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소어는 더 이상 그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자문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존을 확인하려 들지 않았고, 더 나아가 스스로의 인간성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
티스베가 바로 그 모든 종착지였으므로.
물론 소어 또한 가끔은 자문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홀로 키워 온 외사랑이 마냥 달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왜 하필 티스베였을까.’
차라리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편했을 것을.
티스베를 사랑해 온 모든 순간 그는 고통스러웠다.
금수로서 살 수 없었기에 그러했고, 죽음을 바랄 수 없기에 그러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다면.
모든 걸 놓아 버린 채 살 수 있었다면 괴로울 일도 없었을 텐데.
티스베를 처음 만났던 그날 그 다정함을 몰랐다면 제 지독한 처지가 사무칠 일도 없었을 텐데.
그렇게 잘못 없는 이를 향한 마음을 숱하게 탓한 끝에야 그는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소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움켜쥔 동아줄이었다는 사실을.
살아간다는 것의 본질은 고통에 있다.
우리가 통증을 느낌으로써 위험을 경고 받고 삶의 감각을 되새기듯, 살아간다는 것은 본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인 셈이다.
그러니 소어의 사랑이 고통스러운 것은 어쩌면 자연한 일이다.
그는 사랑에 멱을 붙들려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티스베를 사랑함으로써 소어는 살아남았다.
그의 생존은, 그가 가진 모든 인간성은 전부 티스베에게 귀속되었다.
“제가 당신을 욕심내지 않았더라도 저는 늘 당신께 저당 잡힌 삶을 살았을 겁니다.”
만약 소어가 티스베의 약혼자가 되는 행운을 누릴 수 없었다면.
그는 평생 신전을 들여다보며 신실하다는 말을 듣고 살았을 것이다.
이따금 신문에 실린 티스베의 투박한 초상화를 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을 것이고.
티스베가 당하는 부당한 일에는 여전히 분개했으리라.
“당신은 제 유일한 통증이자, 또한 유일한 감각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며, 소어는 티스베의 손바닥에 낯을 묻었다.
수면에 입술을 대어 보듯 아주 조심스럽고 가벼운 접촉.
호수에 돌을 던지면 수면에는 파문이 일어도, 정작 돌은 흔들림 없이 가라앉기 마련이다.
작금의 소어 또한 그러했다. 티스베에 대한 사랑이 길었던 만큼 그의 고백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로지 그 돌을 맞아 흔들리는 수면만이 남아 있을 뿐.
티스베는 제게 고개를 수그린 가여운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녀가 가진 유일한 장애물.
소어의 고해를 들으며 티스베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아마 평생이 가도 소어의 사랑을 따라잡을 수 없겠지.’
그녀가 아무리 소어를 사랑하게 되어도 그건 불변할 사실일 것이다.
왜냐하면 티스베에게는 그녀 스스로보다 소중한 것이 없었으니까.
소어의 사랑은 스스로를 연소해 빛을 내는 종류였다.
그는 제 온몸을 불살라 티스베에게 건넬 것이다.
그러나 티스베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제 몸을 불살라 소어에게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까 봐 평생을 경계할 터였다.
아무리 소어를 잃고 싶지 않다고 한들, 그녀의 마음은 딱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소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겠지.’
이런 부조리를 알고 있다면 소어를 놓아 주어야 옳을 텐데, 도저히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다.
소어의 사랑이 결국 스스로를 전부 불태우게 된다면 그 잿더미마저도 제 것이고 싶었다.
그러니 가여운 사내일 수밖에.
‘당신은 내가 유일한 통증이자 감각이라고 했지.’
하지만 나는 가진 것도 많고 느낀 것도 많아 당신이 유일해질 수 없다.
그러나 당신에게 유일이라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욕망이리라.
제 눈앞에 있는 것이 기필코 자신을 재앙의 구렁텅이로 빠트리게 될 것을 알면서도 필히 움켜쥐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으니 이걸 욕망이 아니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가진 것도 많고 느낀 것도 많지만 여태껏 그 무엇도 제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티스베가 야망도 욕심도 많은 인간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조금 우스운 소리이겠으나, 실로 그러했다.
‘나는 이곳에서 쫓겨날 운명이었으니까.’
전부 잠시 빌려 쓰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모두 에스텔에게 돌아갈 것인데, 잠시 제가 손을 대었다가 놓게 될 거라고.
