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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05화 (105/121)
  • 105화

    티스베의 패착이라면 오직 한 가지였다.

    주변을 지나치게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

    동시에 스스로를 지나치게 과신했다는 것이다.

    간혹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주변 돌아보기를 등한시하는 법이니까.

    하여, 티스베가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바로 에스텔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으리라는 사실.

    티스베가 여느 때처럼 홀연히 자리를 뜬 이후.

    ‘도저히 모르겠어. 이게 정말 잘하는 일일까?’

    에스텔은 두 손에 낯을 묻은 채로 자괴감에 괴로워했다.

    사실 이것은 오늘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티스베의 ‘꿈’, 즉 그녀가 재앙이 되는 미래를 엿본 이후.

    에스텔은 매일같이 미래의 기억과 현재의 괴리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녀가 오늘 티스베에게 한 거짓말은 단 한 가지였다.

    -아마도 지난번 말했던 시간을 조작하는 마물을 찾는 게 목표겠죠. 당신이 수소문했을 때는 찾지 못했다고 했죠?

    -네. 아무리 물어도 아는 친구가 없더라고요.

    시간을 조작하는 능력을 가진 마물을 찾지 못했다는 것.

    ‘내가 공녀님께 거짓말을 하다니.’

    사실 에스텔은 마물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찾지 않은 것이었다.

    마물들 몇 마리에게만 부탁해도 인근 일대의 마물들에게 말을 퍼트리는 데까지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에스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주저하고 말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여자를 믿으면 안 돼.]

    과거의 기억에 겹쳐 들려오는 마물들의 목소리가 자꾸만 에스텔을 흔든 탓이다.

    다른 마물들도 티스베에게 늘 날카로웠지만, 개중에서도 뱀 형상의 마물이 유독 집요했다.

    티스베가 떠난 지금도 뱀 마물은 틈을 놓치지 않고 다가와 에스텔의 곁에서 쉭쉭댔다.

    [왜 그러고 있어. 설마 거짓말을 한 게 미안한 거야?]

    “……그래. 이게 정말 잘하는 짓일까? 공녀님을 도와야 하는데,”

    [하지만 너도 봤잖아. 그 여자가 너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걸.]

    “그건…….”

    뱀 마물이 위협적으로 꼬리를 흔들며 말하자, 에스텔의 낯 위로 다시 착잡함이 서렸다.

    차라리 티스베를 만나는 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더라면 또 몰랐을 텐데, 에스텔은 티스베와 대화하는 순간순간 괴리감을 느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무언가를 숨긴다는 듯한 뉘앙스를.

    -공녀님, 혹시 이교도에 대해 다른 이야기는 들은 게 없으신가요? 마물에 대해서라거나-

    -아뇨, 없었어요.

    수상할 정도로 지나치게 빠른 대답.

    그 대답을 듣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반문이 튀어 나갔다.

    -……정말이시죠?

    그러자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티스베의 시선이 도로 올라와 에스텔을 향했다.

    약간의 당혹과, 약간의 의문을 담은 채.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나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뭔가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고…….

    -지금도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는 걸요. 도움이 필요하면 말할게요.

    티스베는 늘 그렇듯 부드럽고 단호한 태도로 에스텔의 주저를 잘라 냈다.

    하지만 그 말은 거꾸로 하자면, 도움이 필요하기 전에는 미리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지 않나.

    에스텔은 티스베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러나 여태까지는 그 사실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사람이라면 누구나 숨기는 게 하나씩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전에도 말했지, 에스텔. 그 여자는 널 이용해서 시간을 조작하는 힘을 가져갈 생각인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토록 헌신적인 조력자인 네게 숨길 게 뭐가 있겠어?]

    옆에서 자꾸만 들려오는 미혹의 목소리가 에스텔의 이성을 흐리게 하고 있었다.

    [네가 시간을 조작하는 능력을 가진 마물을 찾아 주면 분명 그 마물을 죽이고 힘을 앗아가겠지. 네게 친절한 건, 어디까지나 그 마물을 찾기 위해서 네가 필요하기 때문인 거야.]

    “그, 그렇지 않아…… 공녀님께서는 좋은 분이야.”

    [하지만 너한테 진실도 얘기해 주지 않는데?]

    “뭔가…… 뭔가 이유가 있는 거겠지.”

    [그래, 바로 널 이용하겠다는 목적이 이유겠지! 그 꿈을 봤잖아, 에스텔!]

    뱀 마물은 목을 꼿꼿이 펴 가며 열변을 토하더니,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몸을 말고 혓바닥을 낼름거렸다.

