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정허무검-2화 (2/152)
  • ■ 제 2장 : 채약

    의가에서는 환자들을 위하여 수많은 약재를 비축해 놓아야만 한다. 그 중의 일부는 직접 채약해야 하는 것도 있다. 약재들은 종류가 많을 뿐 아니라 그 많은 종류 만큼이나 채약의 시기가 각양각색이다. 어떤 약초는 그 사는 장소를 가릴뿐만 아니라 그 채집 시기에 따라서 그 약효가 판이하다. 오늘은 음력 정월 15일로 1년중 음 기가 가장 성한 날이다.

    은성이는 약재 채취를 위한 야간 산행을 하기 위하여 행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록 보름달이 밝게 비춰준다 고는 하지만 미륵산 깊숙한 곳은 아직도 원시림이 무성한 곳이 많고 채약을 하기 위해 의가에서 표식을 남겨 둔 곳을 제외하고는 길을 잃기가 쉬운 곳이다.

    그래서 의가 사람들은 야간 산행시에는 눈에 띄기 쉽도록 모두 흰 옷을 입는다. 은성이도 흰 옷에 가죽신을 신고 맹수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해 허리에는 그의 애검 청은검을 찼다. 청은검은 그의 사부 자운검이 그에게 사제 관계를 맺으며 하사한 것이다.

    검을 갈무리한 은성이는 망태를 두르고 의가 앞 마당으로 나갔다. 의가 앞마당에는 채약을 위해 만반의 준비 를 마친 정집사와 채약사 3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채약사들은 모두 초금의가에서 어렸을 때부터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은성이는 가끔씩 채약사들과 함께 채약을 위한 산행을 하여 보았었지만 이렇게 밤에 채약을 하러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채약사들도 험한 미륵산의 지세와 맹수들의 습격에 대비하여 대부분 낮에 무리를 지어 채약을 하 였다. 그러나 1년중 오늘 단 하루, 그것도 밤이 되어서 채집하여야만 약효가 탁월한 약초가 있었다.

    "도련님 가시지요!"

    역시 흰 옷에 망태를 두른 정집사가 밤이라 위험하다고 말렸으나 한사코 따라 나서겠다는 은성이에게 말하며 먼저 발을 떼었다.

    '미륵산 자운곡'

    항상 자색 운무에 뒤덮여 있으며 사시사철 깊은 운무가 흐트러지지 않아서 미륵산의 3대 험지이자 미륵산 7대 절경중의 한 곳이다. 하지만 자운곡 주변에는 특이한 약초가 많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비록 위험하지만 채약 인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자운곡 주변에서 채약하는 것으로 그쳤는데 이는 자운곡을 둘러싼 자색 운무가 인체에 치명적 인 독무이며 또한 자운곡에 얽힌 무서운 전설 때문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자운곡에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살고 있으며 이 괴물이 생김새도 무섭지만 사납고 잔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지금까지 곡내에 들어간 사람치고 살아서 나온 사람이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씩 만월이 빛을 발하면 자운곡 내에서 소름이 돋을만치 무서운 괴음이 들려 온다는 것이었다.

    자운곡에 도착한 것은 자시 초입(23 : 00시)이었다. 일행은 자운곡에 도착한 후 잠시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는 곧 자운곡 주변을 탐색하며 채약을 시작했다.

    일행은 매우 정성스럽게 앞으로 전진하며 망태기 안을 채워 나갔지만 자색연기가 엉기어 있는 자운곡 안쪽으 로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마치 시선만으로도 자운곡 안에 서린 저주가 옮겨 붙을까 저어되는 것 같았다.

    은성이는 음기와 독기가 한데 어우러진 곳에서만 자생한다는 백화자지초 한 뿌리를 웅덩이 근처에서 캔 후 허 리를 폈다. 이 약은 장독, 부인병 등에 특효가 있으나 그 희귀성 때문에 일반 약재상 등에서는 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약이지만 이 자운곡 내에서는 그래도 가끔씩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한 일년중 음기가 가장 강한 오늘이 아니면 채약을 해도 그 약효가 10분의 1 정도로 저하되는 특이 한 약초였다. 이미 그의 망태기의 삼분의 일 정도는 백화자지초 뿌리로 채워져 있었다.

