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6장 : 잠룡 초현
집을 떠나 동방파로 가는 은성이의 발걸음은 새로운 곳에 대한 동경에 다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등뒤에 봇짐 을 메고 긴 머리를 땋아서 백의 장삼위에 걸친 은성이의 허리에는 청은검이 메달려 대롱 거리고 있었다.
아침에 미륵산을 떠나 초 저녁에 도착한 곳은 계룡산 입구였다. 이 산은 산수 지리적으로 수닭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계룡산이라 불리었는데 예전부터 닭과 상극인 지네가 특히 많은 산이었다. 객점에서 하룻밤을 지 낸 은성이는 계룡산을 넘기 위해 아침 일찍 서둘러 길을 떠났다. 계룡산 초입에 주막이 보였는데 그 곳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주막 옆을 지나는데 누군가가 은성이를 불렀다.
"여보게 !"
이곳에 자신을 알만한 사람은 당연히 없을 테지만 은성이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사람을 바라 보았다. 보 부상처럼 보이는 상인들 중에 뚱뚱한 체구의 상인이 보였다.
"자네 지금 계룡산을 넘으려 하는가 ?"
"예 !"
"그럼 잠깐 이쪽으로 와 보게나 !"
은성이는 그냥 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 상인이 호의를 가지고 부르는 것 같아 주막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상 인이 앉아 있는 평상 위에는 큰 장사 보따리들이 올려져 있었다.
"이보게 ! 자네 요즈음 이 계룡산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구먼..."
생각보다는 은성이의 나이가 어리다고 판단되어서인지 그 상인은 천성보다도 더 다정 다감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요즈음 이곳 계룡산을 넘다가 변을 당한 사람들이 많다네, 아무리 담력이 크대도 젊은 사람 혼자서 가기에는 너무 위험하네
자네도 여기 있다가 우리 일행과 같이 출발하세"
"언제쯤 출발하는데요?"
"저기 식사중인 사람들의 식사가 끝나면 바로 출발할걸세"
은성이는 상인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 보았다.
네사람이 식사 중이었다. 30대 중반은 됨직한 청의의 사내와 20대 초반이지만 덩치가 우람한 청의인 그리고 역시 비슷한 나이의 몸매가 얍상한 청의인, 마지막으로 청의의 예쁜 여자 한명이 식사를 거의 끝내가고 있었 다. 뚱뚱한 상인은 은성이의 귀에 한손을 가져다.대며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 소곤거렸다.
"저 사람들 오른쪽 소매에 수 놓여진 금룡 보이지 ?"
상인의 말대로 금룡이 수 놓여져 있었다.
"내가 보기에 저 사람들이 그 유명한 금룡각의 제자들 같아 . 우리들은 그저 저 협객들 뒤만 졸졸 따라가면 별 위험이 없을 것 같아"
"금룡각 !"
사실 은성이는 사부에게 동방파에 대한 설명만 들었지 다른 문파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뚱 뚱한 상인이 금룡각의 제자들이 모두 협행을 하고 대단한 무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 보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식사를 마친 청의의 아가씨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었다.
쑥쓰러움에 은성이는 찔금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런데 청의의 아가씨는 식사 후 마음이 느긋해져서인지 혹은 선천적으로 장난끼가 많은지 은성이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어이!, 꼬마야"
"헉!, 꼬마라니"
"몇 살이나 먹었니"
은성이의 눈길이 홱 돌아갔다.
"아니, 내가 몇 살인데 꼬마라고 하는 거예요 ?"
"어!, 몇 살인데 ?"
의외로 강한 은성이의 반발에 청의의 아가씨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14살이나 먹었단 말이예요"
"어!, 그래 . 그러면 꼬마 맞네 뭐"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청의의 아가씨의 말에 은성이는 다시 한번 발끈했다.
