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시간을 조작하는 힘을 가진 마물은 존재한다.
티스베는 이제 그 사실을 굳이 의심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수많은 기현상들이, 시간이 조작되었다는 설명 하나만으로 모든 해답을 찾아가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 마물의 존재가 핵심이라는 사실이 분명한데 왜 굳이 마물을 찾지 않아도 되는 거냐고?
‘간단하지.’
티스베가 걷고 있는 길의 끝에서 어차피 조우하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
모든 것은 예견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것이 단순히 이교도들의 술수 때문인지, 혹은 여태 예상한 대로 어떤 절대적인 존재의 개입 때문인지는 몰라도.
티스베는 종종 자신을 둘러싼 흐름이 한 방향을 명확히 가리키고 느끼곤 했다.
‘아마도 그건 과거를 재현하는 방향이겠지.’
티스베가 재앙이 되는 미래이자 과거.
그리고 그녀가 재앙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을 조작하는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니 이 길의 끝에서 조우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교도든, 마물이든.
‘이렇게 된 이상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겠지.’
오히려 이렇게까지 그림이 그려지니 확실히 보였다.
티스베가 아무리 피하려고 발버둥 쳐도 그들은 조우하게 될 것이다.
아니, 피하려고 발악한 것이 오히려 그들의 조우를 가깝게 만들게 될지도 모르는 일.
‘내 짐작이 맞다면 분명 이교도들은 나와 접선할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야.’
그녀가 있어야 그들이 원하는 ‘신의 재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추론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왜 여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건 영애께서 너무 화려한 인물인 탓이겠지요.”
에스텔과 헤어진 직후 찾아간 교황, 칼뱅의 말이었다.
티스베는 그 말에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냐는 듯.
칼뱅의 지위와 그들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면 불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행동이었으나, 티스베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애초에 그녀가 성녀인데 교황한테 좀 건방지게 군다고 해서 큰일이야 나겠는가.
무엇보다 신전은 티스베에게 큰 빚을 지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탁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은 티스베가 시니컬하게 입을 열었다.
“어쩐지 오늘 성하를 만나러 오기가 싫더라니, 쓸데없는 말이나 들을 것을 알아 그랬나 보군요.”
“오늘까지도 말씀을 주지 않으셨다면 제 입장이 적잖이 곤란해졌을 테니 다행인 일입니다.”
칼뱅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티스베의 날 선 태도에도 그는 언제고 인자함을 잃지 않았다.
특히 간만에 티스베와 재회한 이 자리에서, 칼뱅은 마치 제 오랜 친우를 맞이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티스베를 조금 당혹스럽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렇게까지 환대할 줄은 몰랐지.’
티스베를 상대하는 전략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잘 먹혀들어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웃는 낯에 침을 뱉지 못한다는 말의 산 증인 같은 사람이었으므로.
아무리 신전에 관련한 이들이 꼴도 보기 싫은 존재라고 하더라도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듯한 칼뱅에게 차마 모진 말을 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영부영 차를 받아 앉고, 여태까지 추론한 내용을 전달하고 난 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칼뱅이 티스베의 질문에 저렇게 대답한 것이다.
“이교도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과, 내가 화려한 사람이라는 게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죠?”
“음…… 제 생각에는 영애께서 스스로의 입지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과소평가하고 있다고요?”
티스베가 난생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결코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수도를 오가며 마흘론을 만나고, 살바토르에 있는 것을 모두 비공식적으로 처리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 사실들이 밝혀지면 분명 적잖이 소란스러워질 테니까.
당연한 사실 아닌가?
티스베는 현 시각 제국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성녀에서 희대의 사기꾼으로 몰락했다가, 성역에서의 눈부신 활약으로 다시 혜성처럼 부활한 칼릭스트의 성녀.
현재 제국 안에서 그녀를 모른다면 제국민이 아닐 것이다.
지금도 거리에 나가면 신전도 황실도 그녀를 함부로 강제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도는 상황이었으니까.
