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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98화 (98/121)

98화

눈앞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분홍색 머리칼이었다.

벚꽃처럼 흩날리는 에스텔 본인의 머리칼.

자기 자신이 눈앞에 보인다는 것에 놀라기도 전에, 에스텔은 제가 보고 있는 ‘자신’이 어딘가 낯설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에스텔이 겪어 본 적 없는 광경이었으니까.

주변은 전부 폐허였다. 아마도 숲이었을 이 장소에는 그저 움켜쥐어 터트린 모양새나 다름없는 사체들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군데군데 밑동이 남아 있는 나무들이 이 장소의 원래 모양새를 짐작케 하는 유일한 수단일 뿐이다.

이제 더는 숲으로 부를 수도 없고, 어떤 생명체도 남아 있지 않은 벌판 위에 에스텔이 서 있었다.

아니, 에스텔과 ‘그것’이 서 있었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빛마저도 집어삼킨 것처럼 그저 검고, 또 검기만 한 무언가.

존재만으로도 생물이 가진 원초적인 생존 본능을 자극하고, 세상의 모든 섭리를 부정하는 것만 같은…….

‘재앙.’

단순히 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에스텔은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게 재앙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재앙으로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신탁에서 말하는, 그리고 마물들이 두려워하는 재앙.

그것이 바로 저 광경 속 검은 무언가의 정체였다.

그러나 에스텔에게는 그 사실에 놀랄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

저 광경 속 에스텔이 울분에 찬 노호성을 터트렸던 것이다.

에스텔은 지금의 그녀라면 절대 짓지 않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분노와 슬픔에 가득 차서, 끓어오르는 살의가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그녀는 무기로 보이는 검은 무언가를 손에 든 채 울부짖었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여기에 있는 것들이 대체 뭘 잘못했다고!”

에스텔의 상태는 척 보기에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거친 전투를 마친 이후였던 건지.

입 안의 피를 퉤 뱉어 낸 에스텔이 결의에 찬 눈빛을 빛내며 입가를 훔쳤다.

“널 반드시 이곳에서 죽인다. 더는 이런 짓을 하게 내버려 두지 않아.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무기를 쥔 에스텔의 손등에 희게 뼈마디가 도드라졌다.

손잡이 위아래로 날이 드러난 형태의, 이 검은 무기는 그녀의 조력자가 최후의 순간에 그녀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어라, 그림자벌레가 아가씨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이거 잘 하면 실체화도 할 수 있겠습니다.

-실체화?

-예. 그림자벌레를 무기처럼 만들어서 쓰는 겁니다. 저랑 제 스승님은 아무리 해도 실체화까지는 할 수 없어서 포기한 겁니다. 그림자벌레가 도통 저희를 싫어해야 말이지요.

S급 정보 길드의 수장이었던 에스텔의 조력자가 본인이 혈관 속에 넣어서 기르는 ‘그림자벌레’라는 마물을 두고 한 말이었다.

마물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몸속에 기생시켜 피를 조금씩 주어 가면서 마물의 ‘암영’이라는 능력을 빌리는 거라고.

까딱 잘못하면 목숨까지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에 어지간히 통제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쓸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능력이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그림자벌레가 가진 능력은 암영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실 그건 그림자벌레를 몸속에 키우기만 해도 쓸 수 있는 능력이라, 이놈 입장에서는 정말 별것 아니거든요.

그림자벌레의 진정한 능력은 암막을 먹어치우는 능력이라고, 그는 말했다.

-북쪽 지방에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해가 지지 않는 시기가 있다고 합니다. 백야라고 하던가요? 거기서는 몇 달 간 해가 쨍쨍하다던데, 그게 그림자벌레의 포식 기 간인 셈입니다.

그 지방 사람들은 백야 현상을 너무 당연히 여기는 통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이, 그림자벌레들이 일 년에 몇 달씩 어둠을 잔뜩 포식하는 바람에 생겼다는 것을.

-그걸 우리 스승님께서 눈치채시고 한 놈 잡아온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돌아가실 때 저한테 이놈을 물려주셨었죠.

그래서 그는 자신도 다음 조디악의 수장에게 그림자벌레를 넘겨줄 생각이었다고 했다.

암영은 조디악을 운영하는 데 꼭 필요한 재능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놈이 아가씨를 이렇게 좋아한다면, 아가씨한테 넘겨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저는…… 조디악을 운영할 수 없는데요?

-그럼 조디악은 해산하는 거죠.