언젠가는 모두 내 손을 떠나갈 것이니 욕심도 미련도 가지지 말자고.
그렇게 모든 것을 손에 쥐고도 가진 게 없는 역설을 살았다.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해, 자신이 다만 지독하게도 욕망 없는 인간이구나 하고 생각해 왔다.
적어도 소어와 칼데일에서 재회하기 전까지는.
티스베는 소어의 낯을 손끝으로 들어 올려 그 콧잔등 위에 입 맞추었다.
“……티스베.”
탄식과도 같은 호명이 이어지자, 티스베는 대답 대신 고개를 기울여 그 입술에 입 맞추었다.
정말 접촉에 불과한 입맞춤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소어의 숨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가여운 몰골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 거예요, 소어.”
“……감히, 제가…….”
“당신 옆자리도, 당신도, 당신 목숨까지 전부 내 거예요.”
“원하신다면 기껍게 드리겠습니다.”
“그래 준다면, 당신은 내가 가진 유일한 무언가가 되겠죠.”
티스베가 그렇게 속삭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를 선택함으로써 제 앞길이 방해받는데도 좋다.
그 또한 제 선택이리니.
고난 없는 쟁취는 본디 의미가 없는 법.
‘어쩌면 이 마음도 조작된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가져 버린 마음을 어쩌겠는가.
이로써 앞날이 가로막혀 재앙이 되는 결말이 따른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 밤,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 * *
그래.
분명 그런 날이 있었다.
이대로 재앙이 된다고 해도 좋을 것 같았던 날.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제법 충만하였던 밤.
비극을 예견한다고 말하였어도 그렇게까지 최악을 상정하지는 않았던 순간이 있었다.
‘그게…… 정말로 내가 재앙이 되어도 좋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하고, 티스베는 멀뚱히 서서 생각했다.
왜 매번 좋은 일 다음에는 나쁜 일이 오는 거지?
인생사 새옹지마라지만, 소어랑 달콤한 시간을 좀 보냈다고 이렇게 곧장 나락으로 처박을 필요가 있나?
차라리 달콤을 전부 맛보기라도 했다면 또 몰라.
‘아직 달콤의 ㄷ밖에 안 해봤단 말이야!!’
손만 잡고, 키스만 좀 해 보고, 어?
이 빌어먹을 자식아!!!
티스베의 내적 절규가 우렁우렁하게 울려 퍼지는 이곳은 재앙의 문턱.
분명 달콤했던 순간이 이렇게 변모하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러니까, 티스베가 에스텔을 다시 찾아갔던 그 순간으로.
* * *
에스텔은 이번에도 과일 바구니와 함께 찾아온 티스베의 설명을 모두 들은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교도들이 이 일에 연관이 있을 거라는 말씀이세요?”
“그래요.”
“정말 놀랍네요. 이교도들은 다 소탕된 줄 알았는데…….”
“소어의 말로는 밖에서 활동하는 지부와 숨겨진 지부가 따로 있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위장용이겠죠. 규모를 너무 얕본 거 같아요. 아무리 신전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는 해도 성녀가 둘이나 공표된 시점이라 종교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지는 않았을 텐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 이단이 많이 있는 건지-”
“저, 저…… 공녀님.”
“네?”
“그…… 과일, 제가 깎으면 안 될까요?”
티스베는 대답 대신 잠자코 자신이 깎은 과일을 내려다보았다.
울퉁불퉁한 것은 물론이고, 깎아 낸 껍질이 너무 두꺼워서 과육은 밤톨만 해져 있었다.
티스베는 입매를 일자로 만들었다가, 손에 들었던 과도를 내려놓았다.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공녀님도 못 하시는 게 있었구나 싶네요. 사실 당연한 건데 말이에요.”
“매번 깎아 주던 사람이 따로 있어서…….”
티스베가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사실 그녀의 과일 깎기 실력이 원래 이렇게까지 나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예, 뭐…… 아가씨가 직접 깎아 주셨다는데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잘 먹겠습니다.
라고 말하던, 과일 바구니를 챙겨 준 그 장본인을 생각하느라 껍질이 두꺼워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잘라 내고 있었던 까닭이다.
……정말로.
그래서 그를 왜 떠올리고 있었느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그나저나 이교도들이 추구하는 게 마물의 힘이었다니, 놀랍네요.”
이 소식을 전해 준 장본인이 바로 그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