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3장
오늘도 동방파의 장문인이 거취하며 또한 조사지전인 덕수전이 있는 태청각의 태화전(太和殿)에서는 동방파의 원로들이 모여 조사지공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에는 장문인인 천운검과 동방파의 구대 장로중 무를 익히는 천무원 출신의 백운검 김장로와 묵운검 신장 로 그리고 홍운검 이장로가 참석하였으며 법술을 중시하는 천법원 출신의 삼원진인(三元眞人)과 태일진인(太 一眞人) 그리고 육합진인(六合眞人) 까지도 참석해 있었다.
자운검 허장로와 함께 중국에 간 청운검 손장로와 구천진인(九天眞人)을 제외한 전 장로가 참석한 것이다.
"조사지공이 워낙 난해하여 오의를 깨닫지는 못하였지만 조사지공을 연구하다보니 본파의 다른 무공에 대한 깨달음이 매우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본파의 큰 복이랄 수가 있습니다."
장문인은 고개를 끄덕이는 여러 장로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조사지공은 본파의 제일가는 보물이므로 여러 장로들께서는 제자들에게 함부로 전수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 다. 앞으로 조사지공을 배울 수 있는 자격은 장로 회의의 심의를 거쳐서 인정되는 제자로만 한정하겠습니다."
여러 장로들이 장문인의 말을 모두 인정하자 장문인이 김장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김장로! 이번에 조사지공을 가져온 허장로의 속가 제자는 수련에 진보가 좀 있는지요?"
"예! 은성이는 귀장경을 익히는 데도 내기가 길러지지는 않지만 무공 습득은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 난 것 같 습니다. 이제는 가르칠만한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공도 없는 제자가 일년여만에 김장로의 무공을 모두 배우다니..., 게다가 본파 의 무공을 가장 많이 알고 계신 김장로인데..."
"제가 어찌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아무리 난해한 초식도 쉽게 이해하고 솜이 물을 흡수하듯이 몸에 익혀 가는 것이 가르치는 저도 믿기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며칠전부터는 은성이와 같이 초식을 풀어서 연구하고 있는데 오히려 제가 배우고 있는 실정입니다."
"음!, 김장로가 여러 장로들 중 조사지공에 대한 깨우침이 가장 많은 것이 우연만은 아닌가 보군요. 하지만 설마 은성이라는 속가 제자를 가르치면서 심득을 얻었다고는..."
장문인은 차마 믿기지 않는 듯 뒷말을 생략하였다.
"장문사형!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입니다. 일년전 제가 은성이의 무공수위를 알아보기 위해 그 동안 익히고 있 었다는 해동권법과 유운검법을 시연하게 한 후 거기서 깨달은 것이 저의 무공 수위를 한단계 상승시켰습니다. "
"이럴 수가!"
놀랍다는 표정의 장문인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싶더니 다시 김장로에게 말을 하였다.
"김장로! 내일 오시에 은성이를 상청각의 청룡전으로 데리고 오시오. 그리고 내일 청룡전에는 여기 계신 육대 장로와 광한전의 사숙님들도 모두 참석할 것이오!"
"아니! 사숙님들 까지요?"
묵운검 신장로가 놀라며 말을 하였다.
광한전에 계시는 도인들은 장문인과 구대장로들의 사숙뻘 이었다. 올해로 100여세에 달하는 세수인데도 불구 하고 아직도 정정하였지만 광한전 밖으로는 일체의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광한전 안에서 자연을 즐기 고 그들이 창안한 사신 권법을 벗삼아 노년을 신선처럼 즐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네, 신장로. 조사지공이 너무 난해한지라 삼일 전에 염치 불구하고 광한전에 찾아갔었다네."
학처럼 고고하게 살아가시는 분들을 다시금 속세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게 하였다는 죄책감인지 장문인의 음성 에는 힘이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사숙님들도 조사지공에는 큰 관심을 갖었다네. 내일 태화전에 모두 납시어 같이 조사지공을 연구하기로 하였는데 은성이의 성취가 김장로에게 심득을 줄 정도라니 본파의 무공에 대한 성취가 더 뛰어나 신 광한전의 사숙님들과 같이 견식하는 것이 좋을 듯 하네."
동방파에서 장문인이 기거하는 태청각 후원으로는 소나무 숲과 대나무 숲이 양분되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대나무 숲과 소나무 숲은 동방파의 제자들에게 출입금지 구역이었다. 바람결에 대나무 잎새가 바르르 떠는 고 즈녁한 밤에 송림과 죽림의 끝자락에 위치한 한 건물에는 호롱불이 밝혀져 있었다. 방안에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의 도인 네명이 일장여 정도의 거리를 둔채 사각형 모양으로 앉아 있었다.
