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15화 (15/152)

■ 제 15장 :

다음날 폐관수련하며 더러워진 몸을 씻고 새 도복으로 갈아입은채 광한전을 벗어나는 사조들을 따라 은성이도 청은검을 챙겨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광한전을 둘러싼 '오행 상극진'의 파진법을 알고 있던 은성이인지라 예전처럼 사조님들의 발걸음에 신경 을 곤두서지 않은 채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윽고 장문인을 만난 사조들이 장문인에게 새로이 창안한 사신권법에 대한 책자를 건네어 주고 몇마디 상의를 하였고 사조들을 포함한 동방파의 전제자들이 태 청각 앞에 위치한 야외수련장으로 다 모였다. 야외 수련장은 상청각의 장로와 제자들은 물론이고 천무원과 천 법원에서 수련하고 있는 동방파의 도인들로 가득 찼다.

약 삼백여명의 도인들이 장문인의 명령에 의해 야외수련장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싼 채로 서 있었다.

"오늘은 동방파에서 기념할 만한 날이 될 것이다."

장문인의 음성은 내공이 실렸는지 수련장 구석구석까지 정확하게 잘 전달되고 있었다. 그런데 장문인의 음성 에는 다소의 비장함이 섞여 있었다.

"광한전의 사숙들께서 폐관 수련하여 사신권법을 더욱 더 높은 경지로 끌어 올리셨다. 이를 여러 제자들에게 직접 시범으로 보여 주실 것이니 모두들 정신을 집중하여 보도록 해라!"

'와'

야외 수련장을 둘러싸고 있던 도인들에게서 함성이 퍼져 나왔다. 동방파는 다른 파에 비해 지닌 바 무공의 수 량이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 동방파에서는 비밀리에 전수되는 무공이 따로 없으며 모든 제자에게 평등하게 동 방파의 무공이 개방되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이는 특출난 몇 명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선발하여 개별적으로 무공 증진을 위해 지도해 주었지만 장로들만이 가지는 특별난 무공을 가르키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이 있는 제자는 노력한 만큼의 성취를 얻을 수가 있었다. 오늘 이처럼 동방파의 사조들이 여러 제자들에게 직접 시범 을 보이는 것에도 그런 동방파의 무공 전수 방법이 담겨 있었다.

무공을 배우는 사람은 그 무공에 대한 성취가 높은 사람에게서 무공을 배울수록 더욱 더 쉽고 빠르며 정확하 게 그 무공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만 훌륭한 제자가 나오는 법이다. 이처럼 특이한 무 공 전수 방법이 있었기에 오늘날 해동에 이름을 떨치는 동방파가 만들어질 수가 있었다. 개방적이고 경쟁적인 분위기에서 동방파의 무공은 대를 이어 갈수록 진보되고 개선되어 졌던 것이다.

제일 먼저 청룡사조가 나와 청룡권법을 펼쳤다. 수련장 중앙으로 나선 청룡사조는 선채로 한참동안이나 내기 를 모았다. 은성이가 보기에도 너무 오랫동안 내기를 다스리는 것 같았다. 광한전에서 청룡권법을 가르치실 때에도 아주 잠깐 정도씩만 내기를 다스린 후 시범을 보여 주셨던 청룡사조였다.

선채로 내기를 다스리던 청룡사조의 몸 주위로 청색 강기가 피어 올랐다. 청룡의 형상을 하지는 않았지만 청 색 강기는 사조의 몸을 한자 두께로 감싸고 있었다. 이윽고 사조가 청룡 권법을 시전하기 시작하였다.

사신권법중 청룡권법을 익힌 천운검 황규억의 눈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사숙의 청룡권법은 전보다 몇배의 위 력이 증가되었다. 청룡의 기세도 전보다 몇배나 강해졌고 내쏟는 권풍에서 조차도 청룡의 기세가 느끼어지고 있었다. 가공할 회전력 때문에 상대방이 공격당할 부위가 어디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일격 필살의 수로 일 컬어지는 '회룡 파운' 초식에서는 폭룡이 하늘로 승천하며 구름을 갈갈이 찢어 놓았고 상대방의 머리를 공격 해 순식간에 목뼈를 부러뜨리는 '청룡 탐주' 초식에서는 끝없이 둥글게 휘돌아지는 사숙의 두손 사이로 여의 주가 환한 빛을 뿜으며 형성되어지는 것 같았다.