"내가 꼬마면 그 쪽은 아줌마예요"
"뭐! 아줌마"
"야! 꼬마야 ! 이렇게 예쁘고 날씬하고 순진 무구해 보이는 아줌마 봤냐?"
이번에는 청의의 아가씨가 발끈했다. 양손을 허리춤에 대고 두 눈썹이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켜 올라간 것이 정말로 화난 것 같았다.
"아니! 그러면 나같이 의젓하고 나이든 꼬마 봤어요?"
은성이도 양 날개를 접은체 더 큰 목소리로 행여 기세 싸움에서 밀릴세라 당차게 나갔다. 소리에는 소리, 폼 이면 폼 어디 하나 밀릴 것이 없었다.
'음! 강적인데'
청의의 아가씨는 장난 좀 치려고 은성이를 놀렸는데 막상 은성이가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더욱 기세가 등등하 자 살짝 꼬리를 말 수 밖에 없었다. 애하고 다투는 것은 지면 말할 것도 없지만 이겨도 체면만 손상되는 것이 다. 말하자면 하등 영양가 없는 짓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하지만 바로 기가 죽을 수는 없었다.
"아이고! 어르신 ! 연세가 지극하신 분일줄 모르고 소녀가 실수를 했습니다"
"인생 경험이 미천한 어린 소녀의 짧은 소견이라 여기시고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 어르신!"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처연한 목소리로 용서를 구하는 청의녀의 사악하면서도 간절한 애원에 은성이는 순간 무 척 당황해 했다.
"누님! 왜 이러셔요! 제가 나이도 어린데 어르신이라뇨!"
"저 14살 밖에 안 먹었다고요"
손을 훼훼 흔들며 황급히 변명하는 은성이의 언행에 청의녀의 눈빛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하려는 순간 그만 주 변이 웃음 바다가 되어 버렸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주변의 상인들이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꼽을 잡 고 웃고 있는 것이다. 은성이의 얼굴에는 어리둥절함이, 그리고 조금 더 고난도로 은성이를 놀려 먹으려던 청 의녀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묻어 나왔다.
"하하! 사매! 그 장난끼는 우리 사형제 만으로는 부족한가 보지. 저 소형제 당황하는 것 좀 봐"
뚱뚱한 청의인 역시 다분히 장난끼가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제서야 은성이는 그가 청의녀에게 놀림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은성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욹으락 붉으락 해졌다. 그때 중년의 청의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사매 ! 저 잘생기고 의젓한 소형제가 어디가 꼬마 같다고 놀리고 그러는 거야 . 빨리 사과 하도록 해!"
청의녀는 단호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중년의 청의인을 흘끗 보고는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챘는지 은성 이에게 다가와 사과를 했다.
"미안 소형제! 소형제가 하도 이쁘게 생겨서 이 누나가 잠깐 장난 좀 쳐 본거야. 꼬마라는 말 사과할게. 됐지 ?"
은성이는 막 억울하고 분통하기도 하였지만 청의인과 청의녀가 의젓하다, 예쁘게 생겼다.라는 듣기 좋은 수식 어를 붙이고 또 직접 사과를 받고는 다소나마 기분이 풀려졌다.
"쳇 ! 알았어요. 당당한 대장부가 이깟 일에 꽁할라고요. 하지만 남자에게 예쁘다는 말이 뭐예요. 차라리 잘 생겼다고 하지..."
"그리고 나는 꼬마도, 소형제도 아니고 은성이란 말이예요"
"으응, 은성이구나! 이름도 잘 생겼네"
청의녀의 말에 은성이는 즉각 반격을 했다.
"아니! 이름이 잘 생겼다는 말은 또 뭐예요. 예쁘면 예쁘지..."
청의녀의 고난도의 술수에 다시금 당하는지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은성이는 상대방이 처 놓은 무지막지한 언어 진에 걸려 드는 줄도 모르고 나름대로의 회심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모두가 즐거운 순간이었다. 은성이는 나 름대로 반격을 했다는 즐거움, 청의녀는 순진한 은성이가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뒤돌아 말 먹이기가 성공한데 따른 즐거움, 그리고 이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 기타 주변인들 모두...