도복은 색상이 모두 달랐는데 파란색 도복을 입은 노인이 침묵을 깼다.
"천기를 보아하니 우리 네 노인이 이승에서 숨을 쉴 날도 많이 남지는 않았네 그려!"
그리고는 한참을 침묵하였다. 일다경 후 다시 파란 도복을 입은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천기에는 동방파에서 큰 별이 솟아 나오고 있네."
말을 하고 있는 파란 도복의 노인은 입 이외에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심지어는 눈조차도 깜박이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승을 떠나기 앞서 조사지공이 출현하고 동방파에 신성이 떠 올랐으니 이게 무슨 징조인지 다들 알 것이라 믿네. 받은 만큼 돌려주고 떠나야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파란 도복의 도인은 침묵하였다. 동시에 방안을 밝히고 있던 호롱불도 꺼져 버렸다. 건물은 애초에 그랬다는 듯이 적막함만이 감돌고 있었고 건물을 감싼 송림과 죽림도 고요함 속 에 묻혀져 갔다.
'백운각 수심실'
탁자 주변 십여개의 의자에는 세명의 도인이 앉아 있었다. 은성이는 수심실에 보관된 책자들중 아직껏 읽지 못한 마지막 책 한권을 손에 들고 있었다.
'반야 심경 주해'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한없이 넓어지고 생각은 끝없이 깊어지도록 만드는 불문의 경전이었다. 한 구절을 읽 은 후 눈을 감고 명상하고 다시 또 한 구절을 읽고는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는 은성이의 독서법이 은성이의 앞에서 독서중인 삼사형의 신경에 거슬렀는가 보다.
"은성 사제! 왠 청승인가? 그 책은 아마도 수심실이 생긴 이래로 사제가 처음 보는 책일걸세. 무공을 향상 시 키려면 무공서적을 보던지 아니면 수련실에 가서 열심히 땀을 흘려야지. 쯧쯧!"
'해동의 무술' 이라고 하여 동방파의 선배도인이 해동의 이름난 문파와 무술의 특징에 대해 소개해 놓은 책자 를 보고 있던 삼사형은 불교 경전이나 읽고 있는 은성이가 못마땅한지 혀까지 찼다.
"삼사형! 무공은 몸에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깨달음 속에서 향상되는 것이잖아요. 사형도 나중에 이 책 한 번 읽어 보세요. 얼마나 심오한 이치가 들어 있는지..."
옆에 앉은 황사매의 독서에 방해되지 않으려는 듯 은성이는 삼사형에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그런 책을 읽으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도 빙빙 돌고 수마에 빠져들던데 사제도 참 특이한 성격이야."
말만으로도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양쪽 엄지 손가락으로 태양혈 부위를 쿡쿡 누르던 삼사형이 말을 이었다.
"좀전에 사부님께서 사제도 상청각의 청룡전으로 오라고 하던데 무슨 일이 있나? 지금껏 사제는 사부님한테 백운각의 수련실에서만 따로 무술 지도를 받았었잖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숙님께서 다른 말은 없이 오늘 오시에 검을 착용하고 사형들과 같이 청룡전으로 오 라고 하던데요."
"와! 오늘은 은성 사형도 청룡전에서 무술을 배우는가 보네요. 그동안 수련 시간이 달라 한번도 은성 사형의 우아한 무술을 볼 기회가 없었는데."
옆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 줄 알았던 황사매가 갑자기 끼여들었다.
"은성 사형 ! 오늘은 그동안 사부님에게서 특별 지도를 받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기회가 왔나 봐요. 그런 데 은성 사형은 사부님한테 어떤 무공을 배웠어요? 처음 올때는 해동권법하고 유운검법만 알고 있었잖아요."
황사매의 표정을 보니 독서는 벌써 저만큼 뒷전으로 밀려났는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한 손으로 귀엽게 턱을 고인채 은성이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 황사매는 어떤 무공을 배웠는데?"
이처럼 어린 나이에 김장로의 직속 제자로 추천된 것만 보아도 황사매의 자질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황사 매가 무술을 시연하는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는 은성이는 대답을 늦춘 후 오히려 되물어 보았다.