특히나 마지막 초식으로 몸에 있는 내공은 물론 지닌바 잠재력까지 전부 짜내여 단 일초에 집중시키는 '사룡 투주' 초식에서는 청룡 사숙의 몸을 감싸고 있던 청색 강기까지도 사숙의 둥글게 말아 쥐고 있는 두손 사이로 스며 들어가 버렸다.

하늘을 향해 두손 사이에서 생성된 환한 구체를 쏘아보낸 청룡사숙이 기력을 모조리 탈진한듯한 표정으로 힘 없이 걸어와 좌정을 한 후 두손을 모았다. 청룡 사숙이 쏘아 보낸 구체는 10장여까지 치솟아 오른 후 서서히 대지속으로 확산되어 사라져 갔다.

장문인 황규억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혀졌다. 아무도 모르게 도포로 눈물을 훔친 장문인이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다음으로는 주작사숙과 백호사숙 그리고 현무사숙 순으로 나와 무공 시범을 보여 주었다.

사숙들의 무공 시범이 끝날때마다.제자들은 큰 박수와 함께 함성을 질렀고 장문인과 장로들의 눈가에는 물기 가 어리어졌다. 은성이도 청룡 사조가 모든 기력을 다해 사룡 투주를 펼칠때부터 사조들이 그나마 꺼져 가던 정기를 제자들에게 무공을 시연하면서 모두 소진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사조들의 희생적이고 숭고하며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서는 사조들을 말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욱더 사조들이 펼치는 사신권법에서 자신이 배워야 할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해 물기가 어리어 있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사조들을 바라 보았다.

장문인 천운검 황규억은 사숙들의 무공시범이 끝나자 모든 제자들을 해산시켰다. 그리고는 천무원 출신의 삼 대 장로와 함께 한명씩의 사숙을 품에 안고 조용히 조사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는 사숙들이 원하는 것이었 고, 사숙들은 조사동에서 마지막 생을 마칠 수 있는 권한이 충분하였다.

아니! 그것으로는 부족하였다. 천운검은 며칠 내로 태청각 앞 야외 수련장 한쪽에 사숙들을 위한 기념탑을 세 워 주기로 작심하였다. 조사동을 오르고 있는 천운검의 두볼로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천운검은 눈물을 닦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뒤에서 소리없이 따라오고 있는 사제들도 눈물을 흘리고 있으리라 ...

요즈음 은성이는 한가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백운각의 수심실 내에서는 읽을 책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동 방파의 천하 제일문을 사이에 두고 오른편에 위치한 만서전에 가서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며칠전까지는 천 약전에 가서 의학 서적을 읽고 단환 만드는 방법을 배웠지만 초금의가에서 수많은 의학 서적을 이미 독파하였 기에 읽을 만한 의학 서적은 별로 없었고 단환 만드는 비법은 며칠도 안돼 다 알 수 있었다.

은성이가 만서전에서 집중적으로 보고 있는 책들은 법술에 관한 책자들이었다. 동방파에서 법술에 대한 연구 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첫 번째는 음양오행에 대한 원리를 배우고 천지간의 이치를 탐구하여 이를 음양술과 진법에 응용하는 부류로 동방파의 장로들 중에는 태일진인과 삼원진인이 있었다. 다음으로는 주문과 부적을 사용하고 하늘의 신장과 천병들을 부려 천지풍운 조화를 발생시키고자 하는 부류로 장로들 중에는 육합진인과 중국에 건너간 구천진인 이 있었다.

은성이는 사주와 궁합을 보고 점을 치며 성복술을 연구하는 음양술과 진법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었고 직접 겪 여 본 바도 있어 믿음이 있었지만 주문과 부적으로 하늘의 신장과 귀신을 부린다는 법술은 너무나 기상천외하 고 황당하여 쉽게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하늘의 신장과 천병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 조차도 믿겨지지 않았다. 다행히 만서전 안에는 법술에 관련 된 책자도 몇권 보관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정갑대법(丁甲大法)이란 책자도 있었다. 필사본 이었지만 책자를 읽어보던 은성이는 이처럼 귀중한 책자가 왜 만서전처럼 동방파의 모든 도인이 열람 할 수 있는 장소에 비치 되어 있을까? 하는 의아심을 가졌다.

