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그렇게 길었던 시간을 지나 다시 재앙의 문턱.
티스베는 낯선 방에 앉아 있었다.
‘살면서 낯선 천장이라는 말을 두 번씩이나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첫 번째는 당연히 이 세계에서 다시 눈을 떴던 순간이고, 두 번째는 조금 전이다.
티스베가 정신을 차린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당연하지만 일어나자마자 그녀가 한 것은 스스로와 주변을 돌아보는 일이었는데.
‘문제는 여기가 어딘지 조금도 감이 안 온다는 거지.’
일단 방은 호화로웠다.
뭐랄까, 호화롭다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호화로웠다.
‘사치스러운 것에는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티스베, 그녀가 누구인가. 이곳에서 성녀니 공녀니 온갖 좋은 말들만 일평생 들으며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당연히 어지간한 사치에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눈을 뜬 이 방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좋은 신호는 될 수 없었다.
‘문은 잠겨 있고, 창문은 존재하지도 않다니.’
호화로우면 무엇 하나. 버젓이 존재하는 문은 아무리 애를 써도 열리지 않고, 방에는 그 흔한 창문 하나가 없어서 바깥이 밤인지 낮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는데 말이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마나를…… 쓸 수가 없어.’
엄밀히 말하자면 티스베의 마나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때부터 느껴졌던 불쾌한 기류가 있었다.
자못 익숙하지만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불쾌한.
‘이건 꼭 성역의 공기 같잖아.’
숨이 답답하고 마나가 금방이라도 역류할 것만 같은 느낌.
그러나 그 정도가 성역보다도 더 심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평소 마시는 공기에 매연이 살짝 섞여 있는 느낌이라고 한다면 성역에서는 매연이 짙게 섞여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성역에서는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짓눌리는 느낌은 아니었던 까닭에 마나를 끌어올리는 것까지도 가능했었다.
‘하지만 여기는 정도가 심해.’
공기에 매연이 짙게 섞여 있는 느낌이 아니라, 매연 그 자체를 들이마시는 것 같았다.
그나마 성역에서 전투를 치르며 마나를 다루는 데에 더욱 능통해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버티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다.
자칫 마나를 사용하려 했다간 그대로 역류하기 딱 좋은 조건이다.
‘성역에서는 도박인 셈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지만.’
여기서는 굳이 따져 볼 것도 없이 자살 행위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입고 있는 옷도 기억과 달랐고, 늘 가지고 다니는 마흘론의 펜던트도 사라져 있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감금이다.
‘미치겠네.’
기억을 잃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려 본 티스베가 인상을 쓰며 머리를 짚었다.
대체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건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멍했다.
머릿속에 에스텔, 아니, 에스텔의 입을 빌린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별이 죽으면 무엇이 되는지 아세요?]
그 쉭쉭대던 목소리.
‘정말로 그게 에스텔이었을까?’
어디서부터 의심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아팠다.
게다가 대체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단박에 제압할 수 있었던 건지.
마치 뭔가에 억눌린 듯 마나가 나오지 않았다.
‘교황을 만났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어.’
교황은 무식할 정도의 압력으로 짓누르는 거라면, ‘목소리’는 티스베를 무력화시켰다.
마치 기껏 쓴 글씨를 지워버리듯이. 혹은 기껏 만들어 낸 비누 거품을 물에 씻어 버리듯이…….
[대답을 해 주셨으니 약속은 지켜 드릴게요.]
심지어 ‘목소리’의 말이 딱히 거짓도 아니었다는 점이 티스베를 심란하게 했다.
에스텔의 손이 그녀를 호수로 밀어 버린 이후.
티스베는 다시 그녀의 과거와 조우했다.
그녀가 처음 호수에 빠졌을 때 만났던 환영.
도저히 자신이라고는 보이지 않으나, 제 얼굴을 하고 호수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너는 날 선택할 수밖에 없을 거야. 우리는 같은 증오를 공유하니까.]
티스베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그 환영이 시간을 다루는 마물인 거겠지. 다룰 방법은 찾지 못했지만.’
마물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티스베의 환영은 그녀에게 많은 기억들을 보여 주었다.
숱한 생명들을 죽이고, 그녀를 배척한 인간들이 재앙에 휘말려 죽어 가는 것들.
그리고 그런 재앙을 막기 위해 티스베를 가로막은 에스텔도.
쉽게 말하자면 ‘재앙’의 기억인 셈이다.
