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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21화 (121/121)
  • 121화

    “그래서……. 살바토르로 가서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그 뒤로도 거기서 지내고?”

    “그래. 살기 좋은 곳이더라, 살바토르. 공기 좋고, 한적하고.”

    그렇게 대답한 티스베가 미소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은 상대, 킬리안은 영 마뜩찮다는 표정이었지만.

    “너는 수도 귀족이야. 살바토르까지 갈 필요가 있나? 성녀의 결혼이라면 모든 귀족들이 참석하고 싶어 줄을 댈 텐데.”

    “그러니 더더욱 살바토르로 갈 거야. 거기라면 사람들도 잘 안 오겠지. 적당히 살바토르의 영주에게 어울리는 규모로 식을 열 거야.”

    “왜? 네 일이니 신전에서도, 황실에서도 얼마든지 지원해 줄 텐데. 원한다면 황실의 가장 큰 홀을 빌릴 수도 있을 테고.”

    “필요 없어. 평생 누릴 사치는 지난 세월에 다 누리고 살았으니까.”

    킬리안은 그 밖에도 티스베가 수도에 있으면 얼마나 호화롭고 명예롭게 지낼 수 있는지를 말했지만, 티스베의 태도는 산뜻했다.

    “유명한 건 이제 지겨워. 사람들의 이목도. 내가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에스텔이 조금 더 주목을 받겠지. 지금도 신전에서 무척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며?”

    “그렇지. 덕분에 마물에 대한 연구 진척도가 부쩍 늘었어. 아마 조금 더 진척이 되면 몇몇 마물들을 도시로 들이는 것도 검토해 볼 예정이고.”

    “에스텔이 좋아하겠네. 네가 많이 도와줘.”

    “굳이 그러지 않아도 도와줄 거다. 내게도 필요한 일이니까.”

    마물이 각기 다른 이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활용 가치가 무궁무진했다.

    여태 미지의 존재였던 마물과 소통해, 공존할 방법이 있다면 분명 서로에게 좋은 일이리라.

    덕분에 성녀 실종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부터 벌써 한 달 째.

    에스텔은 신전으로, 황실로 뛰어다니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사이 사람들 사이에서 에스텔의 인지도가 부쩍 뛰었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티스베는 대외적으로는 줄곧 두문불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니, 신문사들의 관심이 에스텔에게로 쏠린 탓이다.

    그 틈을 타 티스베는 수도에서 많은 것들을 정리했다.

    지금 하는 이야기는 이미 여러 번 입 밖에 낸 이야기였다.

    할아버지인 알마스와도, 마흘론과 에스텔에게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아온 것이 킬리안이었다.

    살바토르로 가서 결혼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 모두들 하는 이야기는 비슷했다.

    -결혼이야 네가 내키는 대로 할 일이다만. 수도에서 작위 승계를 조금 더 준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조디악의 살바토르 지부를 본부로 써야겠군요. 아가씨가 가시는데 제가 어떻게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살바토르로 가시면 자주 뵙지 못할 텐데……. 아쉬워요. 수도에 자주 놀러 오실 거죠?

    애석하게도 티스베는 모두의 만류를 거절했다.

    킬리안의 권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바토르는 아직 내가 칼릭스트 공녀인 걸 모르는 상태거든? 결혼 전 몇 달 정도는 그렇게 지낼 거야. 그런 삶을 원했었거든. 알잖아.”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무도 자신을 성녀라고 부르지 않는 삶.

    “뭐, 그 삶이 내키면 조금 더 오래 그렇게 지낼 수도 있겠지. 언젠가는 밝히겠지만.”

    “신분을 숨기는 걸 원한다면 새 신분을 하나 만들어 줄 수도 있다만.”

    킬리안의 이름으로 허울뿐인 작위를 하나 내려 주면 새 신분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신분을 조작한 것도 아니니 딱히 속이는 것도 아니고.

    꽤 괜찮은 제안이었지만, 티스베는 픽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것도 아주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닌데, 괜찮아.”

    “왜 마음이 변한 거지?”

    “소어가 날 성녀님이라고 부르는 걸 좋아하거든.”

    그 말에 킬리안의 표정이 미묘하게 썩어들어갔지만, 티스베는 아랑곳하지 않고 활짝 웃었다.

    “얼마나 귀여운지 알아? 날 무슨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본다니까?”

    “……귀여운 건 모르겠고 네 말이 역한 건 알겠으니 그만둬.”

    “아하하!”

    티스베가 높은 웃음을 터트리며 느슨하게 꼰 다리 위로 턱을 괴었다.

    창밖을 향하는 시선에는 어젯밤에도 본 얼굴이 덧그려지고 있었다.

    -줄곧…… 당신께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습니다.

    -경애하는 나의 성녀님.

    나의 티스베.

    그는 ‘나의’를 발음할 때마다 미세하게 목소리를 떨었다.

