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22화 (22/152)
  • ■ 제 22장 :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이은 비명 소리에 광룡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차가운 얼음에 살갖을 데 인 듯 왼쪽 어깨가 아려 왔지만 뼈까지 베인 것 같지는 않았다. 간발의 차로 저승의 문턱까지 갔다온 것이다.

    "실력이 줄지는 않았군 그래! 자넨 지치지도 않았나?"

    눈앞에 두명의 왜구가 똑같이 이마 정중앙에 작은 비수가 꽂힌 채로 즉사해 있는 것을 발견하자 광룡이 푸념 아닌 푸념을 하였다. 왜구들은 자신들의 죽음이 못내 믿어지지 않는 듯 두눈을 감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그러게 무식하게 기력을 낭비해가며 싸우라고 했나. 아무리 광룡이라고 해도 그렇지. 미친 소 같으니. .. 그 광우병은(狂愚病) 언제나 나으려나...?"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한 삐쩍마른 무사 하나가 천천히 광룡에게 걸어오며 말을 받았다. 눈이 두 개이면 착 시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며 눈알 하나를 도려낸 냉혈한 피의 암기술사가 노룡이었다. 앞에 적이 있으면 적수 가 되든 못되던, 기력이 있던 없던 간에 미친 황소같이 청룡 언월도를 빼어들고 저돌적으로 덤벼드는 사람이 광룡 자신이라면 상황을 냉철하고 철두철미하게 분석해서 필승의 자신이 생겼을 때에만 승부 하고 또 반드시 싸워야만 할 상대라면 벅찬 상대라도 치밀한 사전 준비로 필승의 조건을 만든 후 상대하는 사람은 노룡이었다.

    노룡은 말수가 적었다. 해적단 내에서도 부하들이 노룡에게 평소 농담 한마디 건네지 못할 정도로 노룡은 마 음을 닫아 놓고 살았다. 하지만 광룡만 만나면 유독 말이 많아지는 노룡이었다.

    일년전 '팔방풍우(八方風雨)'라는 암기술을 완성 했을 때에도 가장 먼저 자랑하기 위해 찾은 사람이 광룡이었 고 삼십년전 왜구에게 처참히 살해되고 유린된 그의 가족들에 대한 예기도 오직 광룡에게만 이야기 하였다.

    겁장이처럼 끽 소리도 지르지 못한채 다락방에 숨어 그의 가족들이 왜구들에게 처참히 유린되는 소리만을 벌 벌떨며 듣고 있었다는 한스런 절규 조차도...

    "노룡, 몇 시진 정도 더 버틸 수 있을까?"

    갑자기 나타난 노룡의 존재에 천군 만마라도 얻은 듯 자신감이 붙었는지 애써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며 청룡언 월도의 자루를 잡은채 크게 숨을 들이쉰 광룡이 말했다.

    "글쎄..."

    아직도 기력이 많이 딸리는 듯 청룡 언월도를 얼굴이 하얘지도록 잡아 당기고 있는 광룡을 도와 청룡 언월도 를 쥐어가며 노룡이 말을 흐렸다. 간신히 청룡언월도를 빼어들자 청룡언월도가 뽑혀진 부근의 느티나무 껍질 이 스르르 뱀처럼 내려 않더니 그 속에서 흑색옷을 입은 인자 한명이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이때였다.

    '휘르르륵, 펑'

    새벽 하늘 위로 유성 한 개가 치솟아 오르더니 화려하게 폭발하였다. 불꽃의 색상은 청색이었다.

    "흠, 용왕님이 부르시는군, 미륵산 쪽이네"

    노룡이 광룡의 수많은 상처 부위에 지혈제를 붙여 응급 조치를 취해주며 말을 하였다. 해적단에서는 멀리 떨 어진 해적단 끼리의 연락 방법을 유성추(流星追) 라고 하는 화탄을 이용하고 있었다. 이는 망망한 바다에서 가장 멀리까지 보낼 수 있는 신호 방법이고 또한 여러 가지 정보를 축약해서 보낼수도 있는 신호 방법이었다.

    변산읍내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현시점에서 해적단 무리들에게 모이라는 신호의 화탄의 수는 한 개이었다.

    '두 개는 흩어져서 훗일을 도모하라' 이었다.

    불꽃의 색상이 청색이라면 청색은 오행중 동쪽 방위이고 현재 이곳에서 동쪽이면 미륵산 방향이었다. 지혈을 마친 광룡은 다소 기력이 회복된 듯 보였다. 노룡과 광룡은 천천히 경신술을 펼치며 미륵산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동하는 중에 보여지는 전경은 처참하였다. 선량한 어부들의 가족이 몰살된 집도 있었고 불탄 가옥 도 수십채는 되었다.