티스베 역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교도들이 나를 만나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거예요. 감옥에 갇혀 있던 주교를 죽이고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놈들이니까요.”
“물론 그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제 말뜻이 곡해된 것 같군요. 제가 화려하다고 한 것은 영애의 입지를 일컫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뭐죠?”
“영애께서 늘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지요.”
칼뱅이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찻주전자를 들어 제 찻잔을 채웠다.
“영애는 분명 화려하게 빛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탓에 주변에는 늘 영애를 위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티스베는 무심코 아니라는 말을 뱉으려다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름들에 입을 닫았다.
돌이켜보자면 늘 도움을 받아왔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까닭이다.
가장 큰 조력자는 역시 마흘론이지만, 킬리안, 에스텔, 소어 모두 그녀를 위하는 이들이다.
“그렇게 주변에 사람이 많은 인물은, 그만큼 주변에 잘 휩쓸리기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죠.”
조금 기분이 상하는 일이지만, 칼뱅은 유독 핵심을 잘 짚었다.
티스베가 마지못해 긍정하자 칼뱅의 입매에 걸린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주변에 휩쓸리는 사람은 대개 스스로의 일을 가장 등한시하기 마련입니다. 등불의 바로 아래가 가장 어두운 것과 같은 이치이죠.”
그러니 이교도들은 계속해서 때를 노리며, 티스베를 유인해 왔을 것이다.
그녀가 많은 증거와 정황을 거쳐 바로 이 순간에 이르는 것을.
“……내가 재앙으로써 무르익기를 바랐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이렇게나 내가 재앙이 되리라는 사실이 명확해져 가는데, 성하는 여전히 절 죽일 생각이 없으신 건가요?”
“물론입니다. 저는 영애께서 훌륭한 성녀시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니 말입니다. 무엇보다 말씀하신 대로라면 영애께서 재앙이 되더라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더더욱 경계할 이유가 없군요.”
칼뱅이 하는 말은 매끄럽기 그지없었다.
어찌나 매끄러운지, 티스베가 지금 당장 듣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 주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으니까.
“영애께서 수고해 주신 것도 있고, 저희 측의 사정도 있으니 이교도를 찾는 데에는 물심양면으로 협력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제 짐작으로는 저희가 찾기 전에 그들이 먼저 영애를 찾아올 것 같군요.”
“아,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티스베가 바로 칼뱅을 찾아온 것이었다.
이제 더는 마물을 찾니 뭐니, 빙 돌아갈 필요가 없으니까.
신전의 인력과 능력을 동원할 수 있다면 이교도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찾아내야죠. 그쪽에서 먼저 찾아오게 된다면 분명 내가 뭔가에 말려들고 있다는 걸 테니까.”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칼뱅의 표정이 묘했다.
“영애께서는 참 특이한 분이시군요. 보통은 그것보다 먼저 생각나는 게 있을 텐데요.”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다는 건가요?”
“그보다는, 너무 하찮게 여기는 점이 있다고 해야겠지요. 영애께서는 늘 스스로에게만은 지나칠 정도로 관심이 없으시니.”
이교도들이 여태 티스베의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다가올 수 없었다면.
반대로 그들이 접근하는 시점에는 티스베가 철저하게 고립되었다는 뜻이 된다.
“즉, 조우한 이후에 말려들고 있을 것을 걱정하는 건 이미 늦은 일이라는 겁니다.”
이교도들과 조우하게 되면, 이미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부디 영애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요.”
덧붙여진 칼뱅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교황이라는 지위가 고작 신탁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얻은 것은 아니었던지, 칼뱅은 통찰력이 좋았다.
하여 그 말을 귀담아 들으면서도, 티스베는 반신반의했다.
‘내가 그렇게 고립되는 순간이 올 거라고?’
대체 언제, 어떻게?
‘에스텔이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내가 매도당하는 일이 또 생기기라도 하는 걸까.’
하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소어도, 에스텔도 있는데.
고립될 일은 역시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티스베는 살바토르 성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는 까맣게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