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에스텔의 말에 티스베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시간을 다루는 마물이 있는 곳이 여기라고요?”
“네. 확실해요. 보증할 수 있다고 했어요.”
“맙소사…….”
그녀의 물음은 에스텔을 의심하고자 뱉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떤 탄식에 가까운 소리였다.
‘역시 호수에 빠졌던 게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던 거구나.’
무언가가 작용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어도 호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태껏 티스베를 이곳까지 이끌어 온 일들은 늘 우연을 빌어 티스베의 눈을 가리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호수가 직접 티스베를 불러들였던 것이라면.
‘호수에서 정신을 잃은 것도 이해가 가.’
그 밑바닥에서 제 환영을 보았던 것도, 그리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해서 찾은 기억들도.
시간을 다루는 마물, 바꾸어 말하자면 ‘시간’이 직접 티스베를 재앙의 길로 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놀아나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티스베의 표정만은 밝았다.
“우리가 이교도들보다 먼저 찾았으니, 적어도 최악은 면했네요. 아까 낮에는 못 찾았다고 해서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찾을 수 있을 줄이야!”
어떻게 찾았느냐며 티스베가 에스텔에게 공치사를 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에스텔의 표정은 밝지 못헀다.
“그게, 사실은 공녀님께 거짓말을 헀어요.”
그리고 머뭇거리며 에스텔이 뱉은 말에, 티스베의 표정이 굳어 들었다.
“……네?”
“마물을 찾지 못한 게 아니라, 마물을 찾지 않은 거였어요. 공녀님을 도와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요.”
“에스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날 돕고 있었잖아요. 이제 와서 도와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니. 왜-”
“마물들이…… 공녀님을 재앙이라고 불러요. 공녀님이 저를 미워하고, 절 이용하려 한다고요.”
“……뭐라고요?”
티스베가 소스라치게 놀라 호숫가에 선 에스텔에게로 다가갔다.
“왜 여태 말하지 않은 거예요? 내가 에스텔을 미워할 리 없잖아요.”
“그거, 정말인가요?”
“네?”
“정말 조금도 절 미워하지 않으시는 게 맞으세요?”
평소와 사뭇 다른 서늘한 목소리에 티스베가 저도 모르게 말문을 잃었다.
물론 그녀는 에스텔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때 처절하게 에스텔과 대립했던 기억이, 그때의 그 증오가 찌꺼기처럼 남아 대답을 방해했다.
곧장 대답하지 못하는 티스베를 본 에스텔의 표정에 실망감이 서렸다.
“……공녀님이 솔직한 분이셔서 다행이네요.”
“에스텔, 내가 설명할 수 있어요. 에스텔을 정말로 미워하는 게 아니에요. 저번에 말했던 꿈 있잖아요. 그것 때문에-”
“알아요.”
에스텔의 차가운 목소리가 티스베의 말을 뚝 잘랐다.
“마물들이 공녀님의 꿈을 훔쳐다 줬어요. 그래서…… 봤어요. 모두가 공녀님을 재앙이라고 부르는 미래를요.”
모두가 티스베를 재앙이라고 부르는 미래.
그건 티스베조차 본 적이 없는 내용이었다.
에스텔의 말에 티스베가 딱딱하게 굳자, 에스텔은 그것이 정곡을 찔린 까닭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공녀님도 알고 계셨겠죠. 저한테 숨기고 싶으셨을 건 이해해요. 변명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공녀님이 그런 신탁을 받은 이상, 어쩌면 그런 미래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그런 게 아니에요. 난 그런 꿈은 꾸지 않았는데-”
꿈의 내용이 어땠느냐며 티스베가 물으려 했으나, 에스텔은 그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독백과도 같은 말을 이어갔다.
”계속 갈등했어요. 공녀님은 저희가 알 수 없는 절대적인 누군가가 저희를 어디론가 이끌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과연 티스베가 재앙이 되는 미래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고, 에스텔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에스텔은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에스텔이 하는 말들은 평소의 그녀라면 티스베에게 차마 말하지 못했을 속내였을 테니까.
“제가 공녀님을 재앙으로 만들게 될까봐 무서워요. 그래서 주저했어요.”
“그런데, 왜…….”
“그래도 공녀님을 돕고 싶으니까요.”
