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재앙의 새빨간 눈동자에서 그와 꼭 닮은 새빨간 눈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네년이 모든 걸 망쳤다. 네년이!]
그토록 악에 받친 얼굴로도 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대체 무엇이 그렇게 억울해서?
“내가 뭘 망쳤다는 거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죠?”
[네가 알고 있는 그 일들이 있었지. 네가 내 인생을 망가뜨린 일!]
재앙의 언성이 높아지자, 주변의 기류가 일렁이며 오싹한 감각을 자아냈다.
[내가 이들을 죽인 게 화가 나고 억울하던가? 개죽음을 당한 이들이 마냥 불쌍하기만 해? 내게는 동정 한 번 준 적 없는 버러지 같은 목숨들이 그렇게 아깝더냐?]
“그래요! 모든 생명은 소중해요! 당신은 한때 추앙받던 성녀였으면서, 어떻게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거죠?”
[추앙받던 성녀? 하하, 아니지. 모든 이들의 짐꾼이었지. 저들 대신 칼을 맞아 줄 짐꾼.]
“그건 당신만의 생각이죠. 많은 사람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데요! 최소한의 인간성이라는 게 없나요?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갔는데…….”
말을 잇던 에스텔은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맞닥뜨린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당신이…….”
한때 성녀라고 불렸던 사람이 어떻게 이런 짓을 벌일 수가 있을까.
[억울해 할 거 없다. 그들이 나를 무참히 버리지만 않았어도, 네년만 없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죽어 버린 구원은 절망을 낳는다.
에스텔만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는 재앙의 증오 어린 목소리에, 에스텔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화가 났다.
에스텔은 티스베를 딱히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존경했었다.
에스텔은 티스베가 성녀로 있을 당시 그녀의 도움을 받은 영지 출신이었으니까.
자신이 그녀의 모든 걸 빼앗아 갔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지만 않았어도.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 하지만 않았어도 그들의 관계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아니, 재앙이 탄생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티스베만 제대로 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 모든 절망이 고작 저 한 사람이 가진 잘못된 생각 때문에 시작됐다는 사실이 에스텔을 화나게 했다.
“나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이겠지. 당신이 어떻게 살아났는지는 몰라도, 이번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할 거야.”
[내가 느꼈던 절망을 네년도 똑같이 느끼게 해 주마.]
재앙이 사납게 입꼬리를 비틀며 그렇게 말하자, 그녀의 주위로 검은색의 원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금씩 회전하며 끄트머리를 점점 날카롭게 뽑아내더니, 끝내는 마름모 모양의 무기가 되어 당장이라도 쏘아질 것 같은 형태를 갖추었다.
에스텔 역시 지지 않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수도를 떠나기 직전 견습 사제나 다름없었던 그녀의 능력은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사뭇 다른 양상으로 변모해 있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콰앙!
두 사람의 능력이 충돌하고 빛과 어둠이 쇄도하는 찰나.
마물들이 훔쳐 온 기억은 그렇게 끝이 났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에스텔은 더 이상 ‘그 광경’ 속에 있지 않았다.
“헉, 허억…….”
에스텔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 그렇게 생생했던 광경은 다 거짓이었다는 것처럼,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셰일로의 여관방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에스텔만을 바라보고 있는 마물들이 앞다투어 에스텔을 부축하며 물었다.
[에스텔! 다 본 거야?]
[어, 어, 어땠어?]
[뭘 보고 왔어?]
대답이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건만, 에스텔은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서, 침대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에스텔은 티스베에 비해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보고 온 것이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공녀님이, 재앙이 되는 미래.’
그게 정말 미래일까? 아니면 또 하나의 가능성?
확실한 건 자신이 본 꿈속의 티스베가 세상을 원망하고 또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에, 에, 에스텔, 마, 말해 줘. 뭘 보, 보고 온 거야?]
[그걸 본 건 너뿐이야, 에스텔!]
“……방금 그걸 공녀님의 꿈에서 훔쳐 왔다고 했지. 그럼 공녀님은 저걸 보지 못하셨을까?”
[아마도 그렇겠지?]
[일단 방금 그건 너만 본 거야!]
[궁금해, 알려 줘!]
에스텔은 주저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새카만 재앙이 지상의 모든 걸 죽이고 있었어. 나는 듣도 보도 못한 능력을 썼고…….”
[그 여자는?]
“……나를 증오하면서 죽었어. 내가 그분의 모든 걸 망쳤다고. 날 죽이려고 했대.”
차마 티스베가 재앙이 되어 있었더라는 이야기는 할 수가 없었다.
