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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15화 (115/121)

115화

부산을 떠는 마물들의 울음소리 사이로 요란한 소음이 하나 끼어들었다.

뭐랄까, 뭔가 묵직한 것들이 우당탕 떨어진 것 같은 소음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우리에 갇힌 마물이 날뛰다가 무언가 망가뜨린 게 아닐까 싶었지만.

“……?”

머잖아 에스텔은 그것이 마물과는 영 상관없는 소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소음이 나자마자 조금 전까지 난리를 치던 마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입을 다문 것이다.

쥐 죽은 듯한 부자연스러운 정적.

만약 마물 하나가 물건을 부수기라도 했다면 이렇게까지 정적이 만들어질 이유가 없었다.

마물들은 대개 악동 같은 성향이라, 그런 일이 생기면 더욱 날뛰어 대니까.

‘그럼 대체 왜…….’

에스텔이 의아함에 철창 가까이로 다가가자, 복도 너머에서 말소리가 울렸다.

“……뻔했네. 뭐가 이렇게 복잡하담.”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그보다 여기가 어딘지를 모르겠네.”

[그 되다 만 마물들이 쏟아져 나왔으니, 그와 이어진 곳이 아니겠습니까?]

“실험실이나 마물 우리 같은 거라도 있으려나.”

어느 쪽이든 좋으니 나갈 길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다각다각, 말발굽 소리가 섞여들며 점차 가까워져 왔다.

에스텔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높은음에서 꺾어 내리는 고위 귀족 특유의 어조, 그리고 비음이 살짝 섞여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는 우아한 목소리.

에스텔이 아는 사람 중 그런 목소리를 가진 것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공녀님?”

에스텔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리자 건너편의 소음도 우뚝 멈추었다.

약간의 정적이 지나고 말발굽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그제야 에스텔은 희미한 빛 아래 서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에스텔? 에스텔! 정말 당신이군요!”

에스텔의 기억력은 잘못되지 않았다.

티스베, 정말 그녀였다.

* * *

“……그러니까, 공녀님께서 우려하던 일이 정말 벌어지고 말았다는 거군요.”

“그래요.”

티스베가 가볍게 긍정했다.

그녀는 에스텔에게 빠르게 상황을 설명해 준 참이었다.

그들이 각기 다른 성좌들의 사랑을 받는 성녀이며, 자카리가 티스베를 이용해 재앙을 만드려고 한다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 자결을 권했지만 티스베가 목숨을 건 도박으로 탈출한 끝에 이곳까지 왔다는 것까지.

“솔직히 많이 놀랍네요. 마물 우리가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거기에 당신이 같이 갇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아닌 게 아니라, 티스베는 처음 에스텔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환각을 만드는 마물이라도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미혹 따위가 통할 리 없는 궁수자리가 옆에 있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렇게 믿었을지도 모른다.

에스텔이 어딘가에 갇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어도 마물 우리 사이에 끼어 있을 거라고는 차마 생각하기 힘드니 더더욱.

‘나는 그렇게 좋은 방에 가둬 놓고 에스텔은 마물 우리들 틈에 가두다니.’

에스텔이 그동안 이곳에서 받았을 취급이 어떨지는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카리의 말을 들었을 때도 썩 좋은 취급은 받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에스텔도 나중에 실험체로 쓰려고 한 거겠지, 분명.’

죽은 티스베마저 실험에 쓸 생각에 눈을 빛낸 게 그들이었다.

성녀라는 희귀한 재료가 둘이나 굴러들어왔는데 쉽게 놓아줄 리 없었다.

그리고 에스텔 역시도 같은 생각을 했던지,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눈물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날 정말 배신하려고 한 건가요? 교단장은 당신이 정말로 날 배신했다고 하더군요.”

“배, 배신하려 한 게 아니에요! 물론 공녀님께서 절 미워하시는 건 아닐지 걱정했지만…….”

그리고 그 때문에 마물의 꼬임에 넘어가 이런 사태를 초래한 것도 분명 에스텔 본인의 짓인 것도 맞다.

에스텔은 덜덜 떨며 뱀 마물과 했던 거래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티스베가 호수에 빠진 이후 자카리가 나타났다는 것도.

“공녀님을 배신하려던 것도, 싫어하는 것도 결코 아니에요. 절 원망하셔도, 두고 가셔도 좋아요. 제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죄는 달게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단 한 번도 배신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모든 고해의 끝에 티스베는 복잡한 눈으로 에스텔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텔, 솔직히 말해서 난 당신을 아주 가깝게 여기진 못하겠어요.”