이책은 옛날 중국 황제가 치우와 싸울 때 하늘에 기도하여 얻은 비전이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종이 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손으로 써서 기록된 한권의 책자가 꼭 전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만 전 해졌으므로 비급이 지혜롭고 마음이 바른 사람에게만 일인 전승 되어졌다.

비급을 전승 받는 사람에게 반드시 먼저 바른 일에 사용할 것과 바르고 덕이 높은 사람에게만 전하겠다고 천 선(天仙)인 조사(祖師)와 구천현녀(九天玄女)와 봉래산의 여러 성선(聖仙)들에게 맹세를 하도록 한 뒤 전하였 다. 이러한 비급이 종이가 발명된 후 필사본이 난립한 후부터는 그 가치가 떨어져 버렸고 이처럼 평범한 도서 전에서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비급대로 행한다고 하여서 아무나 성공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사본이 난립한 후부터는 비급에 있는 주문과 부적의 영묘함이 저하되어서 보통의 정성과 인연으로는 그 신묘함을 얻을 수 없 게 되어져 버렸다.

오직 선연(仙緣)이 있는 사람만이 신묘함을 얻고 위로 천기를 살피고 아래로 지부를 살피며 인간의 길흉화복 을 알 수 있고 귀신을 부릴 수가 있는 것이다. 정갑대법을 살펴보던 은성이는 대법을 펼치는데 아주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저 조용하고 정결한 곳에 제단을 설치하여야 했다. 그리고 수련에 들어가기 7일 전부터는 매일 몸을 깨끗이 씻고, 부정한 것을 보지 말고,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고,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마음을 바르고 정성되이 갖어야만 했다.

단상에 차리는 음식도 복잡하였고 부적은 종류와 문양이 괴이하였으며 주문의 종류도 많고 이를 외워야 하는 시각도 천차만별이며 제사를 지내는 격식도 쉽지가 않았다.

만서전에서 아무리 법술에 관련된 책자를 읽어도 별무소용 이라는 것을 깨달은 은성이는 동방파에서 주문과 법술에 가장 능한 육합진인에게 법술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보기로 작정한 후 읽고 있던 책자를 서가에 꽂아 두었다.

상청각의 육합각에 도착한 은성이는 육합각 정문에 붉은 주사로 그려진 부적들을 볼 수 있었다. 은성이가 굳 게 닫혀진 육합각의 정문에서 부적들을 일별한 후 기별을 하려고 하는데 육합각의 정문이 열렸다. 내심 큰 목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는데 문을 연 30대 중반의 도인이 은성이에게 먼저 말 문을 열었다.

"자네가 은성 사제인가?"

안면이 전혀 없는 도인이 기약도 없이 불쑥 찾아온 은성이에게 먼저 아는체를 하였다.

"예, 제가 이은성 입니다만..."

"들어오게, 사부님이 기다리고 계시네."

정말로 귀신을 부리고 앞일을 예측할 수 있던지 아니면 탁월한 선견지명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은성이는 앞선 도인을 따라갔다. 도인은 붉은 물감으로 색을 칠한 문살이 매우 인상적인 방문앞에 멈추어 선후 닫혀져 있는 방문 안쪽을 향해 공손히 말을 했다.

"사부님, 은성 사제를 데려왔습니다."

"안으로 들라 해라!"

육합 진인이 방문 안에서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왠지 경건한 분위기를 느낀 은성이는 조용 히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제단이 차려져 있고 재단앞 향로에서 향내음이 그윽히 풍겨져 나오는 방안 의 벽면에는 여러 가지 울긋불긋한 색상으로 신선들이 그려져 있었다.

향로 앞에서 일어서 동·서·남·북·중앙의 오방(五方)으로 돌며 오방의 기를 머금기 위해 한차례씩 숨을 크 게 들이 마신 후 내쉼을 마친 육합 진인이 은성이에게 말을 했다.

"앞에 앉거라."

