡이 조금씩 길어지고 부드러워지 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고요지정에 잠기어져 가기 시작하였다. 산속에는 따스한 햇살에 모든 만물이 약동하고 있었으며 초금의가로 향하는 작은 소롯길에는 발자욱 소리만이 봄의 정적을 희롱하고 있었다.

    초금의가가 가까워 오자 은성이는 불현 듯 금아가 보고 싶어졌다. 금아와 헤어진지가 엊그제 같은데 못 본지 벌써 삼년도 넘은 것이다. 예전처럼 금아를 부르기 위해 검지와 중지를 입속에 넣은 채 휘슬을 불려고 하던 은성이가 조금 멈칫 하였다.

    주변에 중상자가 세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계룡산에서 천년오공의 음공의 무서움을 익히 체험한 은성 이는 중상자에게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의 태극 진기만을 운용하여 휘슬을 불었다.

    '삐이이익'

    해적단의 부하들은 은성이가 갑자기 하늘을 향해 휘슬을 불자 나이가 어린 은성이가 봄 날씨가 좋아서 치기에 휘슬을 부는 줄 알고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고요한 대기가 장중하고 은은한 휘슬 소리에 나직이 떨고 잠시 지나자 은성이는 하늘높이 두리둥실 떠 있는 하얀 구름더미 너머에서 작은 금색 점을 볼 수 있었다.

    금색점은 순식간에 커지더니 은성이가 있는 방향을 향해 내리 꽂혀져 오고 있었다. 그 내려오는 속도는 밤하 늘의 유성보다도 빠르지만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쿠우우우우'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날카롭게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어 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요란한지 험 난한 겨울 산 정상에서 광풍이 몰아쳐 오는 소리 같았다. 해적단 부하들이 부상자들을 태운 들 것을 급히 땅 에 내려놓고 검과 도를 뽑은 채 사주 경계를 펴는 사이에 하늘에서 내려온 금색 물체가 은성이의 어깨위에 사 뿐히 내려 앉았다.

    '초로롱, 초로롱'

    금아는 은성이가 매우 반가운지 영롱한 목소리로 울며 은성이의 얼굴에 흰 부리를 마구 부벼대고 있었다.

    은성이도 오랜만에 만난 기쁨에 금아의 깃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토록 광폭한 소리를 내던 괴음의 정체가 한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금색 새 한 마리이고 또 그 새가 은성이와 매우 친한 것을 알자 해적단의 부 하들이 허탈해하며 경계를 풀고 들 것을 다시 들었지만 좀전에 등뒤에 맺혔던 식은 땀들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은성아! 은성아!"

    금아는 예전에 은성이에게 간단한 말들을 배웠었는데 아직도 잊어 먹지 않은 것 같았다.

    "반갑다. 은성아."

    하지만 아무리 영물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에 비해 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날 수는 없었다. 짧은 문장과 아는 단 어들의 조합으로써만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아의 듣는 능력은 거의 인간 수준이었다.

    "그래, 금아야! 나도 정말 반갑다. 그동안 금아 매우 많이 보고 싶었다."

    은성이의 목소리는 매우 유쾌하고 또한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해적단 무리들은 금아가 인간처럼 말을 하자 앞으로 걷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아 가 내려오는 소리에 조식을 멈춘 지룡도 중국에 인간처럼 말을 할 수 있는 '구관조'라는 신묘한 새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말을 할 수 있는 새를 직접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구관조라는 새는 단순히 인간의 목소리만을 흉내 낸다고 들었는데 앞에 있는 붉은 눈동자에 금색 깃털 의 새는 인간과 직접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영물임이 분명한 금색 새도 신기하지만 영조(靈鳥)와 매우 친 한 듯 얘기를 나누고 있는 어린 의원의 정체는 더욱 더 궁금하여졌다.

    "은성아 ! 슬프다. 아버지, 죽었다."

    '쿵'

    아니 이 무슨 청천 벽력 같은 소리인가?

    금아를 만난 기쁨에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솟아 오르던 은성이의 기분이 갑자기 만장 지하로 떨어져 내렸다.

    믿고 싶지도 않고 쉬이 믿어지지도 않았지만 금아는 거짓말을 할줄 몰랐다. 순식간에 입술이 창백하게 변한 은성이가 금아를 다그쳤다.

    "뭐, 뭐라고... 금아야! 방금 뭐, 뭐라고 했지?"

    "아버지 죽었다. 슬프다"

    "..."

    초금의가는 저 멀리 보이는 또아리를 틀고 있는 늙은 적송 몇 그루 너머에 있을 것이다. 붉게 충혈되어져 가 는 은성이의 눈에 태극진기가 주입 되어졌다. 우거진 노송 사이로 난 작은 틈새로 초금 의가의 정문이 언뜻 보였다. 그런데 초금의가의 정문에 초금의가(草金醫家) 라고 당당하게 걸리어 있을 현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정문 위의 기와 사이로 잡초가 몇 그루 자라고 있었다. 깔끔한 아버지의 성격상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쌔애액'

    은성이는 이형환위의 신법을 펼쳐 단숨에 늙은 적송위로 올라 가볍게 노송 끝 가지를 찬 후 초금의가의 정문 위로 사뿐히 내려섰다. 은성이가 이형 환위를 펼치자 은성이의 어깨에서 가볍게 날아오른 금아도 거의 동시에 은성이의 어깨위에 도착하였다.

    '이럴 수가...'

    초금의가는 완전히 폐허로 변해 있었다. 그 많던 전각은 모두 불에 소실되어진 듯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다 죽었다. 집사만 살았다"

    은성이의 어깨에서 날아오른 금아가 초금의가에서 제일 외진 곳으로 날아갔다. 은성이는 너무나 허탈하고 망 연자실함에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듯 정문에서 뛰어내린 후 힘없이 터덜터덜 금아간 날아간 방향으로 걸음 을 옮겼다.

    금아가 날아간 곳은 절벽 밑이었다. 초금의가의 서쪽은 절벽을 의지하여 이루어 졌는데 이 절벽은 매우 단단 한 화강암으로 높이가 십장이나 되었다. 그런데 의가에서 관리하는 약재 중에는 항상 서늘한 곳에 보관하여야 만 하는 약재들도 많았다. 이 때문에 조상들은 화강암 절벽을 유명한 석공들을 동원하여 깊숙이 파내어 천연 석굴을 만들고 이곳에 중요한 약재들을 보관하여 놓았었다.

    상빙고(常氷庫)라고 불리우며 중요하고 값비싼 약재들만 보관해 놓는 장소라 비밀리에 관리되고 입구에는 간 단한 기관 장치까지 해 두었었다. 상빙고는 초금의가의 직계 가족과 집사만이 기관 장치를 알고 있었는데 모 르는 사람은 그 앞에 한나절을 세워 두어도 입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입구는 은밀하고 기관 장치는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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