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소어는 언제나 티스베의 편이었다.
어떻게 그가 그녀를 강제할 수 있겠는가?
설령 티스베가 소어 앞에서 죽음을 택한다면, 소어는 차마 그녀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피눈물을 흘리며 티스베의 임종을 지키고 본인도 죽음을 택하면 또 몰라도.
게다가, 보름 만에 깨어난 티스베에게는 내상이 하나도 없었다.
“이상하죠? 분명 내상이 그렇게 심했는데 말이에요.”
“피를…… 많이 흘리셨다고도 들었습니다.”
“지하에서 탈출하기 직전에는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니까요.”
분명 이교도들의 근거지에 있을 때는 그랬다.
그러나 땅 위로 올라오자마자, 내상의 통증과는 별개로 티스베는 온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마 다른 성좌들의 가호가 있었던 게 아닐까.
어쩌면 지난번 열병을 앓았을 때처럼 성좌들이 무언가 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덕분에 티스베는 자신을 내보낼 수 없다는 알마스의 말에, 일찍 자겠다고 말하곤 문을 잠그고 물고기자리를 불러냈다.
그 뒤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내상도 없고, 심지어 기절하기 전보다 마나를 다루는 것도 훨씬 자유로워졌다.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티스베는 수도의 살바토르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우는 누군가를 달래 주어야 했고 말이다.
지금 소어가 빗을 들고 있는 이유 또한 그와 일맥상통했다.
티스베를 끌어안고 좀처럼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그를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문득 티스베의 머릿속에 일전 소어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던 것이다.
-소어, 결혼하면 해 보고 싶었던 거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결혼 생활에 로망 같은 것도 있다던데.
-…….
-……내가 혹시 실례되는 질문을 했나요?
-그, 그런 게 아닙니다. 단지…… 티스베가 껄끄러우실까 봐.
대체 무슨 로망이 있길래 그렇게 주저하나 싶었는데.
-티스베의 시중을 들고 싶습니다. 옷 입는 것부터 머리를 빗고, 식사하는 것까지 전부……. 역시 이런 말은 조금 그렇겠지요.
그녀의 약혼자가 가진 욕망은 아주 사소하고도 집요했다.
그 말 이후에 소어는 티스베의 하녀가 되고 싶었다고도 고백했다.
얼굴을 아주 빨갛게 물들여 가면서.
그래서 티스베는 우는 소어의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머, 머리! 머리 빗겨 줘요!”
라고.
다소 맥락 없는 요청이었으나 소어의 눈물을 멎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이런 때를 기다린 건지, 아니면 티스베 생각에 사 둔 건지.
소어는 훌쩍이며 티스베를 화장대 앞에 앉히곤 다양한 종류의 빗과 향유를 꺼내와 머리를 빗어 주었다.
아프지 않게 머리칼을 촘촘하게 빗어 내리는 손길은 몹시 섬세했다.
연습이라도 한 걸까?
의문했을 즈음 소어가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저택에서 쉬셔도 좋았을 텐데. 이렇게 오셔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걱정이 들면 아까 돌려보내지 그랬어요.”
“당신께서 절 찾아 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그 발걸음을 실망시키겠습니까.”
그럴 수도 없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티스베가 사라진 시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소어는 한 순간도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이런 주제에 어떻게 티스베를 보내 주겠다고 마음먹었던 건지.’
정말 우습기 짝이 없는 꼴이었으나 달리 별수가 있나.
티스베가 사라졌다는 사실 하나에 소어는 그대로 이성을 잃었다.
만일 칼릭스트 공작, 알마스가 서둘러 살바토르로 와서 그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소어는 분명 지쳐 쓰러질 때까지 설산을 헤집고 다녔을 것이다.
오죽 제정신이 아니었으면 밤중에 홀린 듯이 나비 하나를 쫓아갔겠는가.
소어는 티스베의 일에서만큼은 제정신 아닌 제 근본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이교도들…… 광신도들은 모두 죽었지.’
하지만 여기에 제일 제정신 아닌 광신도가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만약 이교도들에 의해 티스베가 재앙이 된다면, 그녀를 제일 먼저 숭배하려 들 사람은 소어인데 말이다.
