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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103화 (103/121)
  • 103화

    사이벨의 죽음을 접한 이후, 티스베는 수도에 다녀왔다.

    물론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으니 아무도 모르게.

    그녀가 굳이 먼 수도까지 다녀와야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사이벨의 죽음에 대해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서.

    “이 정도면 타살이 확실하네.”

    “그리고 이교도의 소행도 확실하다고, 신전이 인정한 바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이긴 하지만요.”

    마흘론이 티스베의 명령에 미리 정리해 둔 서류를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마히, 왜 이런 정보가 이제야 나온 거야?”

    “아시겠지만 성역에서 일어난 일은 신전이 책임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 멀쩡했던 주교가 죽었으니, 신전도 더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겠죠.”

    신전은 숨기는 비밀이 많았다. 이교도에 관한 것 또한 개중 하나였다.

    사실 그들 손으로 파문한 이단들은 그 자체로 신전의 치부나 다름없는 일.

    신전 입장에서는 굳이 떠벌리고 싶지 않을 것도 당연했다.

    “무엇보다…… 이번에 주교를 죽인 이교도가 여태까지 저희가 알던 이교도와 다르기 때문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던 이교도와 다르다고?”

    “예. 이교도들이 그들의 교단을 두 개로 분단한 건 알고 계시다고 했죠? 그게 단순히 외부 활동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닌 모양이더군요.”

    엄밀히 말하자면 이교도들이 연구하는 힘을 지니지 못하는 이들만 외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분배한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추구하는 힘이 무엇인지 드러나는 것을 경계한 까닭이리라.

    “생각해 보면 성역에서 만났던 이교도들은 신전의 사제들과 다를 바 없는 힘을 쓰고 있었지. 내가 모르는 힘은 찾아볼 수 없었어.”

    “예. 신전에서 한 말에 따르자면 마물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이교도 내부에서도 아주 극소수일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겉으로 조금 드러난 것만 봐도 무시하기 힘든 힘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이고요.”

    마흘론은 그렇게 말하며 이 정보들을 입수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 떠들었다.

    이 정보들은 조디악에서도 팔지 않는 내용이니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는 것에 대해서도.

    물론 티스베는 그 말을 지킬 생각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공유해 줘야겠지.’

    에스텔은 일단 티스베와 같은 배를 탄 상황이니 말이다.

    무엇보다 에스텔은 마물들을 퍽 아끼는 편이기도 했으니, 이 정도는 알려 주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마물들이 그동안 사라졌던 게 이교도들의 소행일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흑마법사들과 이교도들이 손을 잡고 마물들을 잡아댔던 거라고 하는 게 옳겠지만, 그렇게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는 일.

    “아마도 지난번 말했던 시간을 조작하는 마물을 찾는 게 목표겠죠. 당신이 수소문했을 때는 찾지 못했다고 했죠?”

    “네. 아무리 물어도 아는 친구가 없더라고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이교도들도 찾지 못했을 테니까. 시간을 조작하는 힘을 갖게 된다면 분명 재앙…… 그 이상도 될 수 있을 테니 무조건 그 전에 찾아야 해요.”

    에스텔은 그 말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랄까,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한 절망감에 발을 디딘 것 같은.

    “정말 그런 누군가가 생긴다면, 저희가 살고 있는 시간은 어쩌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겠죠.”

    일단 티스베가 가진 기억만으로도, 그들이 모르는 시간대가 존재한다는 건 확실했다.

    그걸 미래로 만들지 않는 것이 그들의 목표인 셈이고.

    티스베가 여상하게 대답하자 에스텔은 잠시 말을 잃었다.

    마치 무언가를 되짚어 보는 것 같은 표정.

    “이교도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시간을 조작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은 그렇겠죠.”

    “그럼, 그들은 과거의 시간을 재현하는 게 목적인 걸까요?”

    에스텔의 질문에 티스베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교도들의 목적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목적, 이요?”

    “네, 목적이요. 대체 뭘 하고 싶어서 시간을 조작하는 힘까지 필요한 걸까요?”

    “그건…….”

    모르겠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에스텔의 말은 생각지도 못한 맹점을 짚고 있었다.

    ‘단순히 재앙에 대해서만 생각해 봤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재앙이 되는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해 왔다.