"은성아! 그런데 무슨 일로 계룡산을 넘어가... 어! 예쁜검이네...!? 그러고 보니 은성이는 무술을 익혔나 보 구나. 사부가 누구야? 싸움은 잘해?"
생긴 것과는 달리 집중력이 떨어지는지 아니면 천성이 호들갑스러운지 매우 부산을 떠는 청의녀를 바라보며 은 성이는 짐짓 호기가 살아났다.
"그럼요. 제가 이검으로 우리 금아에게 먹일 물고기를 잡아 주었는데요. 그리고 우리 사문은 유명한 동방파 예요. 들어는 봤죠?"
은성이는 자기 사문이 어느 정도 유명한지 알 수 없었기에 짐짓 뒤끝을 흐리며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었다. 청 의녀는 은성이가 상승 공부인 검기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았을 줄은 상상도 못하고 시냇가에서 검을 휘둘러 눈먼 물고기나 몇 마리 잡았으려니 생각하였지만 천성은 속일 수 없었다.
"이야! 은성이가 그 유명한 동방파의 제자구나, 동방파의 제자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음 역시 근골이 무 술을 익히기에 더할 나위없는 천생신골이네..!?"
하면서 은성이의 뺨을 꼬집어 보고, 어깨를 눌러 보고, 뒤돌아 엉덩이를 때려 보는 청의녀의 별로 여성스럽지 못한 행동에 처음에는 의기양양하던 은성이도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 차릴 수 있었다.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행동이었다. 은성이의 입가가 익살스럽게 앙 다물어지는 순간 은성이의 오른발이 왼 발 좌측에서 안쪽으로 조금 오므라 들었다. 그리고 이를 축으로 왼발이 좌로 돌면서 오른발의 뒤쪽으로 이동 하며 엉덩이를 뒤로 삐죽 내밀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청의녀의 몸이 앞쪽으로 쏠렸다. 은성이의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엉덩이 치기에 허벅지 를 맞고 마악 이동하려던 다리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일순간 청의녀의 신형이 낮아지는가 싶더니 양 발을 교묘하게 놀려 안정된 자세를 찾았다.
혹시라도... 하면서 은성이를 바라보는 자세로 착지한 청의녀는 실수로 얼떨결에 엉덩이에 부딪혔다는 듯이 미안해 하는 은성이를 보고는 몸에 확산된 긴장감을 풀었다.
하지만 청의녀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현재 청의녀의 무공 수준으로는 무술을 할 줄 모르는 꼬마가 아니라 숙 련된 무술가에게 일격을 당해도 그리 쉽게 몸의 균형이 무너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고수만이 일순간에 청의 녀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정도인 것이다. 하지만 은성이의 연령, 체격 및 분위기로 보아 절대로 은성이 는 청의녀가 상상 가능한 고수가 될 수가 없었다.
이상은 은성이가 홧김에 사조가 남긴 절세의 경신술 일시무시일중 변자결을 응용하여 펼친 결과였다.
화기애애한 주막에서의 회동이후 각자의 짐을 챙긴 일행은 대 계룡산 횡단을 감행하였다. 등산을 하면서도 은 성이 옆에 붙어 쉴새없이 나불대는 청의녀 덕분에 은성이는 금룡각 제자들의 신분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제일 앞에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며 걷는 홀쭉한 청의인의 이름은 경신이고 바로 뒤를 따르는 우람 한 근육맨의 이름은 경인, 그리고 금룡각 7대 제자인 자신들에게 무술을 가리키는 6대 제자이면서 강호에 소 문난 고수인 중년 청의인의 이름은 기진이었다. 쉴새없이 나불대는 입 때문에 살찔 걱정은 전혀 필요없을 청 의녀의 이름은 경묘이었다.