    이 정도면 목표한 량은 채운 것이다. 워낙 희귀한 병에만 사용되고 또한 즉효가 발효되는 약이지만 희귀한 병 이니만큼 초금의가에서 필요로 하는 량도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 저만큼 떨어져 열심히 채약중인 정집사 와 세 채약사의 망태기를 눈가늠해 본 은성이는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에 느긋하게 주변 경관을 바라 보았다.

    3장쯤 떨어진 자운곡의 골짜기는 보름달이 훤히 비추는데도 불구하고 그 태고의 신비를 완벽하게 감싸안고 있 었다. 문득 은성이는 밤 공기속에 아주 희미하지만 형용키 어려운 향기가 묻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이는 그동안 은성이가 허무경을 수련하고 그의 사부의 당부대로 항상 오감이 깨어 있도록 유지시키는 연습을 하여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절대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엷 고 희미한 채취였다. 그 향기를 따라 자운곡과의 경계선인 절벽 끝 자락에 선 은성이는 지금 위치된 곳은 자 운곡의 다른 경계선 보다도 훨씬 가파른, 거의 직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향기는 자색 운무에 둘러싸인 절벽 아래쪽에서부터 발원되어 흘러 나오는 것 같았다. 향기가 흘러 나오는 절벽 아래쪽으로 시선을 모으던 은성이의 눈이 서서히 광채를 발휘하기 시작 하였다.

    사실 은성이는 허무경 상의 호흡을 수련한 후 시력이 매우 좋아져서 밤에도 사물을 식별할 수 있었다.

    자운곡의 자색 연기가 자운곡 내부를 전혀 볼 수 없도록 방해한다고는 하지만 그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 인들의 경우이지 은성이는 자색 연기 너머로 2장 정도는 희미하게 나마 관찰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은 성이가 마주하고 있는 자운곡은 그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추측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공이 돋구어진 시 선으로도 2장 이후는 전혀 바라볼 수가 없었다.

    만월이 천중에 거의 이르러 가는 시점이어서인지 대지의 음기는 이에 화답하려는 듯 자운곡의 운무를 더욱 짙 게 감싸 안았고 향기는 조금씩 더 짙어져 갔다.

    "정 아저씨"

    은성이는 무슨 결심을 한 듯 작지만 굳은 목소리로 정집사를 불렀다. 그러자 시선을 돌린 정집사가 절벽 끝 자락에 위험하게 서있는 은성이를 보고는 깜짝 놀란 듯 급히 다가왔다.

    "도련님 위험합니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

    정 집사의 만류에도 은성이는 움직일줄을 몰랐다.

    "아저씨! 저 밑에서 어떤 향기 같은거 올라 오는거 같지 않아요?"

    "아니! 무슨 향기가 난다고 그러셔요"

    "그리고 위험하니까 이쪽으로 좀 오세요"

    하면서 은성이를 절벽 끝자락에서 잡아 당기려고 했다. 정집사 입장에서는 은성이가 비록 소주인 이었지만 아 직은 어린지라 밖에 데리고 나온 이상 안전에 책임을 다해야만 했다. 초금의가의 독자로서 천금과 같은 은성 이의 안전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 책임은 말로만 끝맺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저씨, 저 밑에서 무슨 향기가 나는 것 같아요"

    "제가 내려가서 확인해 보고 오겠어요"

    그리고는 3명의 채약사가 가지고 다니는 밧줄을 달래서 하나로 잇는 것이었다. 몇 번을 만류하던 정 집사는 만류해도 듣지 않는 소주인의 왕고집에 이윽고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도련님, 이 계곡이 얼마나 깊은지 모르니 내려 가시다가 혹시나 이 밧줄이 짧다면 더 이상 모험하지 마시고 올라 오세요."