에스텔이 적당히 뭉뚱그려 이야기했는데도, 마물들은 분개해서 요란을 떨기 시작했다.
[그래! 그게 그 여자의 본심이야!]
[너, 너를 주, 주, 죽이려고!]
[에스텔을 지켜야 해!]
모두가 웅성거리는 와중, 뱀 형태의 마물이 조용히 에스텔이 앉은 침대 다리를 타고 올랐다.
그리고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에스텔. 그 여자가 너한테 뭘 부탁하고 갔지?]
“시간을 다룰 수 있는 마물을 수소문해 보라고…….”
[그래. 그리고 본인은 쏙 빠져 버렸지. 할 일이 있다고. 너한테는 제대로 얘기해 주지도 않고 말이야.]
그런 여자의 말을 네가 따라야 할 이유가 있을까?
[불쌍한 우리 에스텔. 우리는 너밖에 없는데, 그 여자는 널 이용할 생각만 하지. 그 여자 말을 따라서 너한테 도움이 될 게 뭐가 있겠어?]
“하지만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어. 너희도 알잖아. 마물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공녀님과 힘을 합쳐서 재앙을 막아야 해.”
[그러다 그 여자가 재앙이 되면?]
뱀 마물이 에스텔의 팔에 몸을 감기 시작했다.
[이 세상을 증오하고, 너를 미워하는 그 여자가 너를 이용해서 막강한 힘을 갖게 되면. 그게 바로 재앙이 아닐까?]
천천히 팔을 감아 타고 오른 뱀 마물이, 에스텔의 귓가에 쉭쉭대는 소리를 흘려 넣었다.
[그 여자를 믿으면 안 돼.]
조금 전 본 꿈과, 마물들의 웅성거림에 엉망이 된 에스텔의 머릿속.
뱀 마물의 음험한 목소리가 고요히 메아리쳤다.
* * *
똑, 똑.
낙숫물이 일정하게 차가운 돌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복도.
횃불에 먹인 기름 냄새가 만연한 죽음의 냄새를 먹어치우는 와중, 일렁이는 불그림자 너머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교단장님. 걱정하실 것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훌륭하다. 이대로만 하면 우리가 그토록 고대해 온 조우도 그리 머지않은 일이겠군.”
[필히 원하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가볍게 성호를 읊은 목소리가 통신을 종료하자, 이내 복도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물론 그는 아주 잠시였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말 없이 서 있던 사내가 고요를 짓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사나운 발소리가 화마처럼 복도를 태우고, 그는 머잖아 한 창살 앞에 멈추었다.
“사이벨.”
나직한 호명에, 어둠이 짓무른 창살 안쪽에서 불꽃 튀어오르듯 화드득 움직임이 튀었다.
“……교, 교단장님?”
쉰 목소리가 쇳덩이를 긁듯 삐걱이며 흘러나오더니, 후다닥 창살로 달려들었다.
사이벨, 한때 이교도들의 교주였던 그는 이제 시궁쥐와 벼룩에게 몸을 죄 뜯긴 몰골이 되어 창살 너머에 선 사내를 바라보았다.
“교, 교단장님! 교단장님! 아아, 교단장님…….”
사이벨의 눈동자에 환희의 눈물이 빠르게 차올랐다.
“와 주실 줄 알았습니다, 교단장님……. 저, 저희를 구원해 주시러…….”
“구원이라.”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갔다.
“사이벨 교주. 우리 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구원에 가까워져 있다. 그토록 고대하던 우리들의 구원과 조우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이야기지.”
“저, 정말입니까! 아아, 저희 교가 부흥할 날이 머지 않았군요. 정말 기쁩니다. 정말…….”
“하하, 그렇지. 사이벨 교주의 신실함은 나도 잘 알고 있는 바이니까. 이게 다 자네 교구가 온몸을 바쳐 순교해 준 덕분이지. 교단장으로서 이렇게 감사할 데가 없어.”
“아, 아아…….”
사이벨의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성역에서의 일로 붙잡힌 이후, 이대로 꼼짝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교단에서 이런 실수를 저지른 그들을 살려둘 리 없으니까.
그런데 교단장이 이렇게 찾아와 치하해 주다니.
“그럼, 저희도 이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물론이다. 다만, 그 전에 순교는 마무리지어야겠지.”
교단장의 입매가 가늘어지나 싶더니.
푹, 살 뚫리는 소리가 생경하게 귓가를 때렸다.
“정말 감사할 따름이야. 이렇게 교단을 위해 제 목숨을 바쳐 주니.”
그것이 사이벨이 본 생의 마지막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