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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12화 (112/121)

112화

티스베의 비아냥에도 자카리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여태 그 소리를 하고 싶어 입꼬리가 근질거릴 지경이었으니까.

이곳의 광신도들은 티스베라는 인물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녀는 그저 그들의 신을 담고 있는 씨앗이자 그릇일 뿐.

“죽고 나면 당신은 새 삶을 얻게 될 겁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죽는 것도 아니죠. 심장을 찌르기만 하면 됩니다. 고통은 그리 길지 않을 거예요.”

“……내가 죽기만 하면, 소어를 살려 줄 거라고.”

“맹세합니다. 애초에 당신이 부활한 이상 저희 중 그 누구도 당신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겁니다.”

그럼 이곳에 잡혀 왔다는 에스텔도 무사히 빼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저 티스베가 딱 한 번 눈을 감고 스스로를 찌르기만 한다면.

티스베는 천천히 손을 뻗어, 자카리가 내민 단검을 받아들었다.

자카리의 보랏빛 안광에 광기 어린 희열이 차올랐다.

“결심을 내리신 겁니까?”

“……그래.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하고.”

“아주 좋군요.”

자카리의 입매에 흡족한 미소가 길게 걸렸다.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였다.

‘아주 순조롭군.’

사실 이런 선택이 아니라면 티스베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마나를 쓸 수 없는 티스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저 버티고만 있다면 약혼자는 또다시 성벽에 목이 내걸리게 될 테고, 저항하면 억지로 목숨을 빼앗기게 될지도 모르는데.

적어도 그녀가 소어를 사랑하지만 않았더라면 일이 훨씬 까다로워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지.’

과거에 한 번 일어난 일은 시간을 되돌려도 달라지기가 힘든 법이다.

자카리는 시간을 다루는 마물이 보여 주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교단장님! 살바토르 공작의 사형이 집행되었다고 합니다!

-……뭐?

자카리에게 소식을 전한 그 이교도가 저지른 실수는 단 한 가지였다.

그 순간 자카리와 티스베가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한 자리에 있었다는 것.

무엇에도 감흥이 없다는 듯 검게 물든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붉어진 눈동자를 줄곧 찻잔에 고정하고 있던 여자는 그 말을 듣자마자 무언가에 낚아채이기라도 한 듯 휙 고개를 들었다.

번뜩이는 붉은 안광이 당장이라도 소식을 전한 이를 꿰뚫을 것처럼 응시했다.

-……살바토르 공작이, 사형을 당했다고.

그것은 대답을 바라는 음성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제 귀를 의심하며 다시 한번 머리에 그 사실을 새겨 넣는 듯한 읊조림.

그때부터는 자카리도 티스베의 행적을 모두 파악할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티스베가 곧장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자카리가 간신히 그녀의 위치를 다시 찾았을 때는…….

‘……신이 되어 있었지.’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절망을 형상화한 것 같은, 너무 짙어 차라리 검게 보이는 마나의 소용돌이 속에 지상의 모든 생명을 분쇄하던 재앙을 처음으로 마주한 순간.

-아, 아아…….

자카리는 그제야 자신이 여태 살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자신이 어째서 그토록 마물의 연구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제 몸과 연결된 마물, 이본과 처음 연결된 날 보았던 그 여자는 무엇이었던지.

신전에서 내쫓기고 온갖 수모와 굴욕을 당해가며 오늘날까지 버틴 이유가 바로 저기에 있었다.

마물에 대한 연구를 선택한 그들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줄 존재.

그들이 여태 살아온 이유이자 결실.

그리고 그 생각을 한 것은 비단 자카리 뿐만이 아니었다.

마물과 몸을 연결하는 데 성공한 이들은 연결되는 순간 모두 같은 것을 보았으니까.

‘그건 신탁이었던 거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그들같은 선별된 선구자들에게만 특별히 내려진 신탁!

하여 자카리는 티스베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될 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 결정하신 것으로 알고, 10분을 드리겠습니다. 10분이 지나도 순교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때는 강제 집행이 이루어질 겁니다.”

자카리가 품에서 가져온 모래시계를 꺼내자, 티스베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10분은 좀 짧은데.”

“용서하십시오. 당신께서 뭔가를 더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당신을 그렇게 오래 혼자 둘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자카리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모래시계를 엎어 내려놓았다.

