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티스베는 곰곰이 기억에 남은 <괴물꽃>의 내용들을 떠올려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완결이 어떻게 났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
정확히 말하자면, 재앙이 등장한 이후부터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북쪽에 위치한 살바토르 영지 근처에서 재앙이라고 부르는 마물이 등장한 이후.
‘재앙’은 인간들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다녔다.
아마 따로 집계하진 않았지만 들짐승이나 마물들도 그에 포함되어 있었겠지.
단지 <괴물꽃>은 인간 시점이니 인간에 대한 얘기만 나왔을 뿐.
그렇게 에스텔은 마물들의 힘으로 ‘재앙’의 정체를 파악할 만큼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재앙이 금단의 실험을 통해 탄생했다는 걸 밝혀내지.’
그 뒤로는…… 기억이 안 난다.
확실한 건, 이만큼이나 이야기가 진전되는 동안 일찍이 죽어 버린 악녀 티스베에 대한 언급은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뿐.
‘그게 문제야.’
아예 티스베의 죽음 직후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티스베가 살아 있을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 볼 수 있을 텐데.
티스베의 죽음은 너무 확실했다.
아주 빌어먹게도 확실했다.
‘내가 부활을 하지 않는 이상 재앙이 될 가능성은 없단 말이지.’
부활을 하지 않는 이상…….
“…….”
그 즈음, 티스베의 사고가 우뚝 정지했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근데 부활, 불가능한 거 맞나?’
라는, 상상만으로도 두려운 생각이.
* * *
그로부터 며칠 뒤.
“부활이 가능한 마물이 있냐고요?”
에스텔은 뜬금없는 이야기를 들고 온 티스베를 보며 눈을 크게 깜빡였다.
티스베가 찾아온 것은 조금 전의 일이었다.
며칠 전 호숫가에서 주운 티스베가 다소 쌀쌀맞은 태도로 나간 이후, 에스텔은 다시 마물들 틈에서 잠복을 이어 가면서도 줄곧 티스베의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공녀님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걸까.’
티스베는 빈말로도 그렇게까지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쌀쌀맞은 사람도 아니었다.
특히나 에스텔에게는 이유 모를 친근함까지 표현할 정도로 그들의 사이는 돈독했다.
적어도 에스텔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티스베 역시 그럴 거라고 믿어 왔다.
그날 티스베의 시선을 목도하기 전까지는.
‘내가 뭔가를 잘못했던 걸까.’
자신을 보는 티스베의 낯 위로 뿌리 깊은 혐오감이 올라와 있었다.
단순히 경멸이라기보다는, 역겨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느낌.
착각이라기에는 너무도 선명한 감정이라 차마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고민에 잠긴 채 보낸 끝에, 조금 전 불쑥 티스베가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손에 과일 바구니를 들고.
“지난번에 그렇게 가 버려서 미안해요, 에스텔. 좀 더 일찍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몸이 많이 아파서…….”
티스베는 조금 멋쩍어 보였고, 많이 미안해 보였다.
바구니 안에는 에스텔이 한 번 본 적도 없는 희귀한 과일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 인근에서는 이런 과일이라면 씨가 말랐으니, 아마도 많이 신경을 써서 준비한 것이겠지.
그 사실 하나에 지난 며칠 에스텔을 괴롭혔던 불안은 사르르 녹아 버렸다.
“괜찮아요, 공녀님. 어서 들어오세요. 몸은 괜찮으세요?”
“이제 괜찮아요. 아마 호수에 빠진 영향인 것 같은데……. 그것 관련해서 말해 줄 게 있어요.”
티스베는 그렇게 말하며 운을 떼고는, 에스텔에게 여러가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사실 소어에게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
호수에 빠졌을 때 꾸었던 꿈과, <괴물꽃>의 이야기를 꿈으로 각색해서 말해 준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부활이 가능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요.”
“하지만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 아닌가요? 부활은…… 섭리를 거스르는 거잖아요. 신전의 경전에서도 그렇게 말하는데.”
“그렇죠.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섭리를 거스른 게 있다는 걸 알잖아요.”
섭리를 거스른 생물.
생물이되 생물이 아닌 것.
“……마물, 말씀이신가요?”
“그래요.”
티스베가 미동 없이 말을 받았다.
그렇게 대답하는 티스베의 시선은 에스텔이 아닌, 그 옆의 창을 향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회상할 때면 으레 나오는 그녀의 습관이었다.
