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1장 : 왜 구
'부안 변산'
변산은 미륵산에서 북서쪽으로 오십리 정도 떨어진 쪽빛 바다를 끼고 있는 어산물이 풍부하고 인심이 좋은 고 을 이었다. 해안선이 들쑥 날쑥하여 매우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고 바닷속에는 암초가 많았으며 부근에 작은 섬도 많아 옛부터 해적들의 본거지로 이용되고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지역 주민들에게 해적들은 친구이자 안전을 지켜주는 바다의 수호신들 이었다. 왜구들의 노략질이 워낙 방대한 규모로 악질적으로 자행되고 있어서 이곳 변산을 제외한 바닷가의 다른 고을들은 거의가 폐허로 변해 있었다. 아니 바닷가 뿐만이 아니었다. 바닷가에 노략질을 할 고을들이 폐허로 변하자 왜구들은 점점 더 육지 깊숙이로 쳐들어가 약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 변산만은 아직껏 이렇다할 왜구들의 피해가 없었는 데 모두다 해적들의 공로였다. 해적들의 두목은 용왕 이무기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사천왕이라 자칭하며 이무기가 가장 신뢰하고 있는 부 두목들로 지룡, 폭룡, 광룡, 노룡이 있었다.
'젠장'
헐렁한 옷을 입고 긴 장도를 든 왜구 한명의 옆구리를 깊숙하게 갈라 놓는 순간 느닷없이 벽속에서 튀어나온 도신이 벌써 코 앞에 육박해 있자 광룡의 입에서 버릇처럼 곱지 않은 소리가 튀어 나왔다. 간신히 삼재보를 펼쳐 적의 기습을 와해시키는 순간 왼쪽 허벅지 부위가 벌에 쏘인 듯 따끔거리는 것이 또 한번 칼침을 맞은 것 같았다.
'죽어라!'
반바퀴 회전하면서 양 다리를 쫙 펴서 사타구니가 땅에 거의 닿을 듯이 자세를 낮춘 후 오른손에 든 청룡 언 월도를 땅속에서 하늘 끝까지 휘두르며 광룡은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벽속에서 튀어나온 왜구의 몸이 비스듬 하게 양분되어 떨어진 땅 위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죽은 왜구의 몸에서 흘러 나오고 있는 피는 청룡언월도가 파고 들었던 땅속에서 흘러 나오고 있는 피와 합쳐 져 땅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내력이 고갈된 듯 시력마저 조금 침침해진 것 같았지만 광룡은 몸을 일 으키며 왠지 무거워 보이는 청룡언월도를 든 팔에 힘을 줄 수 밖에 없었다.
주변에 승냥이마냥 그의 피를 원하는 왜구들의 잔인한 눈초리가 더욱 더 많아졌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호흡을 조절하며 느리게 나아가던 광룡이 느티나무 앞에서 멈추어졌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풍어를 기대하고 고기잡이 선박들의 안전을 기원하며 용왕에게 굿을 하는 신령스러운 나무였다.
굿을 한 후 나무에 묽어 놓은 붉은 천이 새벽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느티나무에 몸을 기대려던 광풍이 흠 칫하더니 앞으로 한발 나아가며 신형을 백팔십도 회전하였다. 회전하던 힘까지 더해진 청룡언월도가 흰 빛을 발하며 방금 기대려고 하던 느티나무에 박혀 들어갔다. 청룡 언월도가 파고든 부위에서는 나무가 피를 흘리듯 붉은 피가 스며져 나오고 있었다.
이때였다. 느티나무 위에서 두 개의 왜도가 쏘아져 내려왔다. 쏘아져 내려오는 왜도들의 기세는 지금까지 상 대하던 왜도들의 기세에 비하여 두 배는 빠른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내력을 집중하여 느티나무에 박힌 청룡 언월도를 뽑으려던 광룡의 안색이 하얗게 변화되었다. 기력이 너무나 많이 소모된 데에다 방금전 느티나무속 에 은둔중인 왜구를 처치하기 위해 그나마 간직하고 있던 대부분의 기력을 소모한 것이다.
기력을 집중하여도 청룡언월도는 끄떡하지 않는 것이 신령스러운 나무에 칼질을 한 대가를 받는 것 같았다.
내려오는 왜도들은 온전한 몸상태로 청룡언월도가 손에 있어도 막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웠다. 청룡 언월도를 놓고 몸을 피한다고 하여도 온전히 몸을 피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몸은 더 이 상 결전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시선을 그동안 40평생을 함께한 청룡 언월도에 둔채 모든 것을 포기하자 이상 하게도 마음이 평온하여졌다. 두눈을 감자 해적단의 두목인 용왕 이무기와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인 노룡의 모 습이 떠올랐다.
왜구들이 거선 이십여척을 앞세우고 불시에 변산 앞 바다로 습격해온 것은 어제 저녁 자시 무렵이었다. 왜구 들은 그동안 수 차례 당한 분풀이를 한꺼번에 하려는 듯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여 해적단의 본거지인 흑산도를 야습한 것이다. 치열한 격전 끝에 흑산도에 머물러 있던 중, 소형 선박 여덣척 중에서 무사히 흑산도를 벗어 난 것은 3척밖에 되지 않았다.
다행히 해적단의 두목인 용왕 이무기와 사천왕이 탄 거선 '용왕호'가 격침되지 않고 간신히 흑산도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흑산도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전투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집요하게 추적하는 적의 공격에 간신히 변산에 도착한 일행을 뒤따르는 왜선에서는 해적단보다 세배는 많은 인원이 쏟아져 나왔다. 해적단은 지형지물에 익숙한 변산 해안가의 기암 괴석과 천연 동굴을 이용하여 왜구들 과 대항하였지만 중과 부적이었다. 왜구들의 무공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왜구들 무리에서는 지형지물에 은둔한 후 살수를 펼치는 '인자'라고 하는 살수들이 많이 있었다. 해적단의 동료나 부하들이 대부분 이들 은자들에게 죽 음을 당하였다. 전투는 갈수록 치열하여 졌고 작전상 후퇴를 거듭하던 해적단은 마침내 변산읍내까지 밀려 나 와야 했다. 전투가 계속 될 수록 쫒고 쫒기는 공방전이 지속되고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아군은 물론 적군까지 도 얼마나 남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간간이 도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어둠속에 은닉해 있던 왜구 인자들이 자신을 향해의 도신을 번 뜩이는 것만이 전투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는 세시진 동안 지속된 지긋지긋한 전투에서 몸을 빼 쉴 수 있게 되겠구나 생각하는 광룡의 입가에 자조의 미소가 띄어졌다. 하지만 수명(壽命)은 천명(天命)이라서 인간이 마음대로 좌지 우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보았다.
'피핑'
"광룡! 조심해!"
'윽... 쿠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