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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19화 (119/121)

119화

셰일로의 얼음 호수 밑바닥에 이교도들의 근거지가 숨겨져 있었으며, 성녀들의 활약으로 이를 일망타진했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제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

어딜 가나 가장 먼저 들려오는 것은 역시 티스베의 이름이었다.

“칼릭스트 공녀님의 눈짓 하나에 벼락이 치고 천둥이 쳤다더라니까!”

“이 사람 허풍이 심하군. 성녀님 혼자 어떻게 그걸 다 하나? 게다가 피도 흘리고 있었다면서.”

“정말이라니까? 내 사돈의 팔촌의 처남이 그 자리에 있었대도! 성녀님이 손을 한 번 내저으니 무슨 결계라도 있는 것처럼 다가갈 수가 없었고, 빛이 번쩍이더니 그게 전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고! 정신을 차려 보니 그 커다란 구덩이 안에 공녀님 혼자만 있었다더구먼.”

대부분의 사람들은 퍼져 나온 이야기를 믿지 않았지만, 티스베의 활약이 담긴 영상구 때문에 그녀의 무용담을 신봉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어쨌든 이 일에 연루되지 않은 이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신문에 크게 찍혀 나오는 이교도들의 처형 소식이 전부였으니, 아마도 의견은 앞으로도 분분할 터였다.

티스베는 그날 이후 보름 정도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살바토르 성이 아니었다.

익숙한 천장. 익숙한 침대.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내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살바토르까지 오셨었다는 거지?”

“그렇다니까요.”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한 건 너고, 마흘론.”

“잘했죠?”

붉은 꽁지머리의 청년이 티스베의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빙글 웃었다.

얄밉게 싱글거리는 눈은 펑펑 운 탓에 이미 부을 대로 부은 채였다.

저 얼굴을 보고 무슨 말을 더 하랴.

“……그래, 잘했어.”

눈을 떴다 감았을 뿐인데 티스베가 잠든 사이 세상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납치당했을 때부터를 세야 할지도 모른다.

바뀌기 시작한 건 그 즈음부터였으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카리의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거짓말이었다.

티스베가 이교도들의 근거지에서 납치당한 시간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고, 소어는 조금도 위험하지 않았다.

그러니 만약 티스베가 자카리에게 신문 기사를 가져오라고 했더라도 조작된 기사를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물론 소어에게 성녀가 둘이나 실종된 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 못한 까닭은 간단했다.

티스베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한 소어가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그녀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펜던트 덕분에 아가씨께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금방 알아챘으니 다행 아닙니까.”

“그래, 이번에는 정말 신세를 졌네.”

이교도들은 수상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는 티스베의 펜던트를 숲 어딘가에다 던져 버렸다.

그러나 그 펜던트는 티스베의 몸에서 일정 이상 떨어지면 자동으로 해체되어 마흘론의 그림자로 돌아가게끔 되어 있었고, 덕분에 마흘론은 해가 뜨기도 전에 티스베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곧장 살바토르 성과 칼릭스트 공작저에 연락을 취해 수색대를 꾸리게 한 것이다.

“덕분에 제가 아가씨의 오랜 종복이라는 건 더 숨기지 못했습니다. 그걸 설명하지 않고는 도저히 아가씨가 사라졌다는 걸 설명할 방법이 없더라고요?”

티스베의 비밀 신분을 만천하에 까발린 주제에 마흘론은 뻔뻔하게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에스텔이 보낸 눈나비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었다.

“살바토르 공작님이 밤중에 어디론가 홀린 듯이 나가시기에 저는 드디어 미쳤나 했지요. 그게 에스텔 양이 보낸 구조 신호였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눈나비가 호수로 소어를 이끌어 준 덕분에 수색대가 제때 도착할 수 있었고, 뱀주인자리의 문제를 해결한 이후 기절한 티스베를 곧장 옮기고 이교도들을 처리할 수도 있었다.

이교도들은 신전에서 종교 재판을 받았으며, 티스베가 기절한 사이 성서의 규율대로 처벌을 받았다.

“대대로 이단에게는 화형이 어울리는 법이지요. 덕분에 광장이 한동안 따뜻했습니다.”

마흘론은 그걸로는 부족하다며, 더 고통스럽게 죽였어야 한다는 말을 하며 씩씩거렸다.

하지만 티스베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자신이 알지 못한 사이 일어난 일들로 머리가 어지러웠던 까닭은 아니었다.

그저 문득, 감회가 새로웠다.