금룡각은 제자들 이름을 12지신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것 같았다. 자기가 토끼같이 예쁘고 귀엽게 생겨서 사부 님이 자기의 이름을 경묘로 지었다고 하지만 은성이가 생각하기에는 잘못 지은거 같았다.
알 낳은 후 '꼬꼬댁 꼬꼬꼬꼬, 꼬꼬댁 꼬꼬꼬꼬' 쉴새 없이 울어대는 암탉을 연상하고는 차라리 경유로 짓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은성이와 경묘에게서 서너 발자국 뒤에서는 무거운 봇짐을 등에 진 상인 3명이 뒤따르고 있었다. 산길이라 험 하고 등에 무거운 짐까지 지었는데도 모두들 익숙해졌는지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가며 잘 따라오고 있었다.
산길은 점점 더 험준해졌다. 가파른 벼랑을 끼고 돌기도 하고 천장 절벽 사이의 외길도 지나야 했다. 점점 더 들어가자 안개가 자욱이 끼여 일행의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금룡각의 제자들은 뒤따르는 은성이와 상인들을 생각해서인지 험하거나 안개가 낀 지형을 지날때면 보폭을 적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를 줄여 주었다.
일행이 안개에 덮힌 골짜기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은성이는 안개에 희미하게 독기운이 스며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깊은 산속에서 낙엽등이 몇 백년간 썩어 생 성된 장독인가 했지만 식물성 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독은 일행이 나아가는 방향에 따라 깊이 들어갈수록 서서히 짙어져 갔다. 은성이 다음으로 독기운을 알아차린 사람은 금룡각의 제자들이 아닌 상인들이었다.
은성이처럼 의학에 대한 지식이 많아서도 그리고 수련의 깊이가 심오해져서 주변 여건의 변화에 민감해서도 아니었다. 몸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머리가 띵해지고 다리가 무거워져 오자 뚱뚱한 상인이 조금만 쉬었다 가자고 말하더니 이침에 먹었던 음식을 게워내는 것이었다. 그러려니 했지만 일각도 안되어 다른 상인 한명도 음식물을 토하자 금룡각의 제자들이 경 각심을 가졌다.
"잠깐 ! 안개속에 독이 있는거 같다. 경인아! 피독단을 꺼내거라 !"
"예! 사형"
한덩치하는 경인이 뒤에 둘러멘 봇짐을 뒤적거려 조그마한 약 몇 알을 꺼냈다. 그리고는 상인들과 은성이, 그 리고 자기들 동료에게 한알씩 골고루 나눠 주는 것이었다. 약을 받자마자 바로 복용한 기진이 일행에게 말했 다.
"본각에서 특별히 제조된 피독단입니다. 빨리들 복용하십시오,"
말솜씨만큼이나 재빠른 동작으로 약을 입에 넣고 오몰조몰 씹던 경묘가 은성이가 걱정되었는지 은성이의 안색 을 살폈다. 하지만 은성이에게 중독된 이상 징후가 보이지 않고, 은성이가 전해준 약을 일별한후 냄새를 맡아 보고는 한 입에 삼켜 버리자 안심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은성이의 내공 조예로 봐서는 이 정도 독이 아니라 이보다 백배 정도 지독한 독이더라도 아무런 이상이 없을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사실 무림인들은 비상시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상비약들을 소지하고 다니었고 은성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은성이의 봇짐 속에는 아버지 신초금의가 직접 연단한 각종 상비약들이 특히나 많이 있었다. 하지만 상인들이 이상 증세를 보였을 때 대처하는 속도가 경험이 풍부한 금룡각의 기진보다 조금 늦었으며 금룡각의 피독단 도 약효가 우수해 보여서 굳이 자신의 봇짐을 열지는 않았던 것이다.
피독주를 섭취한 일행이 앞으로 조금 나아 갔을때 앞장 선 경신의 입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 왔다.
"휴..."