    "그리고 만약 짧지 않더라도 내려 가신 후 2각 안으로는 꼭 올라 오세요. "

    "올라 오실 때에는 밧줄을 아래쪽으로 당겨서 저희가 끌어 올릴 수 있는 신호를 주시고요"

    "알았어요, 아저씨"

    절벽가의 소나무에다.밧줄을 묶고는 그 나머지 부분의 길이를 가늠해 본 은성이는 밧줄의 길이가 약 20여장이 됨을 확인 하였다. 평상시에는 세찬 바람이 절벽 아래로부터 휘몰아쳐 오는 계곡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바 람도 잦고 조용하였다.

    정 집사의 권유로 밧줄의 제일 끝단을 몸에다 묶은 은성이는 피독단을 입에 문체 소나무에 묶이어 팽팽히 유 지되는 밧줄을 잡고 벼랑 아래로 몸을 직각으로 세운 체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오기 전부터 잔뜩 돋 구어진 내력으로 자색 운무를 투시할 듯 바라보며 밑으로 내려올수록 청아한 향기가 짙어졌다.

    15장이나 내려왔을까 드디어 청아한 향기가 흘러 나오는 장소를 찾을 수가 있었다.

    은성이가 있는 곳에서 1장쯤 옆으로 작은 동굴이 뚫려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 향기가 흘러 나오고 있는 것이 었다. 이를 확인한 은성이는 즉시 조금 튀어나온 암벽을 차고 옆으로 이동을 하여 그 동굴의 입구를 손으로 잡았다.

    동굴의 입구를 살펴본 은성이는 동굴이 약간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동굴은 좌우를 기준으로 좌측은 청색 을 띄는 암석으로 그리고 우측은 적색을 띄는 암석으로 정확히 이등분되어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동굴의 입구는 무엇인가에 의해 다소 파손되어 있었는데 청색 암석위로 희미하게 보이는 붉은 자욱은 핏자욱처럼 보 였다.

    동굴의 입구는 소인 한 명이 간신히 기어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동굴 입구의 핏자욱에 불안하였지만 그래도 한층 짙어진 향기의 진원지에 거의 접근하였다는 호기심에 은성이는 동굴 입구에 머리부터 서서히 몸을 들이 밀었다.

    5∼6자쯤 전진하자 동굴이 서서히 넓어져 10자쯤 되는 곳에서 부터는 비록 손바닥,발바닥으로 암벽을 짚어야 했지만 무릎을 구부리고 몸을 웅크린 채로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전진할수록 향기가 짙어졌는데 그 향기 만으로도 정신이 상쾌해지고 몸에 힘이 나는 것을 절로 느낄 수가 있을 정도였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던 은성이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동굴이 좁아 손바닥으로 땅을 짚으며 나아갔는데 왼 손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그리고 오른손에서는 뜨거운 기운이 느끼어 지는 것이 아닌가. 향기에 취해 주변 환 경이 변화되는 것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약간의 경각심을 느낀 은성이는 허무경에서 익힌 내공을 눈에 집중시키며 어둠에 싸인 동굴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내공이 눈에 집중되자 주변 경관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신비하게도 지금 은성이가 들어가고 있는 동굴은 굴 입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좌측은 청색 암석으로, 우측은 적색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중심부에는 황색의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청색과 적색의 암석이 매우 단단하면서 차갑고 따뜻한 기운을 발하는 반 면 정 중앙의 황색 암석은 동굴 입구에서부터 안으로 들어갈수록 조금씩 넓어지며 부드러워져 가는 것이었다.

    동굴의 끝 부분은 차갑고 따뜻한 기운이 어우러지며 휘돌고 있었고 차츰 부드러워진 황색 암석은 황금색 부드 러운 흙으로 변화되어 둥글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원형의 황금색 흙 중앙에 짙은 향기를 뿜어내는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잎새도 없는 작은 줄기에 꽃만 한 송이 피어 있었는데 꽃잎은 4잎 이었다.

