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07화 (107/121)

107화

그림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인영들이 시시각각 밤 그림자 아래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림자에서’ 튀어나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텔을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아니었다.

‘마나 흐름이 변하지 않아.’

모든 생물은 제각기 다른 마나의 파동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에스텔은 이런 마나의 흐름을 느끼는 기감이 유난히 발달해 있는 사람이었다.

마물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 또한 마물들이 가진 마나에 담긴 사념을 읽어 내는 방식이었으니까.

하여 그녀는 생물의 기척을 느끼기보다는 마나의 흐름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공간에 새로운 생물이 등장하는 순간이면 곧장 마나의 기류가 달라지는 게 느껴지니까.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마나의 기류가 달라지지 않았다.

‘설마.’

이 모든 사람들이 처음부터 이곳에 숨어 있었다는 건가?

바짝 긴장한 에스텔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러자 로브를 뒤집어 쓴 이들 중 가장 선두에 있던 이가 천천히 걸어 나오며 후드를 걷었다.

젊은 남성, 그것도 학구적이고 단정해 보이는 인상의 얼굴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일견으로 말하자면 이런 상황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외모였다.

얼핏 보자면 소어와도 닮아 있었으나, 그가 귀족적이면서도 기사 특유의 날 선 분위기가 맴도는 인상이라면 저 사내는 선이 얇고 이지적인 느낌이 강해 학자처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단정한 낯에 올라온 옅은 미소는 그를 더욱 호감으로 보이게 만들어, 다른 이였더라면 그 외모를 보고 일순 경계심을 늦추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에스텔은 사내의 외모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는 분명 호감을 쉽게 살 만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선명한 보라색 안광이 사납게 번뜩이는 것을 놓치지 않은 까닭이었다.

게다가, 그에게서는 이질적인 기운이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로브를 뒤집어 쓴 상태에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거리가 좁혀지자 그 기운은 더욱 선명해졌다.

인간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이질적이지만 에스텔에게는 도리어 익숙하기까지 한 기운.

“……마물?”

“그렇게 보입니까? 일단은 인간이긴 합니다만.”

놀라운 기감이군요.

여상한 투로 덧붙인 사내가 팔을 뻗자 에스텔의 뒷덜미를 잡아채 끌었던 검은 독수리가 휘익 날아 그의 팔 위에 안착했다.

“첫 만남을 과격하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이렇게 되어 유감스럽군요. 하지만 저희 쪽에서도 지금만큼은 방해를 받을 수 없어서 말입니다. 저희도 지금은 오래 기다린 순간이라.”

그렇게 말하며 느슨한 미소를 짓는 사내에, 오싹한 긴장감이 에스텔의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대,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죠? 당신은 누구고, 왜 공녀님을-”

“자카리아스 이아코브. 편하게 자카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과거에는 주신의 사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이들을 이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들을 이끄는, 일이라고요?”

“예. 별것 아닌 모임입니다만, 세간에서는 저희를 두고 이단이라고 칭하더군요.”

제 말마따나 정말 별것 아니라는 듯 자카리가 으쓱했다.

그러나 에스텔의 입안은 시시각각 바싹 말라 가고 있었다.

‘이, 이단이라고?’

말은 조금 다르지만, 이단이 이교도인 걸 모르는 사람이 있던가.

“……당신이, 이교도들의 교단장이라는 건가요?”

“그렇게 불리고 있지요.”

에스텔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쭉 돋았다.

낮에 티스베가 말했던 것이 떠오른 것이다.

-이교도들은 분명 나와 만나려 할 거예요.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나를 만나러 오기 전에 내가 그들을 찾아가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죠.

티스베는 옳았다. 그녀의 말대로 이교도들은 티스베를 만나러 왔다.

그것도 에스텔이 티스베를 호수에 밀어 버린, 가장 끔찍한 순간에.

마치 설계했다는 것처럼……

“……날 이용한 건가요? 공녀님을 죽이기 위해서?”

“죽이다니.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거, 거짓말!”

에스텔이 쥐어짜낸 고함을 지르고는 티스베를 건지기 위해 호수로 달음박질 쳤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이본, 막아.”

“큭!”