"다른 것도 배우고는 있지만 이형환위 신법하고 유운검법을 집중적으로 배우고 있어요,"
앉은 채 몸동작과 손동작으로 흉내를 내면서 사매가 말을 하였다.
"훗훗! 사숙님께서 나에게 동방파의 무술은 백호권법 이외의 사신권법을 제외하고는 다 가르쳤다고 하셨어. 하지만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 보다는 익힌 무공을 어느 경지로 성취하였는지가 중요하지. 삼사형! 안 그렇습 니까?"
"아니! 사제, 그럼 사부님에게 개화검법도 배웠는가?"
"예! 사숙님께서 가르쳐 주셔서 배웠습니다."
"음..."
삼사형 윤효수가 짧게 침음성을 흘렸다.
개화 검법은 백운각에서 대사형 배석승 이외에는 아직 전수되지 않은 검법이었기 때문이다. 신법인 이형환위 와 백호권법 그리고 미륵지와 사상 금나술법은 백운각의 제자 모두에게 전수해 준 후 어려서부터 서서히 익혀 오도록 유도하였지만 개화 검법만은 깨달음의 무공으로 검법에 어느 정도 성취가 있다고 판단되는 제자에게만 가르치도록 되어 있었다. 검법에 조예가 적은 사람이 배우면 오히려 다른 검법의 성취만을 늦출 우려가 있다 고 판단한 동방파의 선배 도인들이 정한 규칙이기 때문이다.
사부가 은성이에게 개화 검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은 사부가 은성이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는 증거였다. 하 지만 일년전에 동방파에 입산시 은성이는 유성검법조차 배우지 못했었지 않았는가. 아무리 무공이 일취월장 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질투심을 꾸욱 눌러 참으며 삼사형이 은성이에게 말을 했다.
"사제! 개화 검법을 배웠다니 축하하네. 사부님은 이사형과 나에게는 아직도 성취가 부족하다며 전수해 주기 를 꺼리시는 무공인데..."
삼사형이 다소 의기소침해 하며 은성이에게 말을 하자 황사매가 삼사형을 위로해 주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래도 삼사형은 은성 사형보다 내공이 높잖아요. 은성 사형이 성취가 빨라도 그건 초식에서의 성취이고 삼 사형의 권풍을 따라 오려면 아직 멀었다고요."
"뭐, 하하하! 황사매, 그거야 당연한 것이지 자랑할 것은 아니야. 나야 내공을 수련한지가 15년이 되었지만 사제는 겨우 일년 전부터 수련했잖아."
눈치 빠르고 총명한 황사매 덕분에 삼사형의 기분이 풀어지자 수심실의 분위기가 화기애애 해졌다.
"몸이 찌뿌등하니 수련실에 가서 몸좀 풀어야겠네. 사제도 같이 갈건가?"
삼사형이 읽고 있던 책을 덮은후 서가에 넣기 위해 일어서며 은성이에게 말을 했다.
"아니요, 저는 읽던 책이나 계속 보렵니다. 몸은 오시에 청룡전에서 풀겠습니다."
"음, 알았네"
삼사형이 수심실을 나가자 은성이는 다시금 책 한 구절을 읽다가 명상하고 또 한 구절을 읽다가 명상하는 특 이한 독서법을 반복하였다. 은성이가 독서 삼매경에 빠져 들고 한참 후에 황사매도 읽던 책을 덮었다.
책을 꽂기 위해 서가로 가는 황사매의 작은 손에 잡혀진 책의 표지위로 책 제목이 언뜻 보였다.
'구름 나그네'
유운 검법을 익힌 검객을 멋들어지게 표현한 선배 도인의 재치가 살아 숨쉬는 제목이었다.
상청각은 동방파 구대 장로와 그 외 직속 제자들이 단체로 무술 수련을 하는 전각으로 이층으로 지어져 있었 다. 푸른색 기와가 촘촘히 박혀 있는 상청각의 지붕 한쪽 용마루에는 나래를 활짝 펴고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붉은 주작의 형상이 조각돼 있었으며 반대쪽 용마루에는 붉은 여의주를 입에 문 청룡이 호풍환우를 일으 키려는 듯 상체를 세우고 하늘로 솟아오르려는 형상이 조각돼 있었다.
주작이 위치돼 있는 반쪽의 주작전과 나머지 반쪽의 청룡전이 합해지는 장소에는 상청각이라는 금빛 편액이 위풍당당하게 걸리어 있었다. 구대 장로중 천무원 출신의 장로와 제자들은 청룡전에서 무술을 수련하고 천법 원 출신의 장로와 제자들은 주작전에서 법술을 수련하였다.