    중심부가 황금색으로 물들여있는 가운데 백색, 묵색, 청색, 적색의 4잎이 달려 있는 꽃잎을 보면서 은성이는 문 득 오행에 관련된 색상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초금의가는 약초와 침술을 치료의 기본으로 삼고있는 의가이니만큼 약이 될 수 있는 풀, 꽃, 나무들에 대한 지식이 매우 해박하였다. 게다가 은성이는 서가에 있는 모든 의학서적들을 다 탐독하였는데 실로 약이 되지 않는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꽃 한송이가 없을 정도였다.

    산행을 하며 볼 수 있는 모든 풀, 꽃, 나무들이 모두 저마다의 독특한 약용 성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 한 가지라도 은성이가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한 송이의 꽃은 지금까지 한번 도 보지 못하였음은 물론 들어보지도,그리고 어떠한 책에 언급돼 있지도 않은 꽃이었다.

    '오행화' 라고나 이름을 붙일만한 이 꽃은 은성이의 눈앞에 더욱 더 짙은 향기를 뿜어내며 네 개의 꽃잎을 조 금 오무려 트렸다. 마치 술잔과 같은 모습이었다. 꽃잎 위 천장은 반구형이었는데 그 중앙에 그러니까 정확히 꽃잎 바로 위쪽에 조그마한 종유석이 뾰족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뾰족한 석순 끝에서 우유빛 액체 한 방울이 맺혀져 대롱거리고 있었다.

    대롱거리던 액체가 은성이의 눈앞에서 서서히 떨어져 내렸다. 액체는 정확히 술잔 모양으로 오무리고 있는 꽃 잎 속으로 떨어졌는데 그 순간 놀랍게도 꽃잎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인양 오무라드는 것이었다. 아마도 떨어진 우유빛의 액체가 조금이라도 꽃잎 밖으로 흘러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은성이는 바닥을 짚고 있던 양손으로 느껴져 오던 차갑고 따뜻한 기운들이 요동치는 것을 느 꼈다. 그리고 그 기운들이 요동치며 꽃잎이 자라고 있던 황금색 부드러운 흙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각쯤 지나자 더 이상 양손에 느껴지던 서로 상이한 기운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오무라들어 있던 꽃잎들에게 서 놀라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꽃잎들이 다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벌어진 꽃잎 사이에는 방금전 까지만 해도 없었던 엄지 손톱만한 작은 열매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열매는 연녹색에서 연자색으로 서서히 색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열매가 색을 변화 시킴에 따라 꽃잎들은 서서 히 말라 비틀어져 가기 시작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기 발랄하던 꽃잎들이 완전히 시들어 하나 둘 황금색 땅에 떨어질 때 열매는 진자색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그 열매에서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향기가 흘러 나왔다. 그 향기에 은성이는 엄청난 허기를 느꼈다. 평소 애써 수련했던 고요하며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마음도 그 허기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는지 동굴이 좁아서 허리를 굽히고 네발로 기는 은성이가 열매에 다가가는 것도, 그리고 입속으로 그 열매가 들어와서 목 구멍으로 넘어가는 데에도 스스로 이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뱃속으로 열매가 들어간 이후에는 자각할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뱃속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솟구쳐 올라 몸 이곳 저곳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갑자기 은성이의 몸 색깔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검정색, 파란색, 흰색, 붉은색으로 그리고 황금색으로 시시 각각 변화해가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몸속에서 요동치는 기운들을 제어하기 위해 엎드린 채로 급히 허무경 에서 익힌 내공심법을 운용해 내부의 기운들을 조정하던 은성이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기운들에 마침내 혼 절하고 말았다.

    하지만 혼절한 은성이의 몸 색깔은 그래도 계속 변화되었고 은성이의 몸도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은성이의 몸 이 청색으로 변화될때에는 뼈를 얼릴듯한 냉기가 그리고 붉은 색으로 변화될때에는 뼈를 태울듯한 열기가 몸 에서 흘러나와 은성이의 머리카락은 물론 입고있던 옷과 심지어는 몸을 묶고 있던 밧줄까지도 태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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