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굉음이 남긴 것은 단순한 소음뿐만이 아니었다.
“뭐, 뭐야?”
“교단장님, 건물이 흔들립니다!”
글자 그대로 충격을 이기지 못해 건물이 흔들리고 있었다.
덕분에 당장 에스텔과 티스베를 태우고 뛰쳐나가려고 했던 궁수자리도 자리에 주춤거리며 물러서야 했고, 당장 공격을 개시하라고 외쳤던 자카리마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건물이 흔들린다고?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이곳은 호수 밑바닥에 어렵게 만든 은신처였다.
외부에서 찾기 힘든 것은 물론이거니와 호수 때문에 공격하기도 까다로운 입지를 점하고자 고른 것인데.
밖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설마.’
자카리의 머릿속에 불길한 가설이 스쳐지나간 순간.
“교, 교단장님!”
이교도 하나가 대치하고 있는 이들에게로 뛰어들어와 외쳤다.
“상황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외부에 폭격이 터졌다고 합니다!”
“뭐? 그게 가능한 일이란 말이냐?”
“바깥에 설치된 영상구에 군대가 잡혔습니다! 신전의 사제들도 함께입니다! 아무래도 신전의 도움을 받아 건물을 공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이곳을 알고 공격을 한다는 거냐!”
“그, 그것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군대의 깃발에 살바토르 공작가의 문양이 있었습니다.”
“와!”
그 순간, 어디선가 탄성이 터졌다.
긴박한 상황과 걸맞지 않은 해맑음으로.
“들으셨어요, 공녀님? 살바토르 공작가의 군대가 왔대요! 제 눈나비를 알아보신 거예요! 제가 이곳 위치를 어떻게든 알려 보라고 했거든요!”
“……아주 잘했어요, 에스텔.”
이런 상황에서조차 특유의 발랄함을 잃지 않는 것은 장점일까, 단점일까.
[여담이지만, 처녀궁도 조금은 낙천적인 구석이 있습니다. 저 이는 제 성좌를 많이 닮았군요.]
“그건 칭찬인가요?”
[마음 가지기 나름일 겁니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있으니까요.”
궁수자리와 에스텔, 티스베는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답지 않게 평온해 보였다.
그리고 그 점이 자카리의 부아를 더욱 돋우는 점이기도 했다.
“이런 개 같은 년들이…….”
으드득, 자카리의 어금니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맞물렸다.
몇 년 간 매달려 온 고지가 코앞이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그들이 그토록 기다려 온 재앙, 신의 재림을 다시 재현할 수 있었다.
자카리를 비롯한 이교도들의 위대한 발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둔한 놈들이 그들을 비웃고 내쫓았던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고작 눈나비 같은 하급 마물 하나 때문에 모든 계획을, 그것도 고지가 당장 제 앞에 놓인 상황에서 어그러뜨리게 된다고?
‘이럴 수는 없다!’
에스텔이 눈나비를 보내 바깥을 정탐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내버려 둔 것은, 고작 눈나비로 바깥을 좀 본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없으리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비가 좀 날아다닌다고 하면 내쫓으려 하지 누가 미친 것처럼 나비를 따라 나선단 말인가?
자카리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을 직접 하는 이가 있다는 것을.
‘소어 아르망 살바토르……!’
약혼녀를 되살리겠다는 미친 짓도 감행하는 이가 나비 따라가는 것쯤 못하겠는가?
제 방심이 현재의 사태를 초래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한 자카리가 이를 악물었다.
‘결계가 있으니 건물이 곧바로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신전에서 사제를 끌고 왔다고 했으니, 호수를 갈라 밑바닥을 공격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 터.
이대로 폭격이 이어진다면 결계는 금세 망가질 것이다.
그리고 결계가 망가진다면 이곳을 두텁게 메우고 있던 마물의 마나도 흩어질 테고.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 그 괴물 같은 여자를 막을 방법도 없어진다.’
결계가 망가지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그렇게 다짐한 순간, 다시 한 번 굉음이 건물을 뒤흔들었다.
“교단장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바깥으로 갑니까?”
자카리는 이를 으득 물었다 놓고는, 목청을 높였다.
“아니, 바깥의 상황은 내가 해결하겠다! 너희들은 우선 저년들부터 잡아 죽여!”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이교도들이 하나둘씩 저들의 능력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모습 자체가 마물의 형태로 변이하는 이도 있었고, 혹은 자카리처럼 몸을 찢어 마물을 꺼내야 하는 이도 있었다.
하나둘씩 변이하며 서서히 거리를 좁혀 오는 이교도들을 보며, 에스텔이 티스베의 옷자락을 꾹 붙잡았다.
“이제 어떡하죠, 공녀님?”
“달리 방법이 있나요? 길을 뚫어야죠.”