차르르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자카리가 이본의 소환을 해제하고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방 안에 느리게 퍼졌다가 사라지자 엉망이었던 방 안에는 티스베 혼자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자카리도, 그녀가 망가뜨린 모든 물건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

비로소 혼자가 되자 티스베는 온몸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 들어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손에 여저히 들려 있는 단도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건가.’

정말 이것밖에는…….

단도를 든 티스베의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두렵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는다.

자카리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마나를 살짝 끌어올려 보려고 했지만 여지없이 실패했다.

정말로

어쩌면 칼뱅의 믿음은 잘못되었던 게 아닐까.

자신을 죽이라고 목청을 올렸던 이들이 옳았던 게 아닐까.

이래서야 정말로 재앙이 되기 위해 살아온 것 같지 않나…….

‘아니, 그렇게 죽었다면 과거를 그대로 답습했겠지.’

그러니 어쩌면 이건 티스베가 맞이할 수 있는 최상의 엔딩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러니까…….

“……후우.”

티스베는 느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단도가 살갗을 갈랐다.

* * *

“아, 교단장님 오셨습니까. 대화는 잘 마치셨고요?”

“그래. 아주 온건히 마쳤지.”

“워낙 요란하기에 대화도 쉽지 않을 줄 알았는데요.”

“아둔할수록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은 거지. 그녀는 무지할 뿐 아둔하지 않다.”

오히려 아주 비상하여 오늘 이 순간을 만들기까지 상당한 애를 먹었다는 사실을 티스베가 과연 알고나 있을까.

자카리는 비로소 오랜 숨죽임을 멈추고 기지개를 켜는 기분이 되었다.

모든 대화도 끝났고, 준비도 끝났다.

남은 것은 티스베가 죽고 다시 태어나 그들의 신으로 자리매김하는 것뿐.

기억 속 선명한 그 재앙을 떠올릴 때마다 자카리는 희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는 아득했던 것이 이제는 정말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동태는 어떻지?”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방 안을 배회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자카리의 물음에 수하가 지키고 있던 수정석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 수정석은 마나를 읽어내 지정된 곳에서의 마나의 파동과, 생명체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었다.

만약 티스베가 무리하게 탈출을 시도한다거나, 단검을 써서 문을 뚫으려고 한다면 곧장 알아챌 수 있도록 해놓은 최소한의 장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수정석에서 느껴지는 것은 서성이는 움직임뿐이었다.

한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자꾸 같은 곳을 돌아보는 것 같기도 하고.

수하는 그리 이상한 낌새는 없다며 으쓱했지만, 이야기를 들은 자카리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방 안을, 계속 돌아다니고 있다고?”

“예. 아무래도 자살이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생각이 많아진 게 아닐까요? 서성이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는-”

“이런 멍청한 놈이!”

수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카리가 버럭 화를 내며 수하를 밀어 던졌다.

“무엇이 됐든 움직임을 보이면 보고하라고 하지 않았나!”

“교, 교단장님?! 하지만 저건 움직임이라기엔 너무 별 것 아니지 않습니까. 마나의 변화도 없었고요. 고작 돌아다니는 것 정도로 뭘 할 수 있을 리가…….”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인 게 눈속임이었다면?”

“……네?”

수하가 멍하니 반문했으나, 자카리는 그에 대답할 겨를도 없다는 듯 곧장 수정석에 손을 올리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수하의 말마따나 방 한가운데 서 있는 티스베의 마나가 느껴졌다.

이교도들이 가지고 있는 마물의 마나와 상반된 순수한 마나.

그러나 그뿐. 수하의 말대로 방 안을 가득 채운 마나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티스베 역시 한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고.

‘단순한 기우인 건가?’

자카리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티스베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마나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어딘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것을 본 자카리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방 안을 배회하는 걸음. 단도. 그리고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마나까지.

모든 것이 하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행위라, 차마 시도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일.

자카리가 다급하게 수정석에서 손을 떼며 소리쳤다.

“이, 이런 미친 여자가! 당장 방문을 열어!”

그리고 그 순간.

쾅!!!

폭발음이 교단 전체에 울려퍼지고, 낭패감이 자카리의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굉음을 들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뭔가, 일이 단단히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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