    모든 정황과 상황이 자신을 재앙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과거를, 아니, <괴물꽃>을 재현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원작에서 재앙이 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마물들의 반응과 되찾은 기억, 성좌들의 말로 미루어 보아 이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괴물꽃>과 되찾은 기억에 따르자면 티스베는 과거 한 번 죽었다.

    그렇기 때문에 재앙을 만들어 낸 이들은 시간을 조작하는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티스베를 부활시켜 재앙으로 만들어야 했으니까.

    ‘왜 하필 나였던 거지?’

    그냥 살아 있는 사람을 재앙으로 만들 수도 있지 않았나?

    아니, 애초에 그들에게 재앙이 필요한 이유가 뭐지?

    “……세력을 늘리고 싶어서? 아니면 자기들을 파문한 신전에 대한 복수?”

    티스베가 떠오르는 대로 짐작을 내뱉었지만, 어느 것도 핵심에 닿아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 에스텔이 말한, ‘과거를 재현한다.’는 쪽이 더 핵심이라고 여겨질 만큼.

    “이교도들이 과거를 재현해서…… 얻는 이득이 있나?”

    도저히 알 수 없다는 듯 티스베가 중얼거린 찰나, 에스텔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 자체가 목적인 건 아닐까요?”

    “……네?”

    “그러니까, 음…… 원래 의견을 부정당한 사람들은 자기 의견이 옳다고 증명하고 싶어 하잖아요.”

    “그렇죠?”

    맞긴 한데, 그게 갑자기 왜?

    “이교도들도 어떻게 보자면 그런 거잖아요. 사상을 부정당하고 쫓겨난 사람들. 그러니까 어쩌면 자기의 믿음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해서요.”

    이교도들도, 흑마법사들도 결국 추구하는 바가 같다면 증명하고 싶은 바 역시 같을 것이다.

    “경전을 보면 그런 구절이 있잖아요. 신이 재림할 것이며, 우리는 구원을 기다린다. 그러니까 이교도들도 신에 필적하는 존재를 만들어서…… 자기들의 믿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우당탕!

    에스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자가 요란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티스베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선 까닭이었다.

    에스텔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이 있었다.

    사이벨의 죽음에 대해 읊어 주던 마흘론이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던 말.

    “그러고 보니 이교도들이 다들 같은 말을 했다던데요, 우리는 기다린다고. 뭘 기다리나 했더니, 이런 걸 기다렸던 걸까요?”

    우리는 기다린다니, 너무 평이한 문장이었다.

    이교도들이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있노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문장.

    그 바람에 누구도 눈치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읊고 있는 것이 경전의 구절이었다는 사실을.

    [별이 죽으면 무엇이 되는지 알아?]

    [희망은 필히 절망을 낳는 법이지.]

    호수 밑바닥에서 들었던 말이 왕왕 머릿속을 울렸다.

    그 말을 들은 이후 몇 번을 고민해 봐도 제대로 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던 그 물음.

    ‘별이 죽으면 블랙홀이 생기지.’

    희망이 죽으면 절망이 탄생하고, 구원은 또한 종말과 등을 맞대고 있을지니.

    “그들은…… 종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만약 신전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신전에서 버림받은 이단들이 붙들 곳은 종말의 바짓가랑이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신격화하기에 가장 좋은 대상이 누구일까.

    한때는 별의 탄생이라고 추앙받았던.

    그러나 한순간에 온 제국을 속인 사기꾼이자 희대의 악녀로 몰락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성녀.

    세상에 대한 증오심으로 똘똘 뭉친 채 죽어 간 그녀의 부활이야말로…….

    “……신의 재림.”

    티스베는 멍하니 중얼거렸다가, 제가 뱉은 말에 도리어 놀라 입을 가렸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명확해진 이상 마냥 놀라고 있기만 할 틈은 없었다.

    ‘만약…… 정말로 그들이 나를 이용해서 재앙을 불러오고 싶어 한다면.’

    그렇다면 티스베가 당장 해야 할 것은 시간을 조작하는 힘을 가진 마물을 찾는 게 아니었다.

    그건 눈속임일 뿐.

    진짜로 해야 하는 일은 따로 있다.

    모든 일이 점점 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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