약간 긴장된 신색으로 은성이가 앞에 놓여 있는 방석에 좌정하자 육합 진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여기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슨 이유로 여기를 찾아 왔는지도 내 이 미 알고 있다."

정말로 신통방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인간이 앞일을 예측하고 사람의 마음까지도 알 수 있단 말인 가.?

앞에 있는 사숙님은 신선의 경지에 다달아 있는 것 같았다.

"내 이미 너와의 인연을 가늠하고 있었으므로 다른 격식은 생략해도 될 것 같구나. 은성아! 너는 법술을 배우 면 이를 바른 일에만 사용할 것을 맹세할 수 있느냐?"

은성이는 육합 진인이 자신이 이곳 육합각에 온 목적을 정확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여기에 온 목적도 법술에 대한 호기심에서 였기 때문에 대답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예, 사숙님. 바른 일에만 사용할 것을 하늘에 맹세하겠습니다."

"좋다, 하지만 법술을 배우고자 할 때에는 이에 따른 격식이 있으니 나를 따라 하도록 해라"

은성이는 육합 진인을 따라 향을 피우고 오방을 향해 예를 다한 후 천선(天仙)과 구천현녀(九天玄女)와 봉래 산의 여러 성선(聖仙)들에게 맹세를 하였다. 은성이가 비록 속가 제자이지만 동방파는 선택된 제자들에게 모 두 평등하게 무공과 법술을 전해 주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전수에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러한 전통 때문 에 동방파의 도인들 중에는 무술과 법술을 동시에 수련하는 기인들도 가끔 있었고 그 대표적인 도인이 지금은 중국에 가 있는 구천진인이었다. 인연에 따라 은성이에게 법술을 가르치고자 작정한 육합 진인은 육합각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법서 두 권을 꺼내어 은성이에게 주었다.

"이 책들은 함부로 전해주지 못하는 천서 이지만 이미 너와 인연이 있는 비전지서 들이니 경건하고 진일(眞一 )한 마음으로 살펴본 후 내용을 완전히 외우도록 해라!"

"예, 사숙님."

대답조차 경건한 마음으로 한 은성이는 사숙님이 전해준 책의 제목부터 살펴 보았다.

한권은 육합천서(六合天書) 이었고 다른 한권은 통천여의대법(通天如意大法) 이었다.

육합 천서는 천궁(天宮)에 있는 동화대제군(東華大帝君)이 노자(老子) 에게 전했주었다고 전해지는 천서이였 다.

노자의 어머니는 16살 때 오얏 열매를 먹고 임신한 후 65년이나 지나서야 아들을 나았는데 노자의 노(老)자는 팔십일세 노처녀의 몸에서 탄생하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육갑 천서는 처음에 총 3권이 전해졌지만 그중 한권만이 동방파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 내용에는 하늘 의 천신인 육정육갑신을 부르는 방법과 은신술(隱身術)을 배우는 방법이 수록되어 있었다.

통천여의대법은 맨 처음 목주군(木朱君)이란 신선이 강태공에게 전했다고 되어 있었다. 그 내용에는 토지신( 土地神)을 부르는 주문과 기우법(祈雨法) 그리고 오귀부(五鬼符)라는 부적을 사용하여 오 귀를 다스리는 방법 이 적혀 있었다. 오귀의 이름은 각각 두인, 이개, 장오, 십태, 저만 이었는데 오귀들을 부려서 멀리에서 발생 된 일이나 미래사의 길흉을 보고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밤에 산중이나 외딴집에 유숙하게 될 경우 오귀에게 경비하도록 명령할 수도 있었다. 법술, 특히 주문과 부적을 사용하는 법술은 그 성취를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힘들고 수련도중 미치광이가 되거나 심 지어는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동방파 삼백여명의 도인들중 법술을 배우는 천법원 소속 도인들은 백여명 밖에 안되었고 그중 주문과 법술을 배우는 도인은 삼십여명 밖에 없었다. 구천진인이 중국에 간 이후로 주문과 부적을 사용하는 법술을 배우는 30여명의 제자들을 육합진인 혼자서 지도하고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중 현재 육합각에 거주 시키고 있는 세명의 제자만이 약간의 성취가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통천여의 대법과 여러 가지 잡술을 익혔을뿐 육갑천서상에 있는 육정육갑신을 부르는 단계까지는 도달 하지 못하였다. 법술을 배우는 데에는 심지가 굳고 오성이 발달돼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마음이 명경지수처 럼 깨끗하고 정신을 자기가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받은 선천의 진일지기(眞一之氣)와 일치시킬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였다. 정신이 진일지기와 합치되지 않으면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신은 나타나지 않고 신이 나타나더라 도 계약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은성이가 사숙이 전해준 천서의 내용을 다 외우자 육합 진인은 은성이가 신들과 계약을 맺 고 법술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먼저 육정 육갑신을 부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육갑인(六甲印)을 새기도록 하였다. 육갑인은 육갑천서를 익히는 당사자가 직접 새기어야만 했는데 육갑인을 새기는데 가장 좋은 재료는 벽조목( 霹棗木: 벼락 맞은 대추 나무)이었다. 벽조목은 그 희귀성 때문에 같은 부피의 금붙이와 같은 가격으로 거래 되고 있었는데 다행히 육합진인은 육갑인을 새기는데 충분할 정도의 벽조목을 보관하고 있었다.