티스베는 그렇게 말하고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뒤쪽은 마물 우리였고, 막다른 길이다.
‘어떻게든 여길 뚫어야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야.’
조금 전 폭격이 건물을 뒤흔든 순간.
티스베는 일순 숨쉬기가 편해지고 마나의 흐름이 뒤바뀌는 것을 느꼈다.
폭격이 지나자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폭격이 이어질수록 편안해지는 그 찰나 또한 길어지는 것 같았다.
‘호수 밑바닥에 그냥 건물을 지을 순 없었을 테니 분명 결계가 있겠지.’
그리고 결계가 큰 충격을 입으면서 잠깐씩 그 경계가 흐트러지는 것이다.
다시 한번 쾅! 폭격이 건물을 뒤흔들었다.
‘이제 확실해.’
폭격이 이어지면 이 답답한 마나가 흐트러지는 시간 또한 길어진다.
여기서 조금만 더 길어지면 마나를 끌어올려 성좌의 권능을 빌어 오는 것 또한 가능할 것이다.
‘강림이나 소환을 오래 유지하는 건 힘들더라도.’
조금 무리한다면 순간이동 정도는 쓸 수 있다.
필요한 건 그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 정도.
“궁수. 저녀석들 전부 상대할 수 있겠어?“
[저 혼자라면 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대들이 다치지 않고서는 힘들겠군요.]
궁수자리가 가지고 있는 권능의 이름은 백발백중.
어떤 화살을 쏘더라도 기필코 모든 표적의 몸에 화살이 틀어박힌다.
문제는.
[저를 잘 아는 이들이라서 그런지, 다들 화살 한둘로는 죽지 않을 몸입니다.]
자카리가 선별해서 데려온 이 이교도들이 화살 한두 대로는 죽지 않을 놈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권능은 한 번 사용하면 다시 사용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궁수자리가 난색을 표했지만, 티스베는 화색을 띄었다.
“그래? 그 정도면 괜찮아.”
“공녀님, 무슨 생각이세요?”
“상황은 우리가 우위잖아요. 있는 걸 이용하자는 거죠.”
꽉 잡아요.
티스베가 그렇게 말한 순간, 다시 한번 굉음이 터지고 마물의 형체를 한 이교도들이 일제히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두려울 것은 없다.
[사냥터에 나오는 것은 간만인데. 생각보다 화살을 많이 쏘게 되었군요.]
재빠르게 물러서 첫 공격을 피한 궁수자리가 활시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권능으로 만들어진 화살이 생기자, 길게 늘어났던 시위가 퉁 소리와 함께 제자리로 돌아갔다.
쐐액!
튕겨진 화살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 이교도들의 몸에 일제히 박혀 나가떨어지고, 그 여파로 공격이 주춤한 틈을 타 티스베가 신호를 날렸다.
“궁수, 지금이야! 뒤로 달려!”
[뒤는 막다른 길입니다.]
“그쪽으로 길을 뚫으려는 게 아냐! 저기, 저 창살 사이에 돌 보여? 저걸 화살로 부술 수 있겠어?”
[그건 권능이 없어도 가능한 일이지요.]
궁수자리가 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 꺼내 시위에 얹고, 부드럽게 쏘아냈다.
퍽! 화살을 맞은 돌이 산산조각이 났다.
“저 돌을 전부 깨 버려! 저 돌에서 나오는 마나의 흐름이 달라! 분명 마물들을 억제하는 용도일 거야!”
“공녀님, 설마……?”
에스텔이 반신반의하는 목소리로 묻자, 티스베가 픽 웃었다.
“왜 아니겠어요? 마물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이용해야죠.”
퍽!
마지막 창살의 돌까지 완전히 부서지자, 에스텔이 기다렸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살려줘!!! 도와줘, 얘들아!!”
마물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워엉!!
우렁차게 울부짖은 마물이 거대한 앞발로 창살을 후려쳤다.
그러자 창살은 종잇장이라도 되는 양 힘없이 나가 떨어졌다.
거대한 물소 같은 형태를 한 마물이 머리로 이교도들을 들이받은 것을 시작으로, 마물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이교도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물들이 자카리가 골라 모은 정예병들을 이기기는 역부족이었다.
마물들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자, 뒤에서 화살을 쏘던 궁수자리가 제일 먼저 난색을 표했다.
[이대로라면 금세 공격받게 될 겁니다. 이 뒤는 더 도망갈 곳도 없고요.]
“어, 어떻게 하죠, 공녀님?”
“조금만 기다려 봐요. 한 번만 더 폭격이 터지면-”
그 순간.
쾅!
기다렸던 굉음이 건물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티스베는 그 폭격이 가져다준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알레샤.”
요란한 난전이 벌어지는 와중.
속삭임과도 같은 티스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