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8화 (18/152)

■ 제 18장 :

신검을 둘러싼 묵빛 검광이 짙어지면서 대지가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급작스러운 변화에 신검을 향해 다가서던 은성이는 발길을 멈추었다. 계절이 봄인데도 불구하고 차고 음냉한 기운이 신검 주변으로 퍼져 나왔 으며 신검에서 흘러 나오는 묵빛 기운이 신검이 위치한 땅속에서도 스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쿠르릉...쿠쿵'

지진이라도 일어날 듯 마구 흔들리던 대지 속에서 이윽고 신검을 감싸고 있던 것과 같은 묵빛 기운이 땅가죽 을 뚫고서 솟아 나왔다. 땅속에서 솟아나온 묵빛 기운은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시켜가며 신검의 기운과 합일 되어졌다.

묵빛 기운은 신검을 중심으로 10여장이나 치솟더니 다시금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묵빛 기운이 서서히 줄어들면서 그 안에서 어떤 형상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묵빛 기운이 너무나 시커멓기 때문에 처음에는 시커먼 기운밖에 볼 수 없었지만 기운이 조금씩 줄어들자 은성이는 그 안에 있는 미지의 존재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머리카락이 피처럼 붉은 노인이 신검을 가슴에 안은 채로 서 있었다. 아직도 노인의 주변은 묵빛 기운에 요동 치고 있었지만 노인의 붉은 머리카락은 햇빛을 전혀 받지 않은 듯 창백하며 흰 얼굴을 가진 노인의 감정이 없 는 듯한 표정 만큼이나 흔들림이 없었다.

"황당하군! 나의 신공을 방해한 놈이 이처럼 어린 놈이라니..."

노인의 음산한 목소리가 저음으로 조용히 울려 나왔다. 하지만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인데도 불구하고 그 목소 리에는 살기가 진득하니 베어 있었다.

"노인장! 노인장이 땅속에서 신검을 조종하였습니까?"

공손하고 예절이 바른 은성이었지만 처음 대면한 첫 인상과 상대방의 말투에서 이미 존장으로 대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판단한 은성이의 말투도 극존칭은 아니었다.

"일찍 죽기에는 억울한 나이지만 어린 놈, 너는 여기서 뼈를 묻어야 겠다."

노인은 감정을 억제하고는 있었지만 매우 분한 듯한 어투였다. 은성이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이 살기에 휩싸 여 돌고 있었다.

"아니, 노인장! 내가 노인장에게 무슨 죄라도 지었습니까? 왜 처음 보는 사람을 죽이니 살리니 합니까?"

앞에 있는 노인의 험한 말투에 은성이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죽일 놈"

짤막한 말이 끝나자 마자 노인의 수중에 있던 신검에게서 검은 묵광이 한자나 피워 올랐다. 그리고 은성이가 신검에서 묵광이 피워 오르는구나 느끼는 순간 신검이 노인의 손에서 떠나 은성이에게로 빗살처럼 날아왔다.

곱지 않은 언사에 진작부터 태극 진기를 운용하고 있던 은성이였지만 신검의 속도는 예상 이상이었다.

일시무시일을 펼칠 생각조차 못한체 본능적으로 뒤로 허리를 굽힌 덕분에 가까스로 신검을 피할 수 있었지만 상체를 스쳐간 신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묵광이 태극진기로 보호한 은성이의 가슴을 얼얼하도록 만들었다.

묵광에 둘러싸인 신검의 위력은 백광에 둘러싸였을 때와 비교하여 몇 배의 위력이 있었다. 비단 그 빠르기와 검광의 위력만 높아진 것이 아니었다. 신검은 그 변화 무쌍함도 몇 배나 절묘해 진 것 같았다. 청은검으로 가 슴을 보호한 채 허리를 뒤로 굽혀 뒤 쪽으로 날아가는 신검을 바라보던 은성이의 눈빛에 다급함이 어리어졌다.

뒤로 스쳐간 신검이 다시 자신을 향하여 방향을 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방향을 선회하는 속도 또한 빠르기 이 를데 없었다. 뒤로 몸을 굽힌 상태에서 반바퀴 몸을 돌린 은성이는 노인과 신검의 측면으로 다급히 이형환위 를 시전하였다. 태극진기가 극도로 발휘되어서인지 은성이의 이형환위신법은 동방파에서 가장 성취가 높다는 김장로 보다도 훨씬 빠르고 예측하기 어려웠다.