    [우리 말을 믿어야 해, 에스텔. 그 여자에게 시간을 다루는 마물의 위치를 알려 줘서는 안 돼.]

    그 여자는 목적을 달성하면 마물도 너도 모두 죽이고 재앙이 될 거라고.

    [두고 봐. 그 여자는 분명 제일 먼저 마물을 죽이겠다는 말부터 꺼낼 거야. 마물을 죽이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 텐데 말이야.]

    뱀 마물의 속삭임에, 다른 마물들이 끼어 그 말이 옳다며 말을 하나씩 더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현장 속.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싶던 에스텔이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래도 난 공녀님을 믿어. 일단은 공녀님께서 부탁하셨던 일을 해야겠어.”

    에스텔은 티스베가 떠나기 전 보였던 낯빛을 떠올렸다.

    -우습네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니.

    그렇게 말하며 자조하는 듯 미소 짓던 티스베.

    그녀는 에스텔이 목격했던 ‘재앙’과 얼굴이 같을 뿐, 너무나도 동떨어진 사람으로 보였다.

    ‘재앙’의 얼굴은 증오와 원망, 그리고 끔찍한 허무로 점철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티스베의 얼굴은 결코 삶이 아쉽지 않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아마 살바토르 공작님 때문이겠지.’

    그녀가 가진 삶에 대한 애착이 어디서 나오는지. 에스텔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텔이 경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디까지나.

    ‘간절한 사람은 뭐든 하기 마련이니까.’

    티스베가 지금의 삶을 지키기 위해 힘을 택해야 할 필요는 너무나도 차고 넘쳤다.

    그녀가 가진 삶에 대한 애착만큼이나 많았다.

    차라리 그녀가 상실을 몰랐더라면 나았을 텐데, 이 제국에서 티스베만큼이나 배신의 개념을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머리가 아프다.’

    티스베에게 대놓고 뭘 숨기고 있는지, 정말 재앙이 될 생각이 없는지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경계하고만 있자니 티스베를 도울 수 없음이 두렵다.

    곁으로 다가온 생쥐 마물이 코를 찡긋거리며 물었다.

    [저, 저, 정말 그 마, 마물을 찾아 주려는 거, 거야, 에스텔?]

    “그래. 너희는 알고 있지? 시간을 다루는 마물이 어디에 있는지.”

    [아, 알기야 하, 하지만…….]

    [그 여자가 재앙이 되려고 할 수도 있잖아!]

    [그 마물을 죽이고 힘을 빼앗을 거야!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이 될 거야!]

    “그렇게 될 것 같으면…… 내가 공녀님을 막을게.”

    에스텔이 조용히 읊조리며 빈손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알려 줘. 시간을 다루는 마물이 어디 있는지.”

    그녀의 물음에 주위로 몰려들었던 마물들이 조용히 시선을 교차하더니, 뱀 마물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에스텔, 우리가 어떻게 네 부탁을 거절하겠어. 하지만 한 가지만 약속해 줘.]

    그것만 약속하면 알려 줄게.

    덧붙여지는 뱀 마물의 목소리가, 쉭쉭거리며 스산한 소음을 냈다.

    * * *

    그날 밤.

    티스베는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뜨면 창문에 열심히 제 흰 날개를 부딪히고 있는 나비가 보인다.

    “……에스텔?”

    호수에 빠졌던 사건 이후, 티스베는 에스텔에게 연락책을 만들 것을 권고했다.

    다시 엇갈려서 한 명이 호수에 빠지는 일은 되도록 없어야 할 테니까.

    그렇게 에스텔이 선택한 것이 바로 이 눈나비였다.

    눈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있는 마물인 눈나비는 사철 눈으로 덮여 있는 이 인근에서 연락책으로 쓰기 완벽한 마물이었으니까.

    ‘이렇게 연락을 취한다는 건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인데.’

    시간을 다루는 능력을 가진 마물을 찾게 되면 곧장 연락하라고 했었으니, 어쩌면 그 일인가.

    티스베는 가벼운 실내복 위로 두터운 망토만 걸친 채 눈나비가 날아가는 방향을 따라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오셨어요?”

    “에스텔, 이곳은…….”

    “공녀님이 얼음에 갇힌 채로 발견됐던 곳이죠. 기억하세요?”

    “기억은 하죠.”

    어떻게 잊을 수 있곘는가?

    이곳에서 바로 그 환영을, 그리고 꿈을 만났는데.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부른 거죠?”

    “마물들이 알려 줬어요. 여기가 바로 시간을 다루는 마물이 있는 곳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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