어차피 그림자벌레를 에스텔에게 줄 즈음에는 자신이 죽을 텐데 뭐가 걱정이냐며, 그는 구김살 없이 웃었다.

그리고 그림자벌레는 에스텔의 손에 있었다.

그마저도 조디악의 수장이 에스텔에게 이걸 넘기겠다는 의지로 아득바득 버텨 오지 않았으면 에스텔에게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야.’

저 절망스러운 것 때문에 대체 몇 번이나 좌절했던가.

재앙이 도래한 이후 세상은 그야말로 절망에 뒤덮였다.

섭리를 거부하고 재앙을 만들어 낸 무리가 사방에 선전포고를 했고, 재앙은 인근의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며 그 위용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에 대륙 곳곳을 떠돌아다니던 에스텔이 급하게 불려와, 마물 군단을 꾸려 재앙에 맞선 것 역시 여러 번이었다.

‘벌써 여러 사람이 죽어 나갔어.’

그 많던 마물들도, 사람들도 번번이 죽어 갈 뿐.

이제 에스텔의 이름으로 모을 수 있는 조력자도 더는 남지 않았다.

‘더 부딪힌다면…… 그건 개죽음이 되겠지.’

그러니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다음은 없는 셈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간 몇 차례의 전투를 통해 에스텔이 저 재앙의 약점을 파악했다는 것 정도였다.

‘지금은 그저 검은 형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저 주변의 빛까지도 재앙의 암막이 전부 장악하고 있는 탓에 검어 보일 뿐 그 형체가 실제로 검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자면 바로 그 암막 때문에 근처로 다가갈 수조차 없어, 공격은 고사하고 실체를 알아보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주 일순간이지만, 암막이 걷히는 순간이 존재했다.

바로 재앙이 힘을 쓰는 순간.

중심부의 암막이 잠시 걷히며 재앙의 형체가 잠깐이나마 드러난다.

‘정말 찰나긴 하지만.’

재앙이 다루는 어둠이 가장 옅게 덮인 부분이 바로 그 중심부라는 뜻이다.

그러니 재앙이 다시 공격을 시전하는 순간 그 중심부에 이 무기를 박아 넣으면!

‘그림자벌레가 암막을 잡아먹고, 실체가 드러날 거야.’

그러면 그때 저 재앙을 처단하면 된다.

에스텔은 마른침을 삼키고 무기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공기 중의 마나 농도가 달라지며 생명력이 순식간에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재앙이 힘을 쓰려는 징조.

‘여기서 머뭇거리면 안 돼!’

에스텔은 몸에 남은 힘을 전부 끌어내 땅을 박찼다.

예상대로 칠흑 같았던 재앙의 중심부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에스텔이 노린 바로 그 순간.

콰득.

그녀의 손에 들린 무기가 둔탁한 소음을 내며 재앙에게 박혀들었다.

‘됐다!’

성공을 확신한 에스텔이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섰다.

그 순간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주변을 둘러싼 암막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에스텔을 옭아매고 짓누르던 기류가 서서히 풀리고 있었으니까.

‘암막만 없다면 내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어.’

에스텔은 비틀거리며 재앙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녀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사람?”

암막이 걷히고 드러나는 재앙의 모습이 인간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공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은 낯이 익기까지 했다.

그 얼굴이 누구의 것이었던지를 알아차린 에스텔의 입에서 목소리가 대중없이 흘러나왔다.

“내가, 미친 건가……?”

자신이 미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머리색과 눈색이 바뀌어 인상이 달라진 탓에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하지만 어떻게 저 얼굴을 잊을 수가 있을까?

“……칼릭스트 공녀……?”

자신을 죽이려다 죽은 사람의 얼굴인데.

그러나 에스텔의 눈앞에 있는 낯에는 기억 속 찬란했던 은발도, 어떤 호박보다도 반짝이던 눈동자도 더는 남지 않은 채였다.

조금 전까지 그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칠흑과도 같은 검은 머리칼과, 증오를 품은 새빨간 눈동자만이 남아 에스텔을 노려보고 있을 뿐.

재앙의 목에 그어진 붉은 줄만이, 한때 저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에 에스텔이 경악하며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났을 때.

[칼릭스트 공녀라고?]

재앙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재앙의 얼굴이 경멸로 일그러졌다.

[에스텔. 감히 네년이 내 앞에서 그 호칭을 입에 담아?]

그 낯에 담긴 것은 그저 확연한 살의.

에스텔을 향한 격렬한 증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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