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퍽!
화살을 맞은 돌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이 인근의 통신석은 이 정도면 전부 처리가 된 것 같군요.]
반인반마, 다른 말로는 켄타우로스의 말에 그의 등에 타 있던 티스베가 잔기침을 했다.
“무슨 통신석이 이렇게나 많은지, 콜록! 얘들 돈 많네.”
[조직력이 그만큼 좋다는 이야기이겠지요. 주의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주의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 궁수.”
티스베가 시니컬하게 입을 뗐다.
방에서 탈출한 지 약 10분 정도 지났을까.
처음 방을 빠져나왔을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티스베는 이곳을 탈출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녹록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해야만 했다.
“통로는 막혔고, 창문은 하나 보이지도 않고. 무슨 건물이 이런 식인 건지.”
조금 전 티스베와 궁수가 가열차게 이교도들을 처리하며 길을 뚫던 와중, 어디선가 진동이 느껴지더니 굉음과 함께 퇴로가 막혔다. 그리고 티스베는 머잖아 그 굉음이 퇴로만을 차단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이 이곳에 완벽하게 갇혔다는 것까지도.
그 증거로 티스베의 앞에는 단단한 철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저 문은 대체 뭘로 만들었기에 네 발길질로도 부서지지가 않는 거야? 방문은 엄청 쉽게 부쉈는데.”
[그건 평범한 철문이었습니다. 저것은 마나를 운용해 만들어 낸 합금으로 보이는군요. 이 육신으로는 무리입니다.]
“돈이 많네, 얘네…….”
이교도들이 돈이 없다는 <괴물꽃>의 내용은 그야말로 사기였다.
아니, 저들 근거지에 이렇게나 돈을 발라놨으니 밖에 쓸 돈이 없던 것도 얼추 맞는 말일까.
점점 나빠져 가는 상황에 티스베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마나를 못 쓰니 답답하네.”
마나만 쓸 수 있었더라면 함정이고 뭐고 각종 마법과 신성력을 때려 박아서 해결했을 텐데.
무엇보다 지금은 천리안을 쓸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여기가 어딘지도,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도 알 수가 없으니까.
‘아마 의도한 거겠지.’
이곳에는 마물의 마나가 기이할 정도로 높은 밀도를 가지고 있었다.
티스베가 마나를 쓰지 못하는 이유 또한 그것 때문이었고.
하지만 그것이 결코 자연스러운 현상은 아니었다.
분명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리라.
그를 위해서라면 아무래도 창문이 없는 편이 효율이 좋았겠지.
겸사겸사 이곳의 위치와 상황을 노출시키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이점이었을 테고.
“만약 이곳에 인위적으로 마물의 마나를 짙게 깔아 둔 거라면, 분명 어디선가는 새어 나가고 있을 텐데.”
[그만큼 새로 공급하는 곳이 있겠지요. 모든 것은 순환하기 마련이니까요.]
궁수자리가 특유의 나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허공에 손바닥을 띄웠다.
[새는 곳이 있다면 들어오는 곳이 있고, 순환은 흐름을 만듭니다. 하여 활을 잡는 이들은 숲에 나갈 때 제일 먼저 흐름을 익히는 일을 하죠.]
숭어 뛰어오르는 물줄기를 따라 물새가 모여들고, 물새 날아오르는 곳을 지나면 노루가 뛰어 늑대의 그림자를 스쳐 간다.
[어디서든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집니다. 하다못해 평지처럼 보이는 곳에서도 물은 흐르고 있죠. 흐름을 볼 줄 아는 활잡이는 결코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없습니다.]
궁수자리의 말은 일견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티스베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곧장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사방이 막힌 것처럼 보이는 이곳에도 흐름이 있을 거라는 얘기지?”
[그렇습니다. 제가 마나로 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면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그럴 수가 없군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당신에겐 뛰어난 기감이 있지 않습니까.]
“……기감이라.”
마나를 느끼는 것을 얘기하는 거라면, 분명 티스베의 기감은 평균치를 훨씬 웃돌았다.
하지만 그 탓에 이렇게 마나의 상성이 나쁜 곳에서는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역하게 느껴지고 만다.
하여 티스베는 이곳에서 눈을 뜬 이래로 줄곧 기감을 억누르고 있었다.
‘흐름을 느끼려면 기감을 열어야 한단 말이지.’
그 끔찍한 기분을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지는 기분이지만.
‘지금은 주저할 시간이 없어.’
티스베는 궁수자리의 등에 몸을 기댄 채 눈을 내리감았다.
