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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10화 (110/121)

110화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부정이었다.

“그럴…… 그럴 리가 없어.”

소어는 죽었었다. 그것도 티스베 때문에.

그것은 빌어먹을 <괴물꽃>에서도 나온 내용이었고, 티스베가 여태 되찾은 기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어는 분명 내가 사형을 당할 때 함께 사형당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소어가 나를…….”

“글쎄요. 저는 굳이 그의 사정까지 파헤치려 들지 않았으니 자세한 건 모릅니다.”

시간을 다루는 마물을 통해 과거를 보는 것에도 당연하지만 제약이 존재한다고, 자카리는 말했다.

그리고 그가 가진 과거를 볼 기회들은 대부분 티스베를 현재 이곳으로 이끌어 오는 데 사용되었으므로, 소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따위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노라고.

“하지만 짐작할 것들은 있겠죠. 살바토르에서 마지막 남은 혈통을 잃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를 살려달라고 황실에 빌었다거나.”

자카리의 시니컬한 목소리에 티스베는 머리라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한 가문에 소속된 모든 일원들이 황제에게 피의 맹세를 바침으로써 가주를 구해 내는 경우는 역사서에도 종종 있었다. 사실 생각해 보자면 살바토르는 부유하고 강대한 가문이었으니 소어를 온전히 빼낼 방법은 여럿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충격을 받은 것은 소어가 살아 있었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다.

‘왜 나는…… 소어가 당연히 그때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지?’

티스베 본인이 무의식적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소어의 죽음이 얼마나 허점이 많았는지, 그제야 깨달음이 찾아든 까닭이었다.

‘의심할 생각조차 못 했어.’

티스베 본인이 가문에서 버려졌던 까닭일까, 아니면 단지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티스베가 사형 당하기 직전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걸 간과한 것뿐일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일어난 일들은 명백했다.

소어는 죽지 않았고, 티스베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자카리를 찾아왔다는 것.

다른 이들이라면 제정신이 아니라며 혀를 내둘렀을 제안이었다.

그러나 자카리는 이 제안을 몹시 흥미로워했다.

“마물이 가진 능력이 대단할수록 결합 시의 위험도도 높아집니다. 높은 마나 친화도가 필요하고, 또 타고난 별자리의 속성에서도 많은 제약을 받지요. 자칫하면 시도와 동시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 본 교단에서도 섣불리 결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 죽은 티스베를 살려 달라고 소어가 찾아온 것이다.

성녀 행세를 하다 죽은 사기꾼 티스베.

그녀에 대한 정보는 자카리 역시 신전에 소속되었던 때의 기억으로 알고 있었다.

뱀주인자리, 즉 무속성을 타고난 데다 이례적인 마나 친화도까지.

티스베는 마나친화도 면에서도, 별자리의 속성에서도, 심지어 위험도 면에서도 제약을 받을 게 없었다.

“그런 완벽한 당신을 저희가 마다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정말 넝쿨째 굴러 들어온 행운이었군.”

“그렇지요. 당연하지만 실험은 아주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자 당신의 지고지순한 약혼자가 뭘 하려고 한 줄 아십니까?”

당신을 복권시키려고 했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우습다는 듯 약간의 실소와 함께 튀어나온 자카리의 말에, 티스베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뭐?”

“아, 물론 당신이 되살아났다는 걸 알리진 않았습니다. 단지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라는 인간을 성녀로써 죽게 하고 싶었던 거죠. 그 작자는 당신이 잃은 것들을 전부 되돌려 주고 싶어 했던 겁니다. 목숨도, 지위도! 정말 바보 같지 않습니까?”

티스베의 낯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무너지기 직전의 탑처럼.

굳이 자카리에게 듣지 않아도 그 이후의 일을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까닭이다.

소어가 자신을 되살리고, 복권시키려 했다니.

“그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렇지요. 하지만 그 남자는 그걸 모르는 것 같더군요. 아니면 알면서도 당신을 위해 무엇이든 불사하고 싶었던지. 그는 당신에게도 알리지 않고 계획을 감행했습니다.”

소어는 티스베가 여태 공헌해 온 것들을 인정하여 지위를 복권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요구를 황실과 신전이 들어줄 리 만무했다.

한 번 악녀로 죽었다면 끝까지 악녀여야 할 테니까.

그러니 소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너무 뻔한 결말이었다.

