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20화 (20/152)

■ 제 20장 :

이때였다. 근처 숲속에서 한명이 걸어 나오며 노인의 말을 받았다.

"천마행보를 펼치는 것을 보니 마교의 인물이구나."

숲속에서 나오는 노인은 오른손에 불타는 듯한 화광을 뿜어내는 검이 들리어 있었다.

"고진인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숲에서 나온 인물이 고진인임을 알아 본 은성이가 아는 체를 했다.

"그래, 동방파의 이은성이라는 제자구나 . 혼자 왔느냐?"

검시봉에서 반짝이는 금광을 보고 이곳에 도착한 고진인은 왠 붉은 머리털을 가진 노인이 신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검은 나타나려면 이틀이나 남았건만 벌써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타인 의 수중에 있었다. 숲속에서 무슨 일인지 상황판단을 하던 고진인은 계속해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일전에 본적이 있는 동방파의 어린 제자의 무공이 동방파 장로들 보다도 몇 배나 높은 것이다. 놀라움은 앞에 있는 붉은 머리털을 가진 노인이 동방파의 어린 제자를 공격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분명 노인이 시전하고 있는 보법은 '천마행보'였다. 이십년전 고진인도 중원의 정마대전에 참석 하였었다. 그 때 마교의 천마행보에 셀수도 없는 정영들이 이슬처럼 사라져 갔었다. 다행히 천마행보는 마교의 십대 장로와 그외 몇 명만이 익히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진인 자신도 이십년전 뼈를 묻었으리라.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마교 노 인의 공력은 자신보다 몇배나 높아 보였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묵귀영이 있고 화룡검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한 맺힌 제자의 원한이 있었다. 동방파의 어린 제자가 위험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차피 자신이 앞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동방파의 제자가 백운검 등 동방파의 장로들과 함께 오지 않은 것이 궁금한 것은 아니였지만 눈 앞에 절대로 방심할 수 없는 강적을 놔두고 정신을 분산할 수는 없었다.

그냥 빈말로 물어본 것이다.

"예, 저 혼자서 왔습니다."

동방파의 제자는 의술이 대단한 경지에 이르른 것 같았다. 조금전 다친 것으로 보였는데 벌써 치료한 듯 피도 멈추었고 목소리에는 내기가 충만해 있었다.

"천마행보를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천마행보의 무서움도 알고 있겠구나?"

적발지마는 갑자기 나타난 고진인의 오른손에 들린 화룡검을 보고 벌써 고진인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삼 년전에 하늘을 날며 마검과 대결할 때 느꼈던 기운이 불시에 나타난 자의 손에 들린 검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그때도 대단한 자라고 생각하였었고 오늘 기세를 보니 역시나 만만한 자는 아니라고 생각이 되었지만 그래도 적발지마는 자신의 무공을 자신하고 있었다.

"물론, 하지만 오늘 내가 그 천마행보를 깨뜨려 주겠다."

나지막한 고진인의 목소리에는 비장함이 실려 있었다. 나지막하던 고진인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조금씩 커졌고 화룡검의 화광도 더욱 짙어만 갔다.

"그래! 맹룡과강(猛龍過江) 이라고 어디 그 잘난 실력좀 볼까?"

적발지마도 음산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며 마검에 묵광을 배가 시켰다. 적발지마는 방금 천마행보를 펼쳤는데 도 내력 손실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마교에서 천마행보는 선택된 몇 명만의 무공이었다.

그 이유는 천마행보는 내공이 절정의 경지에 이른 고수만이 시전 가능하고 또 시전시 엄청난 내력 손실을 가 져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교에서도 천마행보를 전수해 줄때에 이 무공은 필승의 자신이 있을 때에만 펼치 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 있는 마교의 노인은 천마행보를 펼치고도 기력이 저하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 다. 어쨋든 그것에 연연하여 대결을 미룰 고진인이 아니었다.

즉시 묵귀영 신법을 펼쳐 노인에게로 달려 들었다. 고진인의 화룡검에서는 화광이 충천하고 있었는데 마치 한 마리 불새 같았다. 노인도 즉시 대응하였다. 또다시 노인의 모습이 흐릿해 지더니 노인의 신형이 불어나기 시 작하였다.

고진인이 노인과 부딪힐 때에는 벌써 열 여섯명의 노인이 고진인을 공격하고 있었다. 은성이는 고진인이 위험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노인이 열 여섯명의 신형을 완성하기 전에 노인을 공격하면 조금 가망성이 있 겠지만 일단 열 여섯명의 신형이 완성 된다면 노인의 실체를 발견할 수 없는 한 노인을 이길 수가 없을 것 같 았다.

하지만 상황은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고진인의 모습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가끔씩 잔영만이 흐릿하게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오로지 화룡검만이 고진인의 이동 경로를 예측할 수 있게 하고 있었다.

화룡검은 정말로 한 마리 용과 같았다. 어찌나 빠르고 신출 귀몰하게 움직이는지 열 여섯명의 마교의 노인들 이 허둥지둥할 정도였다.