아파서 에스텔을 찾아오지 못했던 그 며칠 간.
티스베는 줄곧 고열에 시달리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숱하게 오고갔다.
꿈인가 싶으면 현실이었고,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꿈이었다.
모든 것이 모호한 순간들에 티스베의 뇌리를 스쳐가는 것들은 대개 과거의 기억이었다.
티스베가 겪은 것들, 그리고 겪지 않은 것들 모두.
-그 하녀가 독을 탄 범인이었다네요. 아가씨만 한 동생도 있다면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어, 어머! 아가씨!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성녀니 공녀니 좋은 말은 다 듣고 살더니, 이젠 그렇게 무시하던 황자보다도 못한 꼴이 되셨군. 소감이 어때?
-네겐 더없이 실망했다, 티스베. 다시 내 앞에서 얼굴을 들 생각은 하지 마라.
몸이 아파서 우는 건지 서러워서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질 때면 눈이 떠졌다.
그럴 때면 으레 흐린 시야 너머 걱정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제 손을 잡고 있는 금발 청년의 얼굴.
이마저도 꿈일 거라 생각하면 견딜 수 없이 외로워져, 붙잡은 손을 꼭 움켜쥐었다.
아픈 와중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건지.
희게 뼈마디가 도드라질 즈음 어디선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왔다.
[저, 저거, 저래도 되는 거야?]
[이거 완전히 돌겠군. 어떻게 좀 해 볼 순 없겠나, 보병궁(물병자리)?]
[어쩔 수 없어……. 치료…… 안 됨…….]
[기억을 ……하는 것은 통증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보병궁이 치료할 수 없는 건 당연하지요.]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은 낯이 익었다.
앳된 목소리도, 느린 말씨나 거만한 어조, 중성적인 목소리까지도 모두 익숙했다.
물론 낯선 목소리도 존재했다.
[인마궁(궁수자리) 말이 맞아. 시간이 지나면 어련히 치료될 거야. 그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꿈에 다른 마물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정도지.]
이렇게 조금 허스키한 여자 목소리는 처음이었으니까.
[어휴, 저 계집애. 저럴 줄 알았다니까! 지금 내가 잡은 꿈 마물만 몇 갠지 알아? 이럴 거면 차라리 그냥-]
[천칭궁. 안 돼.]
[처녀궁! 정말 이럴 거야?]
[그래. 우리는 지상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잊었어? 너도 조디악에서 퇴출당하고 마물이나 키우는 신세로 전락하고 싶으면 어겨 보든지.]
[그렇게 말하면 누가 못할 줄 알고?]
두 사람 사이의 기류가 과열되자, 중성적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자, 자. 진정들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처녀궁도 천칭궁도 비슷한 마음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 간의 실랑이는 퍽 잦은 일이었던지, 그의 중재에 옥신각신하던 목소리들은 금세 잦아들었다.
그 이상은 티스베도 의식이 오락가락하던 와중이라 더 들은 것은 없었다.
‘그건 아마도 성좌들의 목소리였겠지.’
티스베가 헛것을 들은 게 아니라는 것 정도.
‘예전에는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렸다는 건, 내가 기감이 더 열렸다는 걸까.’
아니면 그게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건 있다.
황도 12궁과 마물들 사이에는 무언가 연관이 있다는 사실.
‘생각해 보면 마물들도 각기 다른 능력이 하나씩 있지.’
마치 황도 12궁의 별자리들이 하나씩 권능을 가지고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능력이 서로 중복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한다면, 그런 결론이 나온다.
“그런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에스텔? 마물들이 어쩌면 황도 12궁에 포함되지 않은 성좌들의 권능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마물들이…… 성좌와 연관이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래요. 생각해 보면 별자리는 무수히 많잖아요.”
그 별자리들 하나하나가 모두 각기 다른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대부분은 지나치게 위험한 권능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자연의 ‘섭리’는 그 권능들을 배척하겠지.
그렇게 배척당한 권능들 하나하나가 지상을 떠나지 못하고 마나를 만나 실체를 얻게 된다면…….
“……아마 돌연변이나 다름없는 형태로 지상에 녹아들어 있지 않을까요?”
“공녀님, 그건…….”
“마물의 특성이나 다름없죠.”
티스베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마물이 무엇이느냐가 아니다.
만약 정말로 저 무수히 많은 하늘의 별자리들이 가진 각기 다른 권능을, 마물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다면.
“그러면…… 어쩌면 개중에는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