“결국 당신이 되살아난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살바토르 공작은 참수당했습니다. 몸은 광장에서 불타고, 머리는 성벽에 걸렸지요.”

죽은 것도 아주 그다운 이유였다.

황태자 킬리안이 티스베의 복권에 대해 논의해 보자며 황궁으로 초대한 것이 함정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뻔한 함정.

알면서도 소어는 사지로 들어가 죽었다. 아니, 사실 함정이 놓인 순간 다른 길은 없었을 것이다.

황궁으로 들어가길 거부했다면 곧장 군사들이 들이닥쳐 그를 죽였을 테니까.

“그 소식이 들리자 당신은 이성을 잃고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그게 세간에 알려진 ‘재앙’의 정체죠. 저희는 단지 살바토르 공작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 재앙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궤변 지껄이지 마. 그럼 지금 너희가 하는 짓은 뭐지?”

티스베가 인상을 쓰며 자카리를 노려보았다.

“과거에는 우연이 겹쳐서 그렇게 되었다고 쳐. 하지만 지금은? 이래 놓고도 아무 연관이 없다고 할 생각인가?”

“아니죠. 언젠가 해가 뜨지 않는 날이 온다면 인위적으로라도 해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게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섭리를 따르고 있는 겁니다.”

“뭐? 무슨-”

“우연이 겹친 게 아닙니다, 티스베. 당신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겁니다. 비극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세상을 증오하며 신으로 재탄생하게 될 운명!”

자카리가 신이 난 것처럼 소리쳤다.

광분한 것처럼 보이는 그의 보라색 안광에서 광기가 번들거렸다.

“아아, 추앙하던 이들의 손으로 몰락한 신의 재림이라니! 저희는 당신을 다시 이 세상에 신으로써 모시기 위해 몸 바쳐 일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아니! 그럴 일 없어. 난 세상을 증오하지 않아!”

“하지만 사랑하지도 않죠. 아닙니까?”

“전부 사랑하진 못해도 내겐 소어가 있어. 소어를 사랑하는데 내가 왜 세상을 망가뜨릴 짓을 하겠어?”

“그것 말곤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자카리의 입매가 가늘게, 그리고 길게 가로로 찢어졌다.

“믿었던 에스텔 일레르마저 당신을 배신했습니다.”

“당신이 뭔가 수를 쓴 거겠지. 에스텔은 뭔가 상태가 이상했어. 내가 그녀를 제압하지 못할 리 없는데도-”

“물론 그녀가 솔직해지도록 도운 마물이 있었죠. 당신이 무력화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당신이 쓰는 황도12궁의 마나가 불이라면, 마물의 마나는 물. 둘은 서로 상충하기 때문에 당신이 힘을 쓸 수 없었던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물 따위를 내가 이기지 못할 리-”

“마물 따위가 아니죠. 그 몸이 에스텔 일레르가 아닙니까. 당신은 버거워하는 마물의 마나를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사람.”

“……마물의 마나?”

“성역에서, 그리고 지금. 답답하고 마나가 역류할 것처럼 억눌리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당신의 속성과 상충하는 마나가 짙게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스텔은 성역에서도 아주 편안해했다. 오히려 그 장소가 그들을 반기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처음부터 그녀는 당신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믿었으니 배신당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티스베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에스텔이 없어도 나한테는 가까운 사람이 있어. 아마 지금쯤은 내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챘겠지.”

“아, 조디악의 수장 말입니까? 뭐. 알아채기야 진작 알아챘겠죠. 당신이 여기 온 지 일주일이 넘었으니 말입니다.”

처음으로 자카리의 입에서 현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한 기분에, 티스베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들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게 일주일이 넘었다고? 그럼 바깥은 어떻게 된 거지?”

“굳이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주 난리가 났죠.”

이제야 묻느냐는 듯, 자카리가 길게 입을 늘여 웃었다.

“이곳에 데려온 건 당신 하나뿐이 아닙니다. 그 배신자 에스텔 일레르도 데려왔죠. 그렇게 일주일이 넘게 지난 겁니다.”

성녀 둘이 한꺼번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심지어 한 명은 살바토르 성에서 지내고 있었고, 한 명은 살바토르령 인근에서 다른 한 명과 교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둘이 한꺼번에 사라졌다면 이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로 갔겠습니까?”

자카리의 질문에 티스베는 발밑이 갈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버석한 입술에서, 대답이 멍하니 흘러나왔다.

“……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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