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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16화 (116/121)

116화

에스텔의 반문에, 티스베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반문이 돌아온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우리 둘이 모두 사라졌잖아요. 그것도 소어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영지에서. 듣자하니 시간이 제법 지난 모양이던데, 소어가 책임을 면치 못하게 되리라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그 말씀이 물론 맞긴 한데요……. 눈나비가 들려 준 이야기로는 그다지 곤란해 보이지 않던데요?”

“그게 정말인가요? 상황이 대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죠? 여기가 어디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고 있나요?”

티스베가 덥석 에스텔의 손을 붙들자, 에스텔이 눈을 크게 뜨곤 깜빡였다.

“지, 진정하세요. 일단 시간이나 위치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몰라요. 눈나비는 지능이 정말 낮거든요.”

예를 들어, 정탐을 다녀온 눈나비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낮밤이 몇 번 바뀌었는지는 대답해 줄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눈나비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눈나비가 직접 본 추상적인 개념뿐이었다.

“눈나비 말에 따르자면 여긴 호수 밑바닥이라고 했어요. 저희는 그러니까 지하에 있는 거죠.”

“아, 그래서 창문이 하나도 없었나…….”

티스베는 그제야 여기까지 오면서 창문 하나 없었던 건물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떻게 이교도들이 이곳에 마물의 마나를 인위적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는지도.

지하에 근거지를 만들고 사방을 덮어 마나가 고일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티스베에게는 정말 최악의 조건이었다.

“호수라고 하면 우리가 만났던 그 호수인 걸까요?”

“글쎄요. 눈나비 말로는 어느 숲의 호수 밑바닥이라고 했는데, 그 호수가 있는 숲의 위치에 대해서도 대답을 못 해 주더라고요.”

제대로 된 정보가 전무하다시피 한 수준이었지만, 눈나비가 전해 준 것 중에는 쓸모 있는 이야기도 분명 존재했다.

“숲이 아무래도 좀 넓은 모양인데…… 최근 숲 어귀에 사람이 늘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살바토르에 다녀온 나비도 있는데, 그 친구가 말하길 특별히 살바토르 성이 소란스럽지는 않다고 하던데요?”

“……아예 소란스럽지 않았다고요? 그럴 리가 없지 않나요?”

“물론 눈나비 입장에서는 저희가 소란으로 취급하는 걸 별것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있긴 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눈나비 입장에서야 인간들 몇몇이 오가고 떠드는 것이 뭐 큰 대수겠는가?

하지만 그 점을 생각하더라도, 에스텔은 살바토르에 별일이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모든 동물은 몸집이 작고 연약할수록 분위기를 읽는 능력이 좋아요. 눈나비가 멍청하긴 해도 기류를 읽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까요.”

약한 동물일수록 생존을 위해 기감이 발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니 만약 살바토르가 위험에 처했다면, 눈나비가 살바토르 성을 비롯해 인근에서 술렁이는 기류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에스텔의 확신 어린 말에 티스베는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분명, 교단장이 소어가 위험하다고 했는데…….”

그것도 굉장히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원한다면 당장 그런 내용이 실린 기사라도 가져와 주겠다고 말하면서.

그게 다 거짓이었던 걸까?

‘대체 뭘 믿어야 하는 건지…….’

티스베는 머리가 아픈 기분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모든 것이 요원한 일처럼 느껴졌다.

‘여기가 호수 밑바닥이었다니.’

건물에서 나가는 법만 알 수 있다면 될 거라고, 여차하면 벽이라도 부수고 나가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서는 단순한 방법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하라고 하니, 건물을 조금 부수는 것 정도로는 상황을 뒤집을 수도 없다.

‘이 빌어먹을 마나만 좀 어떻게 하면 좋겠는데…….’

여차하면 죽을 각오를 하고 마나를 끌어올릴 생각도 있었는데, 호수 밑바닥에서 그렇게 하는 건 자살행위밖에는 되지 않는다.

제대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찾든 이곳을 전부 쓸어버리든 해야 한다.

문제는 둘 다 너무 현실성 없는 이야기처럼 보인다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구조 요청을 기대할 수도 없어.’

그러니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저들이 원하는 결말을 내고 말 것이다.

티스베는 한숨을 내쉬곤 에스텔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는 것부터 생각하죠. 호수 밑바닥이라고 해도 나갈 방법은 있을 거예요. 그것 말고 다른 정보는 없나요?”