    곳곳에 해적단과 왜구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길을 달리던 노룡의 앞으로 늙은 노인 한명 이 뒤척이며 걸어오고 있었다. 노룡과 광룡이 길 가운데로 달려가고 있어서 노인은 이들과 부딪히기라도 할 까봐 길 가장자리로 피하고 있었지만 노룡의 시선은 순간적으로 노인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살피고 있었고 나머지 감각들도 노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암기술의 달인이 되기 위해서는 오감중 시각이 특히 발달되어야만 하고 이를 위해 특별한 수련조차 받는다.

    노룡도 '야안공(夜眼功)' 이라고 밤눈을 단련하기 위하여 한밤중에 잡목이 우거진 숲을 뛰어 다닌적이 있었다.

    바위와 가시덤불 등에 긁히고 할퀴인 상처들이 늘어만 가다가 서서히 줄어들고 더 이상 새로운 상처가 생기지 않을 때까지 이를 악물고 수련 하였다. 조그마한 방을 한 번 일별한 후 밖으로 나와 그 방안에 어떠한 물건이 어떻게 위치돼 있는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수련도 하였다.

    조금 더 숙달되자 한 번 가본 장소에 두 번 가보면 무엇이 어떻게 바뀌어 졌는가를 바로 알 수가 있었다. 이 렇게 야안공을 수련한 노룡의 날카로운 시각으로도 노인의 모습에서 흠 잡을 만한 곳은 전혀 없었다. 하얀 백 발을 상투 튼 채 무명천으로 된 헤진 옷을 입은 구부정한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촌 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노룡의 예리한 감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노인의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새벽에는 대 지가 고요하여 그 어떤 소리라도 크게 들리는 법이다. 노인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둘도 아닌 단 하나의 이유밖에 없었다.

    왜놈들 특유의 나막신 소리를 감추려고 일부러 발걸음에 공력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던 노룡 의 오른손에서 전광석화 같이 흰빛이 번뜩이었다. 노룡이 그 어떠한 예비 동작도 없이 비도술을 펼쳐낸 것이 다. 광룡은 지금까지 한 번도 노룡의 비도가 빗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이 바로 그 예외의 날인 것 같았다. 어디에 도를 숨겼었는지 노인의 손에는 긴 장도가 하나 들려 있었다. 그리고 채 뽑혀지지 않은 장 도의 손잡이 부분에는 노룡의 비검이 박혀 있었다.

    노인의 도 손잡이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노인의 오른손이 비도에 꽂힌채로 손잡이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노인의 이마에도 희미한 새벽 달빛에 반사되어 하얀 빛을 발하는 비도 하나가 깊숙이 꽂혀 있었다.

    "놀랍군!"

    노룡의 비도술은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몇배는 뛰어났던 것이다. 흰빛이 한 번 번뜩이는 것만 보았는데 어 느새 두 개의 비도를 날린 것이다.

    "쳇, 오늘 밑천이 완전히 거덜나는군."

    노룡은 그동안 숨기고 있던 비장의 실력들이 낱낱이 들어나게 되었지만 자신과 광룡의 안위가 달린 일이라 아 깝지는 않은 듯 말을 하였다. 광룡이 보기에 노룡은 방금전의 수법인'일비진천(一匕振天)' 초식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수련할때에도 가장 많은 시간을 소요하였고 결전 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초식도 바로 일비진천 이었다. 일년전 '팔방풍우'라는 암기술을 완성하였지만 실전에서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평범한 '일비진천'이 이토록 무서운 초식일 줄이야...

    미륵산 쪽으로 달려가자 해적단의 동료들이 하나 둘 눈에 보이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차한잔 마실 시간을 더 달리자 드디어 눈앞에 용왕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목전의 상황은 노룡과 광룡에게 조금의 쉴틈도 주지 않고 있었다. 지룡은 상처를 당한 듯 큰 바위 옆에 몸을 기대어 있고 역시나 상처투성이인 폭룡과 용왕 이무기가 십여명의 부하와 함께 이십여명의 왜구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주변은 처참지경 이었다. 죽은 시신들과 죽어가는 환자들이 여기 저기에 널브러져 있고 핏물이 고여 웅덩이를 이루고 있으며 신음소리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해적단과 대치하고 있는 왜구들은 각양각색 이었다. 긴 장도 를 든 일도류를 익힌 왜구들과 장도와 단도를 각각 한손에 거머쥔 이도류를 익힌 왜구들 거기에 도를 들지 않 은 덩치가 좋은 왜구들도 있었다. 왜국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유술을 전문적으로 익힌 부류였다.

    하지만 새벽의 미명을 받으며 깨어나고 있는 마지막 밤의 나락속에서 그 끝을 부여잡고 죽음의 도를 숨기고 있는 밤의 인자들이 숨어 있다는 것은 여기 모인 해적단 모두가 너무나 절실히 알고 있었다.