이윽고 티스베의 머리가 모두 가지런히 등 뒤로 내려앉았다.
소어는 빗을 내려놓고 그녀의 머리칼에 입술을 묻으며 속삭였다.
“언제든 오셔도 좋습니다. 상냥한 당신 덕분에 제가 창문 아래를 서성일 일이 줄었군요.”
“내가 보고 싶었어요, 소어?”
“저는 당신이 눈앞에 없는 모든 순간 당신을 그립니다.”
소어의 맹목적인 말들은 늘 티스베에게 묘한 감각을 남겼다.
이렇게나 열렬한, 듣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말을 하면서 어떻게 말투는 이토록 차분할까.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듣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소어에게는 이게 너무 당연한 말이라서.’
티스베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는 것이 그다지 새삼스러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이런 마음을, 그리고 이런 생각들을 되새기며 살고 있으니까.
낙엽 떨어지는 것을 부끄럽게 말하는 이가 없듯 소어 또한 그러했다.
“당신을 생각하면 늘 제정신 아닌 자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사랑과 광기는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소어는 티스베의 어깨선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그녀는 거울로 제게 아스라이 사랑을 속삭이는 제 약혼자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몸을 틀어 그를 끌어안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팔을 벌려 소어의 어깨를 끌어안으려 했고, 소어는 순순히 상체를 숙여 품을 내어 주며 그녀를 안아든 것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티스베는 소어의 품에 매달려 달랑 들린 제 발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억하기로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티스베는 땅에서 발을 떼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그녀를 이런 식으로 안아 들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무조건적인 애정은 티스베에게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을 선사했다.
그래, 마차에 날계란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던져대던 그때로.
티스베는 소어의 두 뺨을 제 손으로 감싼 채 시선을 맞추었다.
“소어, 내가 이번에 납치를 당했잖아요. 눈을 떴을 때 무슨 생각을 한 줄 알아요?”
“……죄송하지만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당신이랑 키스만 한 게 미치게 아깝더라고요.”
“아, 그렇…… 네?”
소어의 벽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졌지만, 티스베는 태연했다.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내가 너무 안일했죠. 어떻게 키스만 했지? 연인 사이라면 응당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은데!”
“여, 연인 사이입니까?”
“연인 사이 아니에요? 소어, 나 안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다, 당연히…… 그 무엇보다도 사랑합니다.”
감싼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소어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몇 번이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티스베는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나도 사랑해요. 그럼 연인이지.”
“연인…….”
소어가 티스베의 말을 멍하니 따라했다. 마치 그 말만 들어도 배가 부른 사람처럼.
하지만 그건 소어의 입장이고.
티스베는 연인이라는 말 따위로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고작 손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는 것밖에 안 했는데 잡혀 가서 그대로 죽어 버렸으면 어떡해요? 아깝잖아요.”
“주, 죽는 건 안 됩니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니까요.”
그러니까 요지는, 아까울 일 없게 미리미리 해놓자는 거다.
그것이 티스베가 그 사달을 겪으며 얻은 교훈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뜨자마자 소어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한 이유이기도 하고.
“당신도, 나도, 한 번쯤은 욕망에 솔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티스베가 소어에게 가볍게 입 맞추며 속삭이자, 소어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 말씀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후회도 해 본 사람이 하는 거죠. 소어는 어느 쪽이 좋아요?”
해보고 후회하는 거랑, 안 해 보고 후회하는 것 중.
“어느 쪽이든 후회하는 거 아닙니까? 선택지를 바꿔 주십시오.”
“아, 이것도 있네요. 해 보고 나서 진작 할걸, 후회하기.”
“티스베는 어느 쪽이십니까?”
“흐음. 질문이 잘못됐는데요.”
난 인생에 후회 같은 건 안 하는 성미라서.
티스베가 그렇게 말하며 샐쭉 웃었다.
그런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듯, 따라 웃은 소어가 티스베를 안아 침대로 향했다.
티스베는 다시 한번, 나오기 전 방문을 잠근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