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깨달음이 티스베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왜 여태 이걸 연관 지을 생각을 못 했지?’
생각해 보면 이교도나 흑마법사들이나 본질은 같았다.
마법사들과 신전의 사제들의 본질이 같듯 말이다.
‘금지된 힘을 탐구하려 한 죄로 쫓겨났다는 건 똑같지.’
하지만 신전의 사제와 마법사를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하는 이가 없듯, 티스베 역시 그랬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괴물꽃>에서는 이교도들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기도 하고 말이다.
‘거기서는 에스텔을 방해하는 악역 정도로만 드러나고, 무엇보다 세력이 약하기도 했지.’
그래서 흑마법사들과는 더더욱 같은 선상에 두지 않았다.
조무래기 악역과 최종 흑막이 같은 무리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방금 소어가 한 이야기 때문에 생각이 뒤집혔다.
‘내가 눈치 채지 못한 암막이 소설에 존재했을 수도 있잖아.’
지금 사이벨이 속한 교단과 이교도들이 숨겨 놓은 또 다른 교단이 존재하는 것처럼, 독자의 눈을 속일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리고 흑마법사들과 이교도들이 손을 잡는 경우의 수는 그 이상으로 존재했다.
‘그럼 나한테 이걸 알려주고 싶었던 건가?’
티스베는 혼란스러워졌다.
절대적인 존재의 개입이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점점 더 확실해져 가는데, 그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으니 혼란스러운 것이다.
‘대체 언제부터 개입한 걸까.’
처음에는 살바토르에 왔을 때, 신탁이 내려온 그 즈음부터 개입이 존재했다고 생각했다.
여태까지 그녀가 겪어온 일들과 재앙은 썩 연관이 없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이교도들부터가 연관이 되어 있었다면, 어쩌면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농간에 놀아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몰라.’
대체 무엇을 위해서?
정말로 나를 재앙으로 만들기 위해?
‘……적어도 놓친 게 무엇인지는 확실해졌네.’
이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불행으로 여겨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티스베가 짐작한 대로 알 수 없는 그 절대적인 존재가 소어를 걸림돌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그렇겠지.’
소어가 아니었더라면 티스베가 이곳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티스베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하면서까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건 소어가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또한 처음부터 이런 감정이었던 것은 아니다.
몇 번이고 티스베를 최우선으로 놓았던 소어의 선택들이 없었더라면.
티스베에게 보여 주었던 그 절실했던 감정들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결코 이런 결말에까지 다다르지 못했을 테니까.
그랬기에 전에는 자신이 가진 감정에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저런 과정이 티스베가 본인의 감정을 확신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이 사실은 조작된 것이라면?
티스베에게 소어라는 걸림돌을 만들기 위해서 절대적인 존재가 개입해 온 것이라면.
그래서 그녀가 저버릴 수 없는 무언가를 억지로 갖게 만든 것이라면…….
“……베. 티스베?”
멍한 상념을 파고드는 호명에, 티스베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갔다.
자신이 언제고 애정을 아끼지 않았던 얼굴이 보인다.
‘……아.’
어렴풋이,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소어가 저렇게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안절부절못할 때는 오직 하나뿐이니까.
“제가…… 당신께 심려를 더해 드린 겁니까?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을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부디 말씀을 주저치 말아 주십시오.”
소어는 아무래도 본인이 이교도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성역에서 있었던 테러 미수 사건에 대해 티스베에게만큼은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때 티스베가 죽인 이교도들을 제외하고 별다른 인명 피해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의 일로 티스베가 심한 내상을 입었던 것이 큰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그래서 여태 함구하고 있었던 사실을, 티스베가 알게 되면서 마음이 불편해졌다고 생각한 건지.
“아무래도 그 일에 충분히 사죄를 드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제대로 확인했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원하신다면 무슨 벌이라도 받겠습니다. 그러니, 티스베. 부디-”
툭.
티스베의 뺨을 타고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소어가 저렇게 스스로의 죗값을 자청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덜덜 떠는 건 티스베가 눈물을 보일 때뿐이었으니까.
고작 그 한 방울에 소어는 비 맞은 눈처럼 부스러졌다.
그는 티스베가 웃을 때면 충족감에 어쩔 줄 모르고, 울 때면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어쩔 줄 모르게 되는 사람이었다.
지난번 상록수들이 울창히 뻗어 있던 숲에서는 추위를 핑계 대어 그녀를 끌어안을 수라도 있었다지만.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역시 당장이라도 제 목을 매달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소어.”
눈물이 엉겨 붙은 속눈썹을 가지런히 내린 티스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를 사랑해요?”
정말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리게 조여드는 질문이었다.
* * *
소어에게 티스베를 사랑하는 것은 마치 해가 뜨고 달이 지듯 당연한 일이었다.
봄이 오면 철새가 회귀지를 찾아오고, 들판이 저녁놀에 붉게 물드는 것처럼.
하여 그는 지극히 당연한 것을 질문 받은 직후.
어떤 대답을 내어놓아야 좋을지 몰라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혹, 신뢰를 드리지 못했다면,”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당장 울음이 섞여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떨리던 목소리를 자르고, 티스베가 손을 내저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확신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게 궁금한 거예요.”
정말 갑작스럽고도 당혹스러운 질문이었다.
조금 전까지 이교도의 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더니, 돌연 묻는 게 자신을 사랑하는 이유라니.
“난…… 세상에 인과가 존재하지 않는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하물며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는 그 하나하나에도 이유가 있잖아요.”
개미가 설탕을 들고 나르고, 갓 태어난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는 그 사소한 것에도 이유가 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감정에 어떻게 이유가 없을 수 있을까.
당연하지만, 소어를 향한 티스베의 감정에도 물론 이유가 존재했다.
‘워낙 천천히 스며들어서 정확히 어느 순간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어에 대한 감정을 확신한 이유는 있었다.
“당신이랑 처음 입 맞추었던 순간에, 당신을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돌이켜 보자면 그것은 과거에도 여러 번 존재한 감정이었다.
망명을 생각할 때도. 성역에서 양자택일의 순간을 마주했을 때도.
하물며 소어가 재판장에 난입해 자백한 순간에도.
“생각해 보면 당신 때문에 울기는 했어도, 당신이 싫다거나 미운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저 당신이 다시 보고 싶었다.
왜 그래야 했던 건지 이유를 묻고 싶었고, 부디 그것이 합리적인 이유이기를 바랐다.
당신이 나를 배신한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당신을 잃어야 할 테니까.
정말이지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잃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만약 이것이 어떤 절대적인 존재의 개입으로 인해 만들어진 감정이라면.
‘내가 이 감정을 신뢰할 수 있을까.’
티스베는 도저히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소어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엇으로 당신의 사랑을 확신했는지.
대체 그의 무엇이 죽음의 순간에조차 자신보다 티스베를 더 우선하게 만든 걸까.
티스베의 말이 끝날 즈음 소어는 아주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때처럼 티스베의 일에 평정을 찾지 못하고 시종일관 불안정한 느낌이 아니라, 아주 고요하고 단단한 느낌.
“티스베. 저는 당신과 있을 때 제가 사람이라는 걸 느낍니다.”
적막의 고백이 존재한다면, 이런 모양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소어는 말했다. 전쟁터를 전전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스스로의 가치를 묻게 된다고.
마물과 짐승, 인간이 모두 그저 칼 대면 썰려 나갈 목숨으로 보이게 되는 순간.
무심코 자문하고 마는 것이다.
저들과 나는 얼마나 다른가. 나는 살아 있을 가치가 있는가.
내가 인간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맞나.
여전히 그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당신이 존재하기에 저는 살아 있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