이형환위를 펼치면서도 은성이의 시선은 한시도 신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으며 또한 그 와중에서도 감각을 집 중하여 노인의 행동과 주변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간과해서는 안될 주요 변수였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실수 하나가 생명과 직결될 수도 있었다.

노인은 현재 신검의 조종에 의식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이형환위를 펼치는 은성이의 손에 들린 청은 검에 금광이 어리는가 싶더니 한자 두께로 커졌다.

청은검은 어느새 방향을 선회하여 은성이의 뒤쪽으로 날아오고 있는 신검에게로 날아갔다. 검강이 펼쳐진 청 은검은 이기어검으로 조정되어 묵광에 둘러싸인 신검에게로 곧바로 나아갔다. 묵빛 검광에 둘러싸인 신검도 날카로움을 자신하고 있는 듯 검강에 둘러싸인 청은검을 피하지 않고 부딪혀 왔다. 청은검에 신검이 부딪혀 오자 양검이 부딪히기도 전에 대지가 비명을 지르더니 마침내 산이 부서지는 듯한 고음이 울려 퍼졌다.

'고오오오오... 위이잉, 꽈과꽝...'

검정색 낡은 도복을 입은 고진인은 서산에 거의 도착하고 있었다. 3년전 자신의 유일한 제자를 신검에게 잃은 이후로 신검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고진인 이었다. 3년전에는 신검을 제압하고자 하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동안 신검을 파쇄하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신검은 화룡검에 극성이었다. 화룡검을 이용하여 신검을 일합에 부숴뜨려 버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지난 3년동안 고진인은 귀선문의 비기이며 대성하면 펼치는 순간 인간의 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하다는 '묵귀영(墨 鬼影) '이라는 신법을 새로 익히고 그 동안 깨우침이 적었던 중검(重劍)의 검리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수련하였다.

묵귀영(墨鬼影) 수련은 고통과 인내만을 필요로 하였다. 오랜 전통의 귀선문에서도 묵귀영 신법은 제자에게 비급만 전해주고 있을뿐 실제로 수련시키지는 않고 있었다. 자신의 사부가 그랬으며 자신도 그랬었고 이미 저 승으로 건너간 제자에게도 전수되지 않은 신법이었다. 가장 큰 이유로 묵귀영은 수련 방법이 매우 특이하고 익히는 도중 생명을 잃기가 쉬웠으며 일상적으로 배울 수가 없는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묵귀영의 수련은 심해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게다가 수련이 깊어질수록 더욱 더 깊은 바다 속으로 수련 장소를 바꾸어 주어야 했다. 바다속 깊은 수압을 견디며 묵귀영의 초식을 익혀 내기 위하여는 넘 어야 할 난관이 너무 많고 순간순간 죽음의 고통이 뒤따랐다.

거기에 수련이 진척되면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심해 깊은 장소에서 신법을 수련하여야만 했다. 수압도 수압이 지만 한류와 난류가 만나며 천번지복하는 듯한 심해의 난측(難測)한 변화를 이겨내며 신법을 수련하기는 극도 의 인내력이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바다속에서는 가끔씩 용오름이라는 기이한 소용돌 이 현상조차 나타나는데 거기에 휘말리면 아무리 고절한 무공을 가지고 있어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렇듯 익히기 어려운 신법이었지만 신출귀몰한 신검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유일한 대안으로 생각되어졌다.

지난 삼년간 제자의 원한을 갚고자 하는 일념은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이 정도면 신검 의 움직임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선 후에야 묵귀영의 수련을 마치고 귀선문의 비동에서 중검(重 劍)의 검리에 대해 밤을 낮삼아 연구하고 수련하여 왔다.

이제 내일 모레면 신검과의 세 번째 대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난 두 번째와는 달리 고진인은 이번에는 자 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반드시 신검을 파쇄하여 죽은 제자의 원혼을 위로해 주어야 겠다는 신념에 발길 을 재촉하여 밤인데도 불구하고 서산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 멀리에 검시봉이 보이는 것 같았다. 검시봉은 내일밤에나 둘러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지던 고진인의 눈에 이채가 띄여 졌다. 검시봉 근처에서 한줄기 금광이 흘러 나오는 것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밝게 빛나던 금광 은 곧 이어 무엇인가와 부딪힌 듯 사방으로 흩어져 퍼져 나갔는데 잠시 후 밤하늘을 울어 떨치는 굉음이 울려 나왔다.

'스팟'

순간 고진인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리고 검시봉 방향으로의 숲 위로는 한 마리 밤새인 듯 흐릿한 그림자가 달빛 사이로 몸을 감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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