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시간을 돌리는 게 가능하다면 부활에 대한 것도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시간을 돌리는 건 이미 일어난 사실을 부정하는 행위니까.
그리고 단순히 시간을 돌리는 걸 넘어, 이미 일어난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한다면 많은 것들이 가능해진다.
회귀라거나, 누군가의 기억을 지우는 것도.
“하지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진작 밝혀졌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누가 밝힐 수 있었겠어요? 마물이 나타나면 에워싸고 경계하는 것밖에는 못 하는 게 사람인데.”
애초에 에스텔이 등장하기 전까지 마물과 소통을 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한 세상이었다.
단순히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짐승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길들이는 게 가능하지만, 마물은 불가능했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마물들은 인간과 소통할 의사가 조금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원작에서도 에스텔이 성녀라고 추앙받는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
마물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그토록 각광받은 이유이기도 하고.
그러니 여태 마물들 중 누군가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밝혀낼 수 있을 리 없다.
‘마물을 연구할 생각을 해 볼 정도의 괴짜가 아닌 이상은.’
그리고 그런 괴짜들이 있다면, 분명 이단으로 취급받겠지.
예를 들어 세이즈에서 금단의 연구를 진행하고자 했던 흑마법사들을 내쫓았다거나, 신전에서 정체불명의 힘을 탐구하려 한 사제들을 파문하고 이교도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처럼!
생각이 그 즈음에 닿자, 티스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에스텔,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네, 네?”
“최대한 빨리 그 마물을 찾아야 해요. 여태 마물들이 사라졌던 일들을 생각해 봐요.”
티스베는 여태 그것이 흑마법사들이 금단의 실험을 하기 위해 마물을 잡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이유일 뿐.
사실은 특별한 힘을 지닌 개체를 찾기 위함이었다면?
상황을 이해한 에스텔의 낯이 차게 굳어 들어갔다.
“다, 당장 근방의 마물들에게 소식을 전해 볼게요! 날 수 있는 마물들의 도움을 받으면 근방에 이야기를 퍼트리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최대한 넓게 퍼트려 봐요. 내 짐작이 맞다면…… 분명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아마도 이 모든 건 우연이 아닐 테니까.
티스베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시선은 에스텔이 아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뭇 비장하기까지 한 그 시선에는 얼핏 착잡함이 물들어 있었다.
‘그래. 마물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야.’
그건 남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쥔 티스베만이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직감이었다.
이유를 설명하라고 하면 자신은 없지만, 너무 교묘하지 않은가?
“우연이 아니라는 건…….”
“신이라거나, 뭐 그런 존재가 우리를 유인하고 있는 거겠죠.”
마치 빵 조각을 길 위에 늘어놓고 아이를 유인하듯이 말이다.
단순히 우연이라기에는 모든 상황이 절묘하게 느껴졌다.
하필 티스베가 수도를 떠나 살바토르에 올 즈음 신탁이 내려오고.
마물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괴물꽃>보다 일찍 접하게 된 에스텔이 살바토르 인근의 셰일로로 향하게 된 것.
그렇게 에스텔이 잠복에 나서고, 그녀를 찾으러 온 티스베가 호수에 빠지면서 새로운 기억을 얻은 것까지도.
‘사실 직접적인 단서를 준 건 성좌들의 목소리였지만.’
그마저도 티스베가 호수에 빠졌던 여파로 앓지 않았더라면 접하지 못했을 이야기였다.
성좌들은 분명 티스베가 앓은 것이 기억과 연관이 있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그때 그 환영을 본 이후로…… 기감이 더 열린 걸지도 모르지.’
뭐가 됐든, 티스베는 이 일련의 사건들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느꼈다.
애초에 신탁이 존재하고 인간이 아닌 어떤 절대적인 존재들의 개입이 존재할 수 있는 세계에서 우연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저 이곳에서는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하니 우연이라고 생각할 뿐.
‘아마도…… 우리를 유인하고 있는 존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그 마물을 찾는 거겠지.’
재앙을 막기 위해서?
아니면 재앙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놀아나는 게 썩 기분이 좋진 않아.’
하지만 지금은 달리 방도가 없으니, 놀아나 줄 수밖에 없지만.
마냥 놀아나기만 할 생각도 없다.
티스베는 상념을 거두고 몸을 틀어 한쪽에 걸어 두었던 망토를 집어 들었다.