    그러나 소어가 떠는 순간은 비단 그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을 마주칠 때면 늘 설렘이 그의 시선을 이지러지게 만들었고, 손을 맞잡는 순간에도 주저가 따랐다.

    입술을 겹치고 맨 살갗에 낯을 묻는 순간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토록 맹목적이고 열렬한 애정은 간혹 티스베마저도 숨을 막히게 했다.

    입맞춤 한 번 없이 호흡을 빼앗긴다는 것은 아마도 그런 느낌이겠지.

    고작 눈 맞춤 한 번만으로도 사랑받는 기분을 들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대체 누가 그 깊은 애정을 흉내 낼 수 있을까.

    눈먼 신도나 다를 바 없는 소어의 앞에서, 티스베는 더는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

    이토록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명백한 사람 앞에서 무엇을 더 조심할 필요가 있을까?

    하물며 제가 재앙이 된다고 해도 사랑한다는데.

    무슨 생각에선지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는 티스베의 시선이 길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창밖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삶을 찾은 기분이야.”

    마음 놓고 누군가를 사랑해도 괜찮은 삶.

    상대방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

    남부러울 만한 것들을 모조리 가지고서도 언젠가는 제 것이 아니게 될 거라며 차마 손 한 번 뻗지 못하던 시간은 이제 끝이 났다.

    누군가를 마음에 들이는 것조차 두려워 강박적으로 밀어내던 시간 또한.

    소금으로 쌓은 성은 소나기 한 번에 모두 녹아 버렸다.

    그러니 이제 그 위에 새로운 성을 쌓을 차례다.

    그 무엇으로도 무너지지 않을, 아주 견고한 성을.

    * * *

    뭔가 이상하다.

    그것은 여기가 시간이 돌아간 이후의 세상이며, 자신은 성녀로서 재앙에 대항하기 위해 탄생했다는 것을 알게 된 티스베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 결론의 근거는, 다름 아닌 티스베의 손에 들린 신문이다.

    살바토르 령에서 지낸 지 1년 째.

    티스베의 시선이 손에 들린 신문을 향했다. 귀족들의 가십을 모아 만든 일간 신문에는, 대문짝만하게 누군가의 결혼 소식이 이런 헤드라인으로 적혀 있었다.

    [’신의 선물’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 공녀, 살바토르 공작과 결혼 소식 발표]

    칼릭스트 공녀와 살바토르 공작의 결혼 소식.

    대단히 어마어마한 내용이었지만, 티스베가 멈춘 이유는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티스베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대체 이게 뭐하는 상황이지?”

    “무엇이 말입니까?”

    “나보고 신의 선물이라니, 저게 대체 무슨 괴상한 호칭이에요?”

    “……아.”

    티스베의 곁에 있던 소어가 기사의 헤드라인을 보곤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의 사랑스러운 약혼녀, 아니, 부인은 아직 그녀에게 붙여진 별칭을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얼마 전 교황의 연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연설문에서 이교도들의 일을 언급하며 당신을 신의 선물이라고 지칭하는 내용이 있었다더군요.”

    그리고 그 이후의 일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터다.

    교황이 노골적으로 ‘신의 선물’이라며 티스베에 대한 친애를 표현했으니, 온갖 신문사에서 이를 두고 떠들어 댔으리라.

    단지 티스베는 살바토르에서 지내는 내내 바깥소식을 썩 궁금해하지 않았기에 굳이 알려 주지 않았을 뿐이다.

    만약 그들의 결혼 소식 발표만 아니었더라도 그 상태는 조금 더 오래 유지되었으리라.

    결혼 소식 발표에 대한 기사를 보겠다며 길거리를 지나다 신문을 한 장 사 든 것이 화근이었으니까.

    티스베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좀 잠잠했던 사이에 이런 일이…….”

    “내키지 않으십니까? 신문사들에 연락을 취할까요.”

    소어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걱정과 달리, 티스베는 곧 신문을 쓰레기통에 휙 버리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됐어요. 나쁜 말 한 것도 아닌데요, 뭐. 그냥 웃기지 않아요? 딱 1년 전에 여기에 내가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망 사고들이 잔뜩-”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신문사에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왜요? 그냥 두라니까. 아하하!”

    “……가끔 티스베의 진심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난 재밌던데요. 놀리는 맛이 있어. 매번 얼굴 붉히는 것도 귀엽고요.”

    티스베가 잔웃음을 흘리며 소어의 손을 잡고 길을 걸었다.

    소어는 티스베의 놀림에도 원망 한 번 없이 마냥 사랑스럽다는 눈을 할 따름이었다.

    봄이 찾아와도 녹지 않는 얼음으로 뒤덮인 견고한 성.

    이제는 행복조차 흔한 것이 되어 버린 풍경의 한 장면이었다.

    <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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