“……네.”

“그건 당신의 잘못보다는…… 내가 당신에게 가진 날카로운 감정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기억을 되찾기 전, 티스베는 에스텔에게 크게 호의를 베풀었다.

하지만 그건 에스텔을 정말로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에스텔이 좋은 사람이며, 그녀를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끝없이 되뇌었기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서 작게 싹을 틔운 미움을 애써 외면하고 싶어서, 더 큰 호의를 베풀어 그걸 가려 왔던 것이다.

그러다 과거의 기억을 되찾게 되자 더는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고.

“우리는 어쩌면 정말 가까워질 수 없는 사람일지 몰라요. 가끔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무슨 수를 써도 나와는 맞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되는 사람.”

어쩌면 에스텔과 티스베는 그런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필연적으로 가까워질 수 없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조금 더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당신은 모르겠지만, 사라진 과거에 우리는 서로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리고 어쩌면…… 성공했을지도 모르죠. 둘 중 하나가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싸움이 이어졌으니까요. 이제는 없던 일이 되어 버렸지만.”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어째서 그 끝에 시간이 돌아간 걸까?

“의아하지 않나요, 에스텔. 대체 누가 그 일을 없던 일로 만든 걸까요?”

자카리는 시간이 되돌아간 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되돌아갔으며, 티스베가 시간을 다루는 마물과 일체화가 되어 있었기에 그것을 기억한 채로 환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만 했을 뿐.

자카리가 의도적으로 자세한 이야기를 꺼린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내 마도서의 존재까지도 알고 있는데, 시간이 돌아간 자세한 경위를 모를 리 없지.’

하여 티스베는 생각했다.

자카리가 어째서 시간이 돌아간 자세한 경위에 대해 침묵했을지.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최후의 승자가 당신이었다고 확신해요. 그리고 시간을 돌린 것 역시도.”

“……저는, 공녀님이 시간을 돌리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공녀님께서 시간을 다루는 힘을 가지게 되신 거잖아요.”

“그래요. 그러니까 내가 시간을 돌릴 거였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겠죠. 재앙이 되는 게 아니라.”

그녀에게 힘이 주어졌을 때, 티스베는 엎어진 물을 되돌리는 데 힘을 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겪은 절망과 분노를 세상에 전달하고 싶어했을 뿐.

그러니 그녀가 시간을 돌린 주체일 리 없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힘을 가질 수 있다면 빼앗길 수도 있겠죠. 방법이야 뭐든 있지 않았겠어요?”

티스베의 말에, 문득 기억의 잔상이 에스텔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림자벌레가 가진 능력은 암영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실 그건 그림자벌레를 몸속에 키우기만 해도 쓸 수 있는 능력이라, 이놈 입장에서는 정말 별것 아니거든요.

마물들이 훔쳐 왔다던 꿈 조각에서 보았던, 에스텔의 조력자가 건네주었던 그림자벌레.

그 조력자는 그림자벌레의 능력이 암막을 먹어치우는 능력이라고 했다.

그래서 재앙을 뒤덮은 암막 또한 비집을 수 있었고.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면?’

에스텔의 조력자는 암막을 먹는다고 알고 있었지만, 실상 그 능력을 제대로 써먹은 이가 없으니 그림자벌레의 능력은 미지수인 셈이다.

그렇다면 암막을 먹는 것은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에 불과하고, 진짜는 암막과 함께 이능을 먹어치우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티스베가 죽고, 에스텔의 손에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떨어진다면.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은 명쾌하다.

‘……주저 없이 시간을 돌렸겠지.’

시간이 달라져도 사람이 달라지는 건 아니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티스베 역시 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나도 잘못을 하고 에스텔 당신도 잘못을 하죠. 중요한 건 우리에겐 바로잡을 기회가 있다는 거고요. 내 말 이해하죠?”

이어진 티스베의 말에 에스텔의 눈가에는 감격의 눈물이 차올랐다.

“네, 공녀님……! 말씀을 이해했어요!”

“좋아요. 그럼 어서 이곳을 벗어나죠. 바깥 상황이 어떤지는 알고 있어요?”

“그럼요! 제가 줄곧 눈나비를 보내서 정탐을 하고 있었거든요. 어느 정도 정황은 파악하고 있어요. 살바토르 공작님께도 한 마리 보냈는데…… 구조 요청을 알아들으셨을지는 모르겠어요.”

“소어한테도 보냈다고요? 소어는 괜찮던가요? 지금 상황이 무척 곤란하다고 들었는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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