‘그걸 왜 보여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한 가지 정도는 확실해졌다.
여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재앙의 문턱쯤은 된다는 것.
‘이럴 줄 알았으면 소어랑 뭐 좀 해 보고 오는 건데!’
티스베는 소어와 하지 못한 것들을 떠올리며 내적 절규를 한 번 내지르고는, 마른 눈가를 훔쳤다.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지.
일단 나가고 생각할 수밖에.
이곳의 위치를 모른다고 했지, 나갈 방법이 아예 없다고는 안 했다.
무엇보다 여기가 어딘지 대충 짐작이 가는 것도 있고.
‘그러니까 일단 나가고…… 그 다음에 에스텔과도 다시 얘기해 보자.’
그게 정말 진심이었는지, 대체 왜 나를 호수에 밀었는지.
나를 배신하고 싶었던 건지…….
‘……예전 같았으면 바로 에스텔을 단념했겠지만.’
티스베는 소어를 겪으며 깨달았다. 세상에는 간혹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티스베는 처음으로, 어쩌면 자신이 실망하고 물러났던 관계들에 미처 보지 못한 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 관계를 회복할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문제가 있었던 건 주변뿐만이 아니었다.
티스베 역시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섣불리 실망하기보다는 마지막으로 한 번쯤 잡아 보는 것도 좋겠지.
두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밀어낸다면 종내에는 아무도 곁에 남지 않을 테니까.
티스베는 그렇게 다짐하며, 방 한편에 놓여 있던 화병을 집어 들었다.
와장창!
흰 꽃들로 가득 장식이 되어 있던 화병이 그대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났다.
그러나 티스베는 그에서 그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들어 망가뜨렸다.
금속으로 된 장식용 종을 벽에 집어던져 우그러뜨리고, 금줄에 보석 장식들을 매달아 놓아 차르륵 듣기 좋은 소리를 내는 장식품도 본래의 형체를 잃고 바닥에 처박혔다.
판자로 된 나무 가구들은 거친 발길질에 박살이 나고, 깨질 수 있는 것들은 너나할 것 없이 순식간에 전부 박살이 났다.
호화로웠던 방이 엉망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티스베가 다음 희생양을 집어 들어 바닥에 내던지려는 찰나.
“기운도 좋으시지. 일어나자마자 방 하나 부수기가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굳은 채 몸을 틀면,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있었다.
반듯한 인상에 보라색 안광만이 이질적인 빛을 내는.
남자와 문 쪽을 번갈아 노려본 티스베가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문 여는 소리도 안 났는데.”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문을 열지 않고도 다닐 수 있어서. 영 나쁜 습관이 들어 버렸군요.”
문을 열지도 않고 다닐 수 있다는 그 말.
본인이 평범함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시인하는 사내의 말에 티스베는 조금 전까지 의심에 불과했던 것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흑마법사? 아니면 이교도인가?”
“세간에서는 그 둘을 다르게 부르는 모양입니다만, 저희는 크게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그 둘이 추구하는 것은 같으니 말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의미하는 것은 명료했다.
“모르긴 몰라도 체크메이트로군. 그렇지?”
“……알고 계셨다는 투군요. 보통은 이런 상황에 놀랄 텐데 말입니다.”
“놀랄 것까지야. 너희들과 만나게 될 걸 아주 몰랐던 것도 아니고.”
티스베가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는, 몇 발짝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당연히 이런 수순이어야지.’
예상과 방식이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이교도들을 만나는 건 예정된 미래였다.
단지 어떤 방식인지 알 수 없었을 뿐.
그러나 이제 알겠다.
“어쩐지 에스텔이 뭔가 이상하더라니…… 내가 여기까지 오도록 유인한 거군.”
시간을 다루는 마물의 존재를 이교도들이 몰랐을 리 없다.
그리고 티스베가 그 마물을 찾고 있으리라는 것 또한 알았다면, 그 마물을 미끼로 티스베와 조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
몸을 돌린 티스베가 보랏빛 안광을 번뜩이는 사내를 노려보듯 마주하자, 사내의 입꼬리가 죽 올라가며 찢어졌다.
마치 그 말에 긍정하는 것처럼.
그러나 기이한 점은 그의 이질적인 안광에 서린 것이, 비단 광기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눈치가 나쁘지 않으시군요. 자세한 건 이야기를 나누어야겠지만…….”
만나 뵙길 고대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