“네. 살바토르에 다시 한번 구조요청으로 나비를 보냈는데, 그 친구가 돌아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까지 기다릴 시간은 없으니, 없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군요. 일단 그럼 여기로 와요. 여길 벗어나야 할 것 같으니까. 궁수, 이쪽-”

티스베가 에스텔을 궁수자리의 등에 태우기 위해 궁수자리를 부르려던 찰나.

날 선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유감스럽지만 그렇게는 안 됩니다.”

“……교단장?”

티스베가 지나온 복도에서 자카리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복도 위의 그림자는 한 명이었지만, 티스베는 어둑한 복도의 그림자 속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 개의 마나 파동을 읽을 수 있었다.

자카리는 이교도 군단을 이끌고 온 것이다.

낭패감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고, 티스베는 볼 안쪽을 잘근 씹었다 놓았다.

“궁수. 분명 영상석은 전부 부수지 않았어?”

[남은 것이 없었노라 자부할 수 있습니다. 이 근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벌써-”

어떻게 벌써 그들이 사라졌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느냐는 물음을 뱉으려 했으나, 자카리는 그녀의 의문을 이해하고 있다는 듯 빙긋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그림자를 넘나들 수 있다는 건 편리한 일입니다. 두 발로는 갈 수 없는 곳까지도 갈 수 있게 해 주죠. 당신이라면 잘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요. 가까운 친구가 있지 않습니까.”

“……마흘론은, 능력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해 주지 않았어.”

“그렇습니까. 그쪽에도 신뢰받지 못하시는 모양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상대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것은 마흘론이 아니라 티스베 쪽이기는 했다.

암영에 대해 아는 것도 <괴물꽃>에서 나온 내용 때문이었고, 직접 묻는 법은 잘 없었으니까.

“당신의 시체가 온전치 못하면 저희 쪽에서도 상당히 곤란합니다. 물론 뼈만 남았다고 해도 부활은 시간을 돌리는 것이니 문제가 없지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최대한 차단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며, 자카리가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일전 방에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의 미소가 조금 더 진실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어떻게든 분노가 얼굴 위로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애써 입꼬리를 늘이는 것 같은 표정.

티스베가 차게 조소했다.

“퍽도 신경 써 주는군. 죽이려고 사지에 몰아넣은 주제에.”

“하하, 그럼요. 그래서 시신을 수습하러 갔더니, 저희의 소중한 연구작들이 추한 상잔극을 벌이고 있더군요. 당신은 온데간데없고.”

거기서 도망갈 곳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지 않으냐며, 자카리가 으쓱했다.

“안타깝군요. 기껏 자살 행위까지 해 가며 성좌를 불러 놓고, 배신자 하나에 발이 묶여 도망치지 못했다니.”

“나, 나는 공녀님을 배신하지 않았어요!”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만 아니었더라면 칼릭스트 공녀가 여기 있을 리는 없겠죠.”

“궤변은 그만두지 그래. 에스텔이 아니었으면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날 여기로 끌고 왔을 거면서. 지금도 내가 순순히 죽어 주지 않으니 직접 죽이겠다고 찾아온 거잖아? 미움을 받고 싶지 않다느니 말은 번드르르하게 해 놓고.”

내가 부활하거든 너희부터 찢어 죽여 주지.

이죽거리는 티스베의 말에, 미소 짓고 있던 자카리의 낯에 잠시 금이 갔다.

“오해는 말아 주시죠.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 물론이지. 네 죽음 역시 그럴 테니 걱정 마. 너부터 제일 먼저 죽여 줄 테니까. 찢어 죽이는 건 너무 약한가? 역시 사지부터 부러뜨리고 시작해야 하나?”

“이 건방진 년이…….”

결국 조금 전부터 위태로웠던 자카리의 평정심이 산산조각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려 했더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군. 당장 저년들을 죽여!”

자카리가 버럭 고함을 치자 그림자에 도사리고 있던 이교도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티스베 역시 곧장 행동을 개시했다.

“궁수, 지금이야! 에스텔, 올라타요!”

“네!”

그녀의 신호를 받은 궁수자리가 몸을 낮추고, 두 사람이 훌쩍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순간.

쾅!

어디선가 굉음이 우레와 같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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