“공녀님? 어디 가시는 건가요?”
“아무래도 내가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티스베가 어깨에 망토를 두르며 대답했다.
가볍게 알레샤, 하고 호명하자 허공에 나타난 푸르스름한 형태의 금붕어가 반갑게 티스베 주위를 돌았다.
그녀는 금붕어의 몸통을 손가락 등면으로 슬슬 쓸어 주며 말을 이었다.
“분명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면, 전조가 존재했을 거예요. 단지 우리가 그걸 눈치채지 못한 것뿐이겠죠.”
전조 없는 폭풍은 없다.
그러나 교묘하게 전조를 감추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 세계의 미래를 알고 있는 티스베 한 명의 눈만 속이면 되는 일이니까.
‘방법은 많아.’
예를 들어 전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의 혀를 자른다거나.
또는 그녀가 전조를 눈치챌 수 없게끔 다른 일에 정신을 팔리게 만드는 것.
어쩌면 그 둘 모두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티스베는 이 모든 해답을 구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자의는 아니었지만, 아주 불운하게도 자신이 더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를 가로막고 있던 그녀의 약혼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금방 다녀올게요.”
말한 일은 잘 부탁할게요.
티스베는 그 말을 남기고는 금붕어를 따라 훌쩍 사라져 버렸다.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자세한 설명도 없이.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린 방 안.
에스텔이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가끔은 공녀님이 뭘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어.”
분명 자신이 아는 것보다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티스베는 도통 애기해 주지 않는다.
그들이 특별히 오래 알고 지낸 관계인 것도 아니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좀 더 얘기해 주시면 좋으련만.’
티스베를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결과 에스텔은 그녀가 유난히 홀로 가려 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동안은 티스베가 성녀로 살아온 까닭일까 싶었는데.
‘어릴 때부터 그런 꿈을 꾸고 계셨다고 했으니까.’
모두에게 버림받는 미래를 늘 그리며 살아온 사람이 곁을 잘 내어 주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사실, 이만큼이나 에스텔에게 공유해 준 것만으로도 티스베는 많은 용기를 낸 셈이었다.
에스텔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티스베를 아끼고 돕고 싶은 사람으로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뭐, 좀 더 가까워지면 얘기해 주시겠지.’
아니면 내가 좀 더 믿을 만해져야 하거나.
에스텔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 사실을 털어 버렸다.
아니, 털어 버리려 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에스텔 주변으로 몰려든 그림자가, 그녀에게 이런 말들을 속삭이지 않았더라면.
[불쌍한 에스텔. 이번에도 속고 있어.]
[그 여자는 널 믿지 않아…….]
[그 여자는 널 경멸해. 널 증오해. 그 여자를 믿으면 안 돼.]
“……얘들아. 또 그 소리야? 그건 오해야. 공녀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데!”
그림자 속에 녹아들어 있던 마물들이 굼실거리며 조금씩 부피를 키웠다.
어떤 마물은 나비와 같은 형태를 하고 날아다니고 있었고, 또 어떤 마물은 부엉이, 뱀, 생쥐 등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개중 생쥐 모양을 한 마물이 두 발로 꼿꼿이 섰다.
앞발에는 앙증맞은 무언가를 꼭 쥔 채로.
[에, 에스텔. 너는, 소, 속고 있어. 이, 이걸 봐! 내, 내가 그 여자 꿈에서 후, 후, 훔쳐 온 거, 거야.]
“……꿈에서, 훔쳐 온 거라고?”
[지, 직접, 보면 알 거야.]
시종일관 불안해 보이는 태도로, 한 순간도 고개를 가만히 두지 못하던 생쥐가 쪼르르 에스텔의 발치로 달려갔다.
그러자 부엉이가 날개를 퍼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그놈들이 그 여자 꿈을 못 훔치게 하려고 얼마나 기승이었는데!]
[우리 모두가 널 위해 훔쳐 온 거야! 어서 열어 봐!]
“대체,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꿈을 훔친다니.
에스텔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생쥐가 몸을 쭉 뻗어 내민 것에 손을 가져갔다.
커다란 먼지덩이처럼 보이던 것에 에스텔의 손이 닿자.
화악-!
먼지가 집채만 한 연기로 변해 에스텔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에스텔의 눈앞에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