자카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온 독수리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다시 그녀를 패대기치지만 않았다면.

다시 땅을 구르는 에스텔의 곁으로, 자카리의 걸음이 느리게 다가왔다.

“성녀님께서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지금 본인이 누굴 걱정할 처지가 된다고 보나? 당장 나란히 호수에 던져질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시니컬하고 오만한 목소리.

“그리고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 공녀를 호수에 던진 건 본인일 텐데?”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내뱉은 말 중 거짓도 없었지.”

“그건 저 마물이 날 속여서-”

“저 뱀 같이 생긴 놈?”

자카리가 뱀 마물을 일견하자, 뱀 형체가 움찔하더니 재빨리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비굴한 행태를 본 자카리가 차게 조소했다.

“저놈을 탓하고 싶은 건 알겠지만, 저놈은 거짓을 말할 줄 모르는 놈이라서.”

“……네?”

“생각해 봐. 몸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편리하겠나?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진즉 써먹었겠지. 오늘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

“그게, 무슨…….”

“저 뱀이 가진 능력은 별것 아니지. 고작 기생한 숙주의 본성을 충동질하고, 충동질한 본성을 언약의 형태로 일깨워 숙주를 지배하는 것 정도니까.”

결국 에스텔이 티스베를 호수에 집어던진 것은 그녀의 본의가 아닌 일이 맞지만, 애초에 그녀가 품고 있던 불안과 의심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 증거로 에스텔이 티스베에게 뱉은 말들은 전부 그녀의 진심이었다.

“덕분에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는 다시 한번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하게 되었군.”

“아, 아니야. 나는, 난…….”

에스텔의 낯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 순간을 만들어낸 것이 뱀 마물에게 속은 걸로도 모자라, 제가 몰래 품고 있던 속내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에스텔을 괴롭게 했다.

“난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

“일이 벌어진 이후에 으레 나오는 말 중 가장 구차한 걸 고르셨군.”

그리고, 자카리는 그런 에스텔을 차갑게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애초에 에스텔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어쨌든 당신에게는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성녀. 우리가 오래도록 고대해 온 조우의 대미를 당신이 장식해 주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스텔을 이대로 풀어줄 생각은 물론 없었다.

몸을 돌린 자카리가 손을 딱, 튕겼다. 그러자 어디선가에서부터 스멀거리는 연기가 피어나 일대를 빠르게 뒤덮기 시작했다. 연기의 정체를 알 수는 없어도 이대로 있다가는 분명 위험해진다는 걸 직감한 에스텔이 서둘러 도망치려 했으나, 다시 날아온 독수리에게 붙들려 나동그라질 뿐이었다.

다른 때였더라면 마물들을 불러 도움을 요청하기라도 했을 텐데, 마물들은 땅 속에 들어간 이상 거의 나오질 않는다.

그나마 위기감을 느낀 에스텔의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건 에스텔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하급 마물들.

“콜록, 콜록!”

연기가 점차 짙어지고, 결국 에스텔의 기도와 허파에도 연기가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연기로 인해 짙어지는 암막 너머 자카리가 무언가를 명령하는 것이 보였다.

“성녀를 모시고, 호수를 열어라. 본단으로 돌아간다.”

“예!”

충성스러운 음성이 터지고, 이내 시야가 크게 휘청였다.

에스텔이 결국 균형을 잃고 쓰러진 까닭이었다.

‘이, 이대로는 안 돼…….’

티스베는 이교도들이 그녀를 찾아오게 되면 재앙의 서막이 열린 셈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내가 멀쩡한 상태라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과연 어떨지는 모르죠. 최악을 상정하는 건 늘 필수적인 일이고.

-그래도 너무 걱정은 안 해요. 내 주변에는 좋은 사람이 있으니까. 물론 에스텔을 포함해서요. 예전에는 곁에 사람을 두는 게 무서웠는데, 이제는 너무 겁내지 않기로 했어요.

그렇게 말하던 티스베의 음성이 머릿속을 떠다니고, 에스텔의 뺨 위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에스텔의 주먹이 꾹 움켜쥐어지나 싶더니, 이내 툭 풀어지며 힘을 잃었다.

그것이 에스텔이 본, 그곳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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