에스텔이 그렇게 말한 순간, 티스베의 손목이 덥석 붙잡혔다.
붙잡는다기보다는 사실 구속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강한 악력에 티스베가 미간을 찌푸린 찰나.
티스베는 그제야 에스텔이 평소와 묘하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다르다기보다는 이상하다는 쪽이 더 어울릴 법한 얼굴이었다.
티스베를 향한 에스텔의 금빛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얼굴.
‘저건 정상이 아니야.’
대체 뭐에 홀린 건지, 아니면 씐 건지는 몰라도 정상이 아니다.
목소리가 너무 또렷해서, 그리고 어두워서 곧장 눈치 채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
위기감을 느낀 티스베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 들었다.
“에스텔. 이거 놓-”
[하나만 대답해 주세요, 공녀님. 그러면 시간을 다루는 마물과 만나게 해 드릴게요.]
티스베가 급히 팔을 빼려고 한 순간, 손목을 붙든 아귀힘이 강해지며 뇌리에 음성이 새겨졌다.
성좌들의 음성을 들을 때와 비슷한, 아주 익숙한 감각.
다른 점이 있다면 오직 하나. 성좌들의 것과 달리 뱀이 쉭쉭거리는 듯한 소음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쇠를 긁듯 소름 끼치는 음성이 티스베를 옭아맨 채 묻는다.
[별이 죽으면 무엇이 되는지 아세요?]
마물의 능력인 건지, 에스텔과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 티스베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마나를 끌어 올리는 것도, 손끝을 움직이는 것도.
단지 의지를 배반한 몸이 느리게 질문에 대한 대답을 뱉을 뿐이다.
재앙.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에스텔의 입매가 줄 잘린 꼭두각시처럼 부자연스럽게 정지했다.
[알고 계실 줄 알았어요.]
어쩐지 그 쉭쉭대며 쇠를 긁는 듯한 음성이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기분 탓일까.
문득 든 의문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바로 그 다음 순간.
[대답을 해 주셨으니 약속은 지켜 드릴게요.]
에스텔이 꼼짝하지 못하는 티스베를 호수로 밀어 버렸으므로.
* * *
풍덩!
요란한 소리가 일고, 사람 하나를 집어삼킨 호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잠잠해졌다.
밤이 물든 탓에 검은 수면 아래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가 맴돌 뿐.
“……이,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에스텔의 새된 고함이 수면에 잔 파동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검은 뱀의 형체는 태연할 뿐이다.
[왜 그래? 약속대로 했을 뿐이야.]
“공녀님을 호수에 던지는 게 무슨 약속이야!”
에스텔은 맹세컨대,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한 약속은 어디까지나 에스텔의 몸을 조금, 빌려주기로 한 것 정도였으니까.
-……공녀님이 재앙이 되지 않을 거라는 확인을 해 보고 싶다고?
[그래. 너도 그편이 안심되지 않아? 입만 좀 빌려주면 돼. 난 마물이라 이대로는 그 여자와 대화할 수 없잖아. 그 여자가 재앙이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면 그 여자가 찾는 그 마물을 불러줄게.]
그렇지 않으면 결코 알려 주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통에, 에스텔은 결국 그 요구를 수락했다. 그래, 분명 그랬었다. 조금 미심쩍기는 해도 마물들은 언제나 에스텔을 진심으로 위하고 있었으니 의심을 거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에스텔의 입만 빌리겠다던 뱀 마물이 약속을 어긴 것이다!
에스텔의 낯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지금이라도 어서 공녀님을 꺼내!”
[그럴 순 없어. 이건 전부 우리를 위한 거니까.]
“뭐? 그게 무슨…….”
에스텔이 황당함에 말을 잃었으나, 그녀는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 뱀 마물과 입씨름하는 것은 전혀 우선시되어야 할 일이 아니었다.
“……됐어, 네가 안 꺼내겠다면 내가 꺼낼 테니까-”
“애석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오나 싶더니 몸이 크게 휘청였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검은 독수리가 에스텔의 목덜미를 거세게 잡아채 내던진 까닭이었다.
“꺄악!”
균형을 잃은 에스텔이 비명을 지르며 눈 덮인 바닥을 굴렀다.
그 위로, 낯선 그림자가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