심호흡과 함께 억눌렀던 기감을 해방하자, 금방이라도 속을 뒤집을 것처럼 소름끼치고 역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을 만큼 끔찍한 감각이었으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다른 감각들을 최대한 차단하고 마나를 느끼는 감각에 더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눈을 감고, 서서히 숨을 고르자 귀에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역한 피비린내도 잊힌 지 오래.
피를 많이 흘려 말라붙은 입안이 익숙해질 즈음이면 촉각이 옅어지며 여태껏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텁게 쌓인 이 역한 마나들이 어느 쪽으로 흘러가는지.
어느 쪽이 더 농도가 짙고 어느 쪽이 더 옅은지.
닫힌 문틈으로 조금씩 스며들어오는 마나들과 그 속에 어렴풋이 섞여 있는, 그러나 명확하게 잡히지는 않는 사념들도…….
“……!”
그리고 그 끝에, 티스베가 눈을 번쩍 떴다.
[뭔가 느낀 겁니까?]
“그래. 당장 여길 벗어나야 해. 여기는 뚫을 수 없어.”
[무슨 말입니까? 그게-]
“이 문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마나가 거의 없었어. 아마 보기보다 훨씬 두껍고 견고한 거겠지.”
하지만 문제는 이 문이 얼마나 두껍느냐가 아니었다.
“저기, 저 오른쪽 벽 너머로 마나가 쉼 없이 들이닥치고 있어. 평범한 벽이라면 그렇게 될 리가 없지. 분명 저곳은 벽으로 위장한 통로일 거야.”
[그럼 저곳을 뚫어야 한다는 겁니까?]
“그래. 문제는…… 저렇게 벽으로 위장한 통로가 있을 이유가 단 하나뿐이라는 거지.”
[그게 뭡니까?]
“함정.”
티스베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짚어 낸 벽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요란한 소음은 벽의 장치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벽의 장치 너머에 있는 것들이 내는 소리.
기괴하게 일그러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괴물들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티스베를 향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 저게 다 뭐야?”
[보이는 것을 읽어보자면 인간과 마물의 혼합체로 보입니다. 마물의 형태를 하고 있으니 아마도 마물과 몸을 공유하기를 시도했다가 마물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것 같군요. 문제는 마물의 정신도 썩 온전치 못하다는 겁니다. 이지가 느껴지지 않고 폭력성만이 남았군요.]
“결국 잘못 걸리면 죽는다는 거잖아!”
[죽는다기보다는, 육신을 잃는다는 쪽이 더 바른 말이겠지요. 저는 소환이 풀릴 것이고, 그대는-]
“시끄러워! 그만 말하고 뛰어! 벽 다시 닫히기 전에!!”
[꽉 붙잡으세요.]
궁수자리는 어딘지 퍽 즐거워 보이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더니, 지체 없이 곧장 자리를 박찼다.
그와 동시에 함정에서 쏟아져 나온 괴물들도 티스베를 향해 달려들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심지에 불이 붙었다.
* * *
사각, 사각.
시린 돌벽을 그어 내리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복도를 울렸다.
그러자 곳곳에서 철창이 덜컹이는 소리와 함께 소름끼치는 마물의 울음소리가 퍼져 나가고, 머잖아 반짝이는 흰 나비 같은 것이 날아들어 돌벽을 그어내리던 인영의 손등에 앉았다.
그러자 인영의 얼굴이 빛 속에 드러났다.
분홍빛 머리칼과 금색의 눈동자를 가진, 수심에 찬 미인의 얼굴.
에스텔의 얼굴이었다.
“이번에도 별다른 소식은 없구나. 수고했어.”
그녀는 제게 소식을 전해 준 눈나비를 칭찬하며 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힘없이 내려놓았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을까.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깰 때마다 벽에 빗금을 그었지만, 창문 하나 없는 이곳에서는 그 어떤 것도 날짜를 가늠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했다.
하다못해 식사라도 규칙적으로 왔더라면 그것으로 날짜를 셀 수 있었을 텐데.
-배가 고프면 종을 울리세요.
자카리는 그렇게 말하며 작은 종 하나를 주고 사라졌다.
덕분에 정신을 차릴 때나 겨우 식사를 받다 보니 이 역시도 날짜를 가늠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물론 눈나비를 통해 바깥 상황을 계속 살피고는 있지만…….’
눈나비는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마물이다.
하여 정찰에는 도움이 되지만, 자체적으로 가진 지능이 낮아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애로사항이 많았다.
‘게다가 밥에 수면제를 탔는지 계속 정신을 못 차리겠고.’
그나마 오늘은 몸 상태로 미루어 보아 금세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근처에 갇힌 마물들이 유난히 시끄러웠던 탓이다.
“오늘따라 다들 왜 이렇게 요란인지 모르겠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