멍하니 앞만 보며 서있는 경신에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간 뚱뚱한 상인에게서도 비슷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휴..."
골짜기를 넘어야 하는데 안개가 골짜기를 꽉 메워서 골이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얼마나 넓은지 통 가늠할 수 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머뭇거린다고 계룡산이 그냥 넘어지는 것은 아닌지라 일행은 계곡 아래로 내려가 기 시작했다. 은성이는 안개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독기가 더욱 짙어져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개속을 헤치고 길을 가다가 이상한 예감에 은성이가 앞쪽의 풀숲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풀속에서 작은 흑 영 하나가 튀어 나왔다. 그것은 일행의 제일 앞쪽에서 초병 노릇을 하며 전진하던 금룡각 경신의 하체로 번뜩 였다.
"챙"
"조심해"
하는 기진의 외침소리 보다도 더욱 빠르게 경신의 손에서 흰색 금속이 발사되었다. 하지만 흑영이 잠시 흐릿 한 그림자를 형성하자 경신의 손에서 발사된 암기는 빗나가고 말았다. 아니 빗나간 것이 아니라 흑영이 몸을 틀어 피해간 것이다. 그런데 빗나간 암기가 경신의 손짓에 따라 더 빠르게 뒤로 이동해 가며 재차 흑영에게 달려 들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그래서 더욱 피할 도리가 없는 공격 이었다. 그렇지만 작은 흑영은 인간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흑영은 흐릿한 그림자를 남기며 경신의 암기를 피 해낸 것이다. 그리고 경신의 종아리를 물고 다시 풀속으로 몸을 이동하였다. 어느새 달려 왔는지 백광을 번쩍 이며 쳐낸 기진의 검이 날카롭게 흑영을 갈랐다.
"깡"
예상과는 달리 쇠와 쇠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흑영은 검에 밀려 풀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경묘가 손에 검을 빼어 들고 흑영이 떨어진 장소에 빠르게 도착하여 흑영의 정체를 파악해 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흑영이 떨어진 장소에는 약간의 핏자국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뒤이어 도착한 기진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의 애검 한백은 그가 금룡각의 제자가 되어 공을 세운후 장문인에게서 공을 치하받은 후 사마를 척결하라고 물려주신 이래 지금까지 한번의 실수도 없었던 것이다.
날카롭기가 쇠조차도 절단할 정도의 사문의 보물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무공 실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전개한 내력으로 판단하건데 눈앞에는 당연히 두 조각난 흑영의 사체가 있어야 했던 것 이다. 하지만 눈앞에는 아주 소량의 핏자국 밖에 없는 것이다.
그보다 더욱 문제는 그 작은 흑영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로지 묵빛 잔영만이 보였다는 것 이다. 사문에서 오각을 키우기 위해 특별 훈련을 거친 자신이 아니던가. 아무리 안개가 자욱했다고 하더라도...
은성이는 흑영이 사라지자 경신에게로 달려갔다. 사실 은성이는 일행중에서 흑영의 존재를 제일 먼저 눈치 챘 었다. 하지만 경고를 발하기도 전에 작은 흑영은 앞서 있는 경신에게 달려 들었다. 그후 경신의 손에서 암기 가 발사되고 기진이 바람처럼 경신에게 달려가 검을 쳐내는 것을 놀란 눈으로 바라 보기만 하였다.
한번도 실제 상황에서 검을 사용할 기회가 없었던 은성이인지라 숱한 비무와 실전으로 경험이 풍부한 기진처 럼 즉각적인 반응을 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단련된 눈은 작은 흑영의 정체를 파악해 낼 수 있었고 작은 흑영이 나타났다 사라진 직후 사태의 심각성을 가장 빠르게 판단하고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경신에게 빠르게 다가간 은성이가 경고도 없이 경신의 혈도를 짚어 버렸던 것이다. 무방비 상태에서 은성이에 게 혈도를 짚힌 경신의 어처구니 없어하는 멍한 눈길을 무시하고 재빠르게 경신을 눕힌 은성이는 경신의 오른 쪽 종아리의 3개 혈도를 눈부신 속도로 점해 버렸다.