사형, 사매를 따라 청룡전에 들어선 은성이는 침작하게 청룡전의 내부 전경을 살펴 보았다. 사방 10장 정도의 넓은 수련실 바닥은 나무로 되어 있었으며 일층 천장까지의 높이는 삼장이나 되었다.
수련실 정면으로 천무원 출신 장로들의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백운각 일행과 은성이가 자리를 잡은후 반각정 도 지나자 장문인과 육대 장로가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고 청, 백, 홍, 흑색의 도복을 입은 도인 4명을 앞세 우고 청룡전으로 들어섰다.
장문인과 네명의 노도인 그리고 장로들이 수련실 좌측에 이미 준비돼 있던 의자에 앉은 후 백운검 김장로가 네 명의 노도인과 장문인에게 포권을 한후 제자들 앞으로 나섰다.
"오늘 하루 청룡전 단체 수련은 쉬겠다. 대신 너희들의 안목을 높여 주기 위해서 동방파의 무공 초식 시연을 하겠으니 잘 살펴보고 실력 향상의 기회로 삼도록 해라. 석승아! 앞으로 나오너라!"
"예, 사부님."
미리 사부에게서 오늘 무술 시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언질을 받았는지 배 사형이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해동 권법과 유운검법 그리고 유성검법을 차례로 시연해 보이거라."
"알겠습니다."
배사형은 동방삼룡 중의 하나였다.
동방삼룡은 배사형과 묵운검 신장로의 대제자인 신동윤 그리고 천법원 출신 삼원진인의 대제자인 노상섭을 포 함하며 동방파 후기지수를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해동권법을 펼치는 배사형은 역시 동방삼룡중의 한명 다웠다.
배사형이 해동권법을 펼치자 동방파 26대 제자들이 배사형의 동작 하나하나에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초식은 부드럽고 유연한 가운데 강력한 힘이 들어 있었으며 빠를때는 질풍처럼, 강해야 할 때는 폭풍처럼 휘 몰아쳤다. 보법은 종횡무진한 가운데 은연중 이형환위의 신법이 가미되어 있었고 현란한 발차기는 대기를 찢 는 소리를 내었다. 권을 내지를 때는 기를 조정하여 집중시켰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기라도 하는 듯 구름처 럼 조용히 흐르다가 마지막에 광풍폭우처럼 휘몰아쳤다. 초식과 초식 사이의 빈틈도 거의 없었다.
26대 제자들의 입이 벌어지고 장문인과 육대 장로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배사형은 해동권법에 이어 유운검 법을 펼쳤다. 동방파의 유운검법 속에는 검을 다루는 비결이 숨어 있었다. 유운검법은 가르치는 사부가 아무 리 유능하다고 하여도 대성할 수 없고 배우는 제자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하여도 따라 배우는 흉내 검법으로는 절대 대성할 수 없는 검법이었다. 많은 실전과 몸에 배인 기술 그리고 깨달음과 높은 내공이 가미되어야만 진 정한 유운검법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훌륭한 사부와 뛰어난 제자 그리고 피나는 노력과 끝없는 내공 단련이 있어야만 했다.
배사형은 유운검법속에 숨어있는 모든 비결에 대해 이미 큰 성취를 본 것 같았다. 무거워야 할때는 검신에 천 근의 힘이 들어간 듯 기세등등 했고 가벼워야 할때는 마술이라도 부리는 듯 손가락 사이로 검병(검의 손잡이)이 춤을 추며 이동하였다. 날카로워야 할때에는 검봉이 몇 개로 분리된 듯 종횡무진하였고 빨라야 할때에는 유성우가 내리는 듯 하였다. 상대방의 무기를 떨어뜨리는 '석'자결을 운용하는 초식에서는 검배가 순식간에 역건곤 하고 반듯한 검신이 뱀처럼 휘어져 갔다.
유운검법 시연을 마친 배사형은 선채로 조용히 내기를 고른 후 곧바로 유성검법의 시연을 하였다. 유성검법은 오로지 빠르기만을 위주로 하는 검법이었다. 검집에 검을 넣은후 왼손 엄지 손가락으로 검의 호수를 튕기면서 오른손으로 순간적인 힘을 발휘해 발검하는 순간 눈앞에 하얀 검광이 번뜩였다.