    노룡의 손에서 다시 한 번 경세무적의 일비 진천이 발휘 되었다. 연달아 세 번을 발휘한 듯 허공중에 희미하 게 흰빛이 세 번 반짝이더니 이윽고 세송이의 혈화를 피워 올렸다. 순간적으로 왜구 세명이 죽자 해적단과 왜 구들이 긴장감이 흐트러지고 이때를 노려 노룡과 광룡이 용왕에게로 몸을 날렸다.

    삼장 정도만 더 가면 용왕과 이대 천왕과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왜구들에게도 절세의 인자들이 있었다. 노룡을 가운데에 두고 사방에서 암기들의 세례가 퍼부어졌다. 그동안 땅속이나 바위속에 은둔해 있던 인자들 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지도 않은 듯 모습을 드러낸후 노룡에게 집중 공격을 퍼부은 것이다.

    '따닥, 따다땅땅'

    신형을 틀고 손목에 부착한 금갑으로 암기들을 최대한 방어하고 뒤따르던 광룡이 자신의 안위에는 상관조차 않은채 청룡 언월도를 휘둘러 암기들을 방어하였지만 한손이 열 개의 손을 당할 수는 없는가 보았다.

    '읔, 크으윽...'

    한 번에 서내개의 암기가 몸에 꽂힌 노룡이 땅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노룡!"

    뒤따르던 광룡이 마악 땅에 떨어지려는 노룡을 간신히 받아 들고 용왕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합류 하였다.

    "후퇴하라!"

    근심하던 노룡과 광룡이 그나마 살아 있음을 확인한 용왕 이무기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고는 쓰러져 있는 지 룡을 한손에 안고 현장을 탈출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를 노룡을 안은 광룡과 폭룡이 십여명의 남은 해적단과 함께 따르기 시작하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해적단의 도주에 왜구들이 일사 분란하게 막아내지 못하고 있는 틈을 타서 미륵산 쪽에서 용왕 이무기를 막고 있던 왜구 세명이 용왕 이무기의 '태산압정'이란 초식에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용왕과 사대 천왕 그리고 십여명의 부하에다가 다시 몇 명이 합류하여 이십여명은 숲이 우거진 미륵산 쪽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그 뒤를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오십여명의 왜구들과 인자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왜구들은 그동안 숱하게 당해온 해적단의 무리들을 소탕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았다. 숲으로 도망치는 적들은 역습의 우려가 있으므로 쫒지 않는다는 불문율은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노룡을 품에 안 고 뛰어가는 광룡은 그래도 노룡이 치명적인 요혈만을 피해서 암기에 맞았다는 것을 알고는 일단 한시름을 놓 을 수가 있었다. 왼팔과 오른쪽 허벅지에 맞은 암기는 위험하지 않았지만 왼쪽 가슴에 맞은 암기는 정말로 치 명적이었다.

    왼쪽으로 한치만 더 이동하였다면 심장이 꿰뚫리고 노룡은 즉사 하였으리라. 달리는 와중에 급하게 혈을 눌러 일단 지혈을 시켜 주었지만 빨리 안정을 시켜 주는 것이 시급하였다. 용왕 이무기의 품에 안겨 있는 지룡의 눈이 힘겹게 띄여졌다.

    "귀, 귀란..."

    지룡은 즉시 상황 판단을 한 듯 입을 달싹거리고는 다시금 혼절하였지만 용왕은 지룡이 무슨 말을 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귀란총(龜卵塚)으로 간다"

    귀란총은 특이한 지형이었다.

    바로 위쪽으로는 적림곡이라고 하여 적송림이 우거져 있고 좌우로는 단풍나무와 활엽수림이 무성하였지만 직 경 백장 남짓한 이곳 귀란총은 풀한포기 나무 한그루 자라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큰 바위 하나 없고 오로지 희고 둥글며 자잘한 돌맹이만이 무수하게 널려있는 것이 거북이의 알들의 무덤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해적단 무리가 귀란총에 도착한 후 일각쯤 지나자 육십여명의 왜구와 인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더 이상 해적단의 도주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해적단을 넓게 포위한후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왜구들중 눈에 띄는 존재들이 있었다.

    인자의 복장을 하였는데 녹색 복면을 한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해적단과의 결전에 무관심 한 듯 기분 나쁘게 한쪽에 서서 추이를 방관하고 있었다. 이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살기 또한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진정으로 해적단에게 살의가 없는 것인지...

    지룡과 노룡을 중앙에 두고 빙 둘러싼 해적단의 수는 채 이십여명도 안 되었다. 도주하는 도중에 두명이 인자 들이 날린 암기에 죽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문다고 하였던가?

    이들의 눈은 하나같이 광염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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