육갑인을 새기기 위해서는 자시나 오시에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문을 굳게 잠근 후 새기되 먼저 분향하고 육 갑신주(六甲神呪)를 세 번 외운 다음에 정성스럽고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새겨야만 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서는 정결한 방에 신단(神壇)을 설치한 후 미리 정해진 제수를 차려 놓고 앞에 침향(沈香)을 피우면서 역시나 미리 정해진 제사 절차에 따라 경건하게 제사를 지내야 했는데 제사가 끝난 연후에야 육정 육갑신을 청할 수 있었다.

육정 육갑신을 청할때에는 육갑인을 손에 들고 육갑신주를 끊임없이 외워야 하는데 육정 육갑신은 바로 나타 나지를 않았다. 법술을 행하는 자가 선연이 있고 또한 주문을 외우는 정신이 진일지기에 가까워질수록 빨리 나타나는데 빨라야 이삼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나타나지를 않았다.

제사를 마친 은성이는 육정 육갑신을 부르기전 태극진기를 운용하여 전신에 퍼트린후 심신을 고르기 시작하였 다. 이윽고 머리가 명경지수처럼 깨끗해 지자 심신을 가지고 육갑인을 손에 든 후 육갑신주를 외우기 시작하 였다.

상청상제 동화대제군 영오수육인천서... 급급여율령.

상청상제 ... 급급여율령.

은성이가 육갑신주를 세 번째 외우자 은성이의 앞에 금갑을 입거나 비단으로 만든 도포를 입기도 하였으며 키 는 10여자에 이르는 12명의 육정육갑신이 나타났다. 육합 진인의 말에 따르면 최소한 이삼일은 지나야 나타난 다고 하던 육합진인이 주문을 세 번밖에 외지 않았는데 벌써 나타나자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였지만 허공에 떠 있는 육정육갑신들의 험상궂은 인상에 긴장하지 않은 채 눈을 크게 뜨고 단 앞에 서서 아뢰었다.

"어리석은 관계로 절차를 몰라 진군(眞君)과 성중(聖衆)을 움직일 수 없사오니 소원하는 바를 말하겠습니다."

"말하라!"

육정 육갑신의 입이 동시에 열리고 말도 동시에 울려 나왔다.

"제가 천지간의 이치에 순응하고자 하는데 혹 천지간의 이치에 역행하고자 하는 무리가 있으면 청해 계신 신 들을 이 육갑인을 증거삼아 부르고자 하오니 제 부름이 있으면 현신하시어 저를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알았다, 그 육갑인을 증거삼아 네가 부르면 나타나겠다."

동시에 입을 열어 같은 말은 한 육정육갑신의 몸에서 각각의 색상이 다른 작은 구체가 생기더니 은성이가 손 에든 육갑인 속으로 스며 들어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육정 육갑신과의 계약이 끝난후 은성 이는 육합진인의 도움으로 은신술과 토지신을 부르는 법술을 배우고 오귀를 불러 계약을 맺은 후 이들을 다스 릴 수 있었다.

육합진인에게서 여러 가지 법술을 배우는 사이에 겨울은 지나가고 봄바람이 살랑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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