"찰칵"
검을 뽑지도 않았었는지 검은 검집속에 들어가 있었다. 배사형의 왼손이 다시 한번 검의 호수를 튕기자 하얀 검광이 또 번뜩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백광이 종이 아닌 횡으로 번뜩였다. 다시 검을 앞쪽으로 찌른후 회수되 었는지 검광이 일직선으로 내달은 후 사라지자 이번에는 검광이 두 번씩 번뜩인 후 사라졌다.
관전하는 26대 제자들의 대부분이 검광만 보고 검신을 보지는 못했는지 숨 쉬는 것도 잊은채 넋이 나가 있었 다. 평상시 배사형은 본신 실력을 거의 발휘하지 않다가 오늘 장문인과 장로들 그리고 광한전에 은거하고 계 시는 사조님들 까지 나오자 본신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실력을 모두 보인 배사형이 장문인이 앉아 계신 방향을 향해 포권을 한 후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제야 26대 제자들의 박수 소리가 청룡전 내부에 울려 퍼졌다. 박수가 끝나기를 기다린 김장로가 다시금 앞 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인물을 호명하였다.
"은성아! 이번에는 네가 앞으로 나와 시범을 보이거라!"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모두가 의아해 했다. 배사형이 무술 시연을 하자 그것을 구경하라고 청룡전에 자 신을 오라고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느긋이 구경을 하던 은성이도 당황해 했다. 고개를 돌려가며 옆사람들을 쳐다보다가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김장로를 보고는 잘못 듣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 사숙님"
조금은 당황해 하며 수련실 중앙으로 나선 은성이는 선 채로 조용히 내기를 가다 듬었다. 그동안 무술을 배우 면서 동방파 선배 도인이 쓴 '해동권법 개론'이라는 책을 접한 이후로 내공을 운용해 초식을 펼쳐 본적은 거 의 없지만 주변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아지고 약간 긴장되자 내공을 운용해본 것이다.
중단전에 있는 태극진기는 그대로 둔 채 하단전에 있는 태극진기를 빛이 발광하듯이 몸 전체에 골고루 퍼지도 록 하는데는 숨 한번 쉴 시간으로도 여유가 있었다. 물론 몸 밖으로는 내 비치지 않도록 조정을 하였다.
몸 전체의 근육을 풀어 주고 활력을 심어준 후 다시 진기를 하단전으로 불러들였지만 경락과 전신 세맥에는 다소의 진기가 남아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서서히 해동 권법을 시연해 보이기 시작하였다.
묵운검 신장로의 대제자이자 동방삼룡중의 한명인 신동윤은 배석승에 비해 2살이 적었다. 그래서 평소 배석승 을 사형이라고 호칭하고 있었다. 신동윤이 본 은성이의 해동권법은 배사형과 많은 부분이 달랐다. 배사형에 비해 날카로움이 부족하고 빠르기도 좀 느린 것 같고 현란하지도 않았다.
대신 극도로 유연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몸무게가 없는 사람이 초식을 펼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흐느적 거 리는 것은 아니었다. 빠를때는 빠르고 날카로울때는 날카로웠다. 하지만 배사형과 비교하면 위력이 한참 부족 한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초식이 물 흐르듯이 이어져 빈틈이 전혀 없고 왠지 동작이 살아 숨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권법을 펼치는 은성이의 손과 발 외의 모든 부분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초식과 온몸의 모든 부위 및 감각이 일체화 되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배사형의 해동권법을 볼때는 '잘하는 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었는데 은성이의 해동 권법을 보자 무엇인가가 계속 뇌리를 자극하였다.
언뜻 무엇인가 발견한 것 같으면 사라지고 무언가 느껴진 것 같은데도 아무 것도 없는 허망함이 이어졌다. 한 없는 아쉬움만 남긴 채로 은성이는 연달아 유운검법을 펼치고 있었다. 해동권법을 펼치고도 힘 하나 들지 않 았는지 은성이의 호흡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김장로가 바라보는 시각은 신동윤과 많이 달랐다. 이미 은성이의 실력을 알고 있는 김장로였다. 하지만 오늘 은성이는 또 달라져 있었다. 내공은 거의 없지만 초식운용에서는 자신과 비슷한 실력을 가졌으리라 생각되던 은성이는 이미 자신이 따라가기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실력이 도약해 있었다. 그동안 은성이를 지도하고 같이 초식을 연구하며 또한 배우기도 할 때에는 이제야 말로 동방파의 해동권법이 단점을 보완하고 완벽해지는구나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오늘 또 더욱 완벽한 해동권법이 저 멀리서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해동권법은 '완벽이란 존재 하는 것일까?' 의구심까지 느껴지게 만들 정도로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까지도 가미되고 보완되어져 있었다.