제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이렇게나 동요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내가 깨어났을 때, 할아버지도 다녀가셨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빤히 보여서 조금 우스울 지경이었다.

에스텔은 티스베를 위해 매일 꽃다발을 직접 가져다주러 공작저에 방문했고.

마흘론은 어차피 신분도 밝혔겠다, 티스베가 누워 있는 내내 그녀의 곁을 지켰다고 했다.

킬리안은 지위가 지위이니 이들처럼 매일 올 수 없는 대신 매일 편지를 보내고, 이교도들의 처형이 속전속결로 진행되게끔 손을 썼다고도.

그 모든 것이 티스베에게는 소슬한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과거의 기억이 생생하니까.’

매몰차게 버려져 죽었던 티스베는 더 이상 책 속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처절한 비명을 기억했다. 모두에게 악녀라고 매도당하고, 비탄에 젖어 울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그때를.

그래서 이번에도, 과거에도 오직 소어만이 자신을 진심으로 위할 거라고 믿었는데.

“……마흘론. 사실 나는 널 가깝게 두면서도 네가 날 언제든 떠날 거라고 생각했어.”

에스텔에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억을 얘기했으면서, 마흘론에게 하지 못한 이유 또한 같았다.

그들은 주종관계였고, 마흘론이 어엿한 조디악의 수장이 된 이상 계속 티스베의 종복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너는 나를 돕는 게 은혜를 갚는 거라고 했지. 하지만 빚은 언젠가는 청산이 되기 마련이거든. 그래서 나도 모르게 네가 나를 언젠가는 떠날 거라고 생각했나봐. 네가 날 도와주는 걸 늘 빚으로 생각했어.”

차고 넘치게 미안했고, 고마웠다.

하지만 눈을 처음 뜨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충혈된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마흘론을 보았을 때.

그리고 그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쉼 없이 교차하는 것을 느낀 순간.

티스베는 제가 가지고 있던 부채감이 얼마나 이기적인 마음이었는지 깨닫고 말았다.

만약 티스베가 마흘론을 정말로 가깝게 여겼더라면, 부채감이라는 말이 그들 사이에서 얼마나 의미를 잃는지도 금세 알았을 텐데.

티스베는 상처받기 싫다는 이유로 자신을 아끼는 이들에게서 계속 눈을 돌리고만 있었다.

과거와 현재는 같을 수 없는 건데도 말이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환영의 목소리가 울린다.

[너는 날 선택할 수밖에 없을 거야. 우리는 같은 증오를 공유하니까.]

티스베는 환영의 증오를 이해했다.

하지만 환영은 티스베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티스베가 어째서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토록 상처받고도 다시 사람들을 사랑하려 하는지.

‘어쩌면 과거의 나도 지금의 나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성장이란 본디 그런 법인 것을.

눈을 감으면 반 틈 열어 놓은 창으로 스민 봄볕이 뺨을 스치고 가는 것이 느껴진다.

사철 겨울인 북쪽에 다녀온 사이 창밖에는 목련이 만개해 있었다.

티스베는 그것에 시선을 두었다가, 눈을 돌려 침상 옆에 앉은 마흘론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또 우네, 마흘론.”

그날 오후에는 봄비가 내렸다.

비를 맞은 목련은 금세 썩어 문드러지며 땅에 떨어졌지만, 개화가 짧다고 하여 이듬해 같은 나무에 목련이 피어날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다.

삶이란 그런 것이므로.

* * *

“……래서, 비가 오니 오늘은 나갈 수 없다잖아요. 나는 내상 하나 없는데.”

티스베의 뾰로통한 목소리에, 그녀의 머리칼을 빗질해 주던 남자가 나직히 웃었다.

“너무 열내지 마십시오, 티스베. 누워 있던 시간이 길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였을 겁니다.”

“그럼 소어도 내가 집 안에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생각은, 예.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분명 당신이 보고 싶어서 당신의 창문 아래를 서성였겠거니.

소어가 덧붙이며 곱게 빗은 티스베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었다.

야심한 밤이 깊은 시각,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만남을 치르고야 만 연인이 있는 이곳은 살바토르 공작저.

만약 알마스나 마흘론, 하다못해 킬리안까지도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란히 뒷목을 잡고 뒤로 넘어갔겠지만.

모두에게 다행으로 이 만남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소어가 강경하게 티스베의 건강을 챙기는 이였더라면 또 모르겠으나.

“당신이 저를 이토록 만나고 싶어 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저를 들뜨게 하는지 모를 겁니다, 티스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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