그리고는 등뒤에 있는 봇짐을 열고 내의를 꺼내 찟어서 혈도를 점한 종아리 윗 부분을 강하게 묶어 버렸다.
이어서 봇짐에 있던 녹색 곽을 열고 알약 두 개를 꺼내 하나는 경신의 입에 넣어 주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입 에 털어 넣은 후 은색으로 반짝이는 작은 소검을 꺼내 들어 경신의 오른쪽 종아리를 날카롭게 십자로 쨌다.
"윽"
경신의 날카로운 신음소리에 어느새 경신의 곁에 다가왔던 경묘가 이를 악물었고 주위를 경계하는 경인과 아 직도 풀숲에 남아있는 혈흔을 보며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기진의 시선이 은성이에게로 향해졌다.
은색 소도가 낸 혈흔에 입을 댄후 피를 빠는 은성이를 보고는 기진은 경신에게 독수를 가한 흑영의 정체를 짐 작할 수 있었다.
뱀 종류일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어떤 뱀이 자신에게 형체를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름을 가지고 자신의 애검 한백의 날카로움을 막아낼 수가 있단 말인가. 다시금 기진의 고개가 좌우로 천천히 흔들려졌다.
경신의 종아리에서 빨았던 피를 뱉어 내던 은성이는 심각한 얼굴로 종아리 위 부분의 혈도 몇 개를 추가로 점 했다. 은성이가 뱉어 낸 검은 독혈은 땅에 뱉어지기가 무섭게 주변에 있는 풀들을 누렇게 말라 죽여 버렸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던 독혈의 검은색이 서서히 옅어져 갔지만 아직도 선홍색에 가깝지는 않았다. 경신의 오른 쪽 종아리는 부기로 인해 왼쪽 종아리의 두배로 부풀어 올라 있었으며 검은 색을 띄고 있었다.
찟어진 내의 조각으로 다시금 묶인 부위 바로 위쪽을 묶은 은성이의 눈이 기진에게 향했다.
"들 것을 준비해 주십시오"
"은성아 ! 괜찮겠니?"
걱정스러운 듯이 울먹이는 말투로 경묘가 말했다.
"예! 일단 응급 조치로 생명의 위험은 넘긴 것 같아요."
"워낙 독이 지독해 치료할 약초를 구하지 못하면 한쪽 다리를 ..."
봇짐에서 물을 꺼내 입안을 행군 은성이는 다시금 녹색 곽에서 알약 한 개를 꺼내 의깬뒤 경신의 상처 부위에 발라주고 싸매 주었다. 그사이에 경인이 어느새 주변의 나무를 잘라 상인들이 여벌로 가지고 있던 옷가지를 모아 들것을 마련 하였다.
경인은 들것에 조심스럽게 경신을 들어 올려 놓고는 젊은 상인 한명과 같이 앞뒤로 경신을 들었다. 젊은 상인 은 자신의 봇짐에 있는 물건을 다른 상인 두명에게 조금씩 나누어 자신의 봇짐을 가볍게 하고는 들것의 뒤에 서 경신을 들었다. 산길이 워낙 좁아 검을 빼어 든 경묘가 앞장을 서고 다음은 은성이 그리고 들것을 든 두 사람에 이어 상인 두명이 따르고 제일 뒤에 역시 검을 빼어 든 기진이 일행의 후미를 담당하였다.
모두들 감각을 최대한 돋우고 길가의 풀숲들을 특히 경계하며 나아갔는데 은성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금 전 같이 일행에 위해를 가할 존재를 발견하고도 대처가 늦어 일행에 불행이 닥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했다.
주변의 미세한 기척이라도 파악하기 위해 전신의 감각을 모두 열어 놓은체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