김장로가 보기에는 지금 은성이가 펼치는 해동권법은 완벽에 거의 근접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세상에 '완벽'과 '절대' 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기에 부족함이 있을 수 있고 인간이기에 끝없이 부 족함을 채워 나갈 수 있으며 그러다 보면 '완벽'과 '절대'에 근접해 갈 수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없이 근 접해 가는 사람들중에는 마침내 '완벽'과 '절대'에 수렴하는 사람도 생길 수 있다.
물론 자신과 같은 범재는 안되겠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무술을 시연하고 있는 은성이와 같은 천재라면...
김장로는 은성이가 유운검법도 자신의 성취를 저만큼 뛰어 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내공만 깊어진다면 아마도 해동에서 은성이의 유운검법을 감당할만한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김장로 스스로 은성이가 적이라 생각하고 가상으로 공격할 부위를 찾았지만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은성이가 펼치 는 '석'자 구결속에서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대응하면 될까?' 생각해 보았지 만 방도가 전혀 없었다.
'휘유'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는 김장로의 등으로 한줄기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유성 검법은 내기 조절이 가장 중요 하였다. 얼마나 내공이 심오한지에 따라 검력 및 검의 속도가 좌우되었고 또한 같은 내공이더라도 응축된 내공을 얼마나 순간적으로 발산해 낼 수 있는가에 따라 발검속도가 달라졌다.
다른 무공과는 달리 진정한 유성검법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내공을 써야만 했다.
은성이는 하단전에 머무는 태극진기를 삼성정도 운용하여 유성검법을 펼치는데 필요한 부위에 골고루 배분 하 였다. 그동안 은성이는 유성검법을 연구하면서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발검술을 익히기 위해 몸 각개각소에 필 요한 내기의 양에 대해 집중적으로 검토하였었다.
'자운곡'내에서 무진쾌를 연습하면서 연구한 경험이 큰 도움을 주었다.
빠른 발검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검이 검집에서 폭발하듯이 튕겨 나갈 수 있도록 검의 호수를 튕겨 주는 왼손 엄지 손가락 부위와 튕겨지는 검의 검병을 잡아 가속도를 붙여 뽑은후 목표한 지점을 베거나 찌르는 오른손에 제일 많은 내기가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목표에 빠르게 다가서기 위한 다리 부위와 가속도가 붙은 검에 더 큰 가속도를 낼 수 있게 하는 유연한 허리 근육 등 내기가 나누어져야 할 장소도 많고 그 장소 별로 내기가 나뉘어져야 할 양도 달랐다. 이 모든 것은 또한 검을 휘두르는가 혹은 찌르는가에 따라 다르고 몸만 돌리는가 아니면 적에게 다가서며 공격해야 하는 가에 따라서도 달랐다.
"찰칵"
은성이가 유성검법을 펼치자 흰빛의 번뜩임조차 거의 없었다. 가공할 빠르기에 검의 떨림이 거의 없다는 증거 였다.
"찰칵"
김장로조차 검광을 자세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발검술이었다. 그런데 이번 발검은 처음 소리와는 다르다 는 것을 김장로는 알 수 있었다.
'찰칵' 비록 소리는 한번 났지만 은성이는 세 번을 연달아 발검하였던 것이다.
'종 방향으로 한번 그리고 횡방향으로 한번 마지막으로 찌르기 한번'
너무나 빠른 속도로 연달아 발검을 해서인지 검집에 검이 들어가는 소리가 한번밖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무 술시연을 마친 은성이는 장문인이 앉아 계신 방향을 향해 포권을 한후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때였다. 장문인과 동석에 앉아 계신 흰도복을 입은 노도인이 은성이에게 말을 걸었다.
"무공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예, 자운검 사부님에게서 해동권법과 유운검법을 배웠고 유성검법과 동방파의 다른 무공은 백운검 사숙님에 게서 배웠습니다."
사문의 존장이며 장문인과 동석한 것으로 볼 때 배분이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은성이는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그래! 김장로에게서 무공을 배웠으면 백호권법 또한 배웠느냐?"
"예, 배웠습니다."
"그럼 한번 시연해 보거라!"
"알겠습니다"
누구의 명이라고 거절할 수 있겠는가?
은성이는 다시 한번 수련실의 중앙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