'삭'

화룡검에 절단된 마교의 노인들중 한명의 신형이 허공중에 사라져 버렸다.

'삭, 삭'

일각후가 되자 장내에는 고진인과 일곱명의 마교 노인만 남아 있었다. 그처럼 가공할 '천마행보'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것이다. 고진인의 모습은 시종일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내력 소모가 커서인지 잔영이 눈에 보이고 있었다. 노인들의 검법이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열여섯명의 노인에서 일곱명까지 줄던 중 계속해서 기기 묘묘한 공격을 가하던 노인들의 검이 칠성 검진의 형 세를 이루면서 고진인을 핍박하고 있었다. 이제는 고진인의 잔영이 눈에 보이자 처음같이 허둥대지도 않았다.

모든 도주로를 차단한후 진세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마검과 직접 검을 맞부딪힐 수밖에 없는 형세를 만들 었다.

하지만 일곱 개의 검중에 여섯 개의 검은 실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이 아니었다. 허상뒤에 실상이 머물고 실상의 검기로 허상을 만들기 때문에 허실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고 허상이 실상으로 변화 되기도 하는 것이 '천마행보'와 함께 펼쳐지는 검로의 특징이지만 분명한 것은 노인의 몸도 하나이고 신검도 하나인 것이다.

두 명의 허상을 더 없애면서 두 번 허상인 신검을 벤 후에 갑자기 오른쪽 지면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신검을 방어하기 위해서 고진인은 화룡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화룡검과 신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고진인은 무언가 잘 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 천마 행보와 대결할 때 절세의 보법인 '묵귀영'을 시전하면서 신검과의 직접적인 부딪힘은 한번도 없었다. 나중에 두 번 허상인 신검과 직접 맞부딪힌 적은 있지만 허상이라서 그런 지 충격의 여파는 매우 미미 하였다.

자신은 벌써 기력이 딸리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분발하면 마교의 미친 노인네를 제압하고 신검을 없애 제자의 원혼을 갚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화룡검에 부딪혀 오는 신검에 실려있는 내력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삼년전 신검은 화룡 검에 부딪히는 것을 극구 피했으며 화룡검에 부딪힌 후에는 기력을 잃고 땅에 떨어지기까지 하였다.

물론 지금은 마교의 노인이 직접 신검에 마기처럼 느껴지는 묵기를 넣어 주고 있었지만 신검에게서 쏟아져 나 오는 내력은 예측을 뛰어넘어 상상 이상이었다. 자신의 화룡검은 중검의 검리까지 실리어 있는데...

신검과 부딪힌 화룡검이 손아귀에서 떨어져 뒤쪽으로 날아가고 가슴에 둔탁한 충격이 가해진 후 몸에서 모든 힘이 급격히 사라지면서 무릎이 굽혀지는 순간에도 고진인은 이를 믿을 수가 없었다.

한편 은성이는 고진인과 노인의 대결이 길어지자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비록 고진인이 마교 노인의 허상을 부수고는 있었지만 신법이 허상조차 안 보일정도로 빠르던 처음과는 달리 고진인이 눈에 보이도록 느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진인이 위험해지면 언제라도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던 은성이는 신검과 화룡검이 맞부딪히 는 소리가 들리자 이형환위 신법을 펼치며 대결장으로 몸을 날렸다.

공교롭게도 신검과 부딪힌 후 고진인의 손을 벗어난 화룡검이 이형환위를 펼치는 은성이의 가슴 앞으로 날아 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사상 금나술을 펼쳐 화룡검의 손잡이를 잡고는 고진인을 구하기 위해 마교의 노인들 을 향해 화룡검을 휘둘렀다. 극도로 긴장하고 있어서인지 휘두르는 화룡검에는 중단전에 최후의 보류로 남아 장기를 보호하고 있던 태극 진기까지도 모두 운용하여 불어넣어 졌다.

동방파에서 태극 진기를 오행진기의 각각으로 변화 시키며 사신권법을 익히던 습관 때문이었는가?

화룡검에 주입된 태극 진기는 모두 오행 진기중 진화기로 변화되어 졌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고진인 이 한자 길이의 화광을 운용하여 휘두르던 화룡검에서 갑자기 삼장이나 되는 붉은 검강이 뻗쳐 나온 것이다.

은성이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는 은성이의 진화기가 화룡검의 화룡 내단에 증폭되면서 발생된 현상이었다. 은 성이의 신형도 이형환위 신법에 의해 고진인과 오명의 마교 노인들의 대결장에 거의 당도해 가고 있었지만 붉 은 검강은 벌써 대결장을 휩쓸고 있었다.

너무나 허망할 정도로 마교 노인 오명의 육신이 절단 되어져 버렸고 그중 한명의 육신에서는 선연한 피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네명의 허상은 사라져 버렸고 허리 아래를 깨끗이 잘리운 마교의 노인네 만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공중으로 피를 쏟으며 팔딱팔딱 뛰는 자신의 하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룡검의 놀라운 위력에 마교의 노인을 처치한 은성이도 넋이 빠진 것 같았다. 하지만 급히 정신을 차리고 땅 바닥에 쓰러진 덕분에 무사한 고진인을 부축해 안았다. 고진인의 상태는 회생이 전혀 불가능해 보였다.

신검과의 충격으로 내부 장기가 모두 녹아 버린 것이다. 아마도 신검에 어리고 있는 묵광 때문이리라.

"고진인님...,흑 흑 흑"

비록 악당이고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마교의 노인이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충격은 매우 큰 것이다. 하지만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자신을 구해 주고 고진인이 죽어가고 있는 슬픔에 견줄 수는 없었다. 죽어가는 고진인을 살릴 방도가 전혀 없자 주체할수 없는 눈물이 마구 흘러 나왔다.

"엉 엉 엉"

조금씩 흐느끼던 울음이 계속 커져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은성이는 고진인의 손끝이 조금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급히 등뒤에 한손을 대고 태극진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잠시 후에 고진인의 눈꺼풀이 힘겹 게 뜨여졌다. 눈앞에 은성이가 보이자 고진인은 고개를 돌린 후 마교의 노인이 허리가 동간난 채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안도를 하였다.

"이은성 이라고 했지?"

고진인의 목소리는 진기가 하나도 없어서 매우 낮았지만 창백하던 얼굴에는 조금 혈색이 돌아왔다.

"예, 고진인님."

고진인에게 진기를 불어넣으려고 멈추었던 울음이 다시금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고진인의 얼굴에 돌아온 혈색이 '회광반조'임을 알아본 것이다.

"화룡검과 이것을 부탁한다."

하면서 고진인은 힘겹게 가슴안에서 책자 한권을 꺼내었다.

"이제 귀선문은 해동에서 영원히 사라졌구나..."

힘겨우면서도 허탈한 음성이었다. 말대꾸를 하면 고진인의 유언 내용이 짧아질 것이라고 판단한 은성이는 되 도록 말을 아꼈다.

"고진인님, 부탁하실 일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반드시 들어드리겠습니다."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고진인 이었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여한을 남기고 가도록 할 수는 없었다.

고진인은 은성이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화룡검과 비급을 옳바른 일에 사용하도록 하고 혹 다시 천마행보와 마주칠 일이 있으면 싸우기 전에 반드시 비급속의 묵귀영 신법을 익히거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 시신은 저위에 보이는 내 제자의 옆에 나란히 묻어 주기 바란다."

"흑 알겠습니다. 흑 흑 "

"마지막으로 내 제자의 원혼을 위로해 주고 싶구나. 저 앞에 있는 신검을 화룡검으로 파쇄해 주기..."

고진인의 한쪽 손이 저만치 앞에 떨어져 있는 신검을 힘겹게 가리키다가 갑자기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운명 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엉 엉 엉"

은성이는 고진인을 품에 안고서 방성 대곡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때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은성이에 게서 허리를 잘리운 적발지마는 마교의 장로로서 혼마각을 드나들던 시절 한가지 무서운 사술을 익힐 수 있었 다.

'천마 해체 대법'

목만 떨어지지 않고 한 가닥 생기만 보존할 수 있으면 몸을 되살릴 수 있는 사술이었다. 심지어 죽음의 순간 에는 지닌 내기의 일부와 영혼까지도 사물에 전이시킬 수가 있는 극단의 사술이었다. 허리를 잘리운 후 대책 없이 빠져 나가는 진기를 수습하여 삼성 정도의 내기를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화룡검에 잘린 부위로는 화독이 침투 하여 일각 이상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어짜피 몸을 되살릴 수 없다면 혼이라도 건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은성이가 고진인의 시체를 끌어안고 목 놓아 울고 있을 때 이미 죽음의 술법을 완성한 적발지마의 영혼은 남은 삼성의 내기중 일성의 내기를 동반한 채 마검에게로 스며 들어갔다.

그리고 죽을 힘을 다하여 신검을 조정하여 마교가 위치된 중원 방향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등 뒤쪽에서 난데 없이 들려 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은성이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마교의 노인이 죽은 후 조정하는 사람이 없자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신검이 저만치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손을 쓰기에는 너무나 늦게 발견하였다. 죽은 고진인의 마지막 부탁을 지금 들어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고진인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저 신검만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파쇄하겠습니다."

청의의 도포 자락을 들어 눈물을 훔친 은성이가 화룡검과 고진인의 시체를 안고 고진인의 유일한 제자인 김선 경의 봉분 옆의 땅을 화룡검으로 파기 시작하였다. 은성이도 예전에 고진인이 제자의 묻힐 땅을 파 듯이 전혀 진기를 사용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땅을 파들어 갔다.

땅속으로는 눈물 방울이 쉴새없이 빠져 들어 가고 있었다...

봇짐속에 화룡검을 넣은채 은성이는 서산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서산을 벗어나고 있는 사람은 은성이가 유일하였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서산으로 발걸음을 향하고 있었다. 내일 저녁이면 신검이 다시 출현하고 그때는 반드시 신검을 사로잡아 자신과 사문의 위명을 높일 것이라는 포부와 함께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