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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95화 (95/121)

95화

재앙이 된다면 어떨 것 같냐니.

소어는 등 뒤에서 들려온 물음에 그저 눈만 느리게 깜빡였다.

이 야밤에 불쑥 찾아와 하기에는 조금 대중없는 질문이었다.

누군가가 티스베에게 저주의 말이라도 퍼부은 게 아니라면 더더욱.

하여 소어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다.

“……혹시 누군가 당신께 삿된 말을 한 겁니까? 당장 그자를-”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런 거 아니니까 진정해요.”

엄밀히 따지자면 칼뱅이 전해 준 신탁이 이 모든 것들의 시발점이었으니 소어의 말이 아주 틀리지 않았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티스베의 기분이 이 모양이 된 것에 칼뱅의 책임이 있는 것은 또 아니었으니까.

“소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웃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해 줘요.”

“저는 티스베의 말을 단 한 번도 가볍게 여겨 본 적이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소어의 말에 티스베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에게서 어떤 대답이 나올지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한 번 듣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제 마음이 그만큼 위태로운 까닭이겠지.

평소라면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이야기를 하는 것도.

“소어.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이런 결말을 예감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당신은 내 말을 믿겠어요?”

* * *

티스베의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건 단 하나.

“나는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어요.”

에스텔이 찾아올 것도, 자신이 성녀 자리에서 밀려나 모두에게 매도당하게 될 미래도 알고 있었다는 것.

그뿐이었으니까.

어떻게 알았느냐는 소어의 질문에 티스베는 꿈을 꾸었다고 대답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꿔 온 꿈이 있었어요. 거기서 나는 에스텔을 질투하다가 죽는 운명이었죠.”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럴 수가 있습니까?”

“간단해요. 에스텔을 너무 미워한 나머지 넘어서는 안 될 일선을 넘어 버린 거예요.”

“그럼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까?”

“할 수 없었다는 쪽이 맞겠죠. 당신은 내 거짓말에 속아서 에스텔에게 독을 먹인 죄로 잡혀 들어갔으니까.”

소어에게 <괴물꽃>의 내용을 읊어주는 티스베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티스베는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

실제로도 썩 관련이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활자라는 형태로 접했던 이야기일 뿐, 티스베 본인이 직접 겪은 이야기가 아니니까.

하지만 이제는 도저히 그렇게 타자의 것을 대하듯 담담히 굴 수가 없었다.

그 모든 것은 원작의 이야기인 동시에, 티스베의 기억이었다.

일어난 적 없으나 그녀는 겪어 본 모든 일들.

맨 처음 덤덤하게 시작했던 음성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중심을 잃었다.

아니, 중심이 제삼자의 시선에서 1인칭 시점으로 옮겨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동안은 남의 기억처럼 느껴졌는데, 이번에 다시 그 꿈을 꿨어요. 너무 생생하고…… 심지어는 내 일처럼 느껴지는 꿈을.”

더 이상 그 꿈과 티스베가 가진 기억을 분리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 꿈 때문에 마음이 너무 이상해요. 이제는 아무도 나를 버리지 않았는데, 그 모든 게 너무 가증스러워요. 에스텔이 밉고, 할아버지가 원망스럽고……. 이런 말은 좀 이상하지만 모두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다른 이들에게 이 절망스러운 감정을, 원망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악에 받친 감정이 그녀의 뇌리를 헤집고 있었다.

[오직 너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티스베.]

그 말은 옳았다.

티스베만이 그녀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사실, 티스베는 그간 줄곧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다들 사정이 있겠지.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어떻게든 누군가를 이해하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대체 내 사정은 누가 알아주는 거지?’

감옥에서 울부짖던 여자가 제 머리를 붙잡고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속에서 티스베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과거에도 현재에도 변함없이 그녀만을 바라봐 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그녀는 악에 받쳐 있느라 그 손을 놓아 버렸다.

그러나 차마 이번에도 그 손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예전이었더라면 그냥…… 놓았겠지.’

소어와 파혼하고 망명할 생각을 했던 그때처럼.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했던 그때처럼, 다른 걸 신경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티스베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고작 한 사람이어도, 그 무게가 작지 않다는 것 또한.

하여 그녀는 손을 놓는 대신 물었다.

“소어, 내가 이러다가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면 어떡하죠?”

내가 이러다 정말 재앙이 된다면 어떡하죠?

물음을 들은 소어는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단지 그가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것만이 보였을 뿐이다.

“당신이 재앙이 된다면, 저는 처음으로 재앙을 사랑한 인간이 될 겁니다.”

조금 슬프고, 조금은 기쁜 듯한 미소.

“꿈속의 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붙잡혔다는 사실이 무척 불만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분명 당신은 죽지 않았을 테니.”

“……하지만 나는 당신을 속였는데요.”

“신뢰를 드리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화가 나지 않아요? 내가 당신을 버린 셈이잖아요.”

“티스베. 저는 당신이 명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배를 가를 수 있습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웃음기 없이 말하는 사내의 낯에서 푸른 안광이 차게 빛을 냈다.

“당신은 제가 얼마나 지독하게 당신을 생각하는지 모를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받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 제가 얼마나 분노했는지도.”

당신이 그들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저는 그들을 이미 죽이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제게는 당신을 탓할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이 재앙이 된다고 한들 떠날 수도 없을 겁니다. 세상 모두가 당신에게 등을 돌려도, 제가 더는 당신의 미소를 볼 수 없는 처지가 된다고 해도.”

당신을 사랑한 이래 당신은 제게 늘 재난이었던 터라.

소어의 말에 티스베는 힘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당신은 늘 내 등을 떠밀기만 하네요.”

성역에서도, 지금도.

소어는 본인이야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으니 티스베의 감정이 향하는 대로 행하라고 종용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은 아마, 소어를 잃은 뒤 자신이 얼마나 후회하게 될지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내가 정말 재앙이 된다면 전부 당신 책임이에요, 소어.”

“기꺼운 결말입니다.”

재깍 나오는 대답에, 티스베가 가볍게 웃었다.

그 한 명 때문에 세상을 마냥 증오할 수가 없다.

그 하나의 사랑이 삶을 저버릴 수 없게 만든다.

‘고작 그게 뭐라고…….’

그날 밤 티스베는 소어의 침대에서 잤다.

티스베가 평소와 달랐던 것이 상당히 걱정이 되었던지, 그녀가 잠들 때까지 곁을 지키겠다고 소어가 선언한 탓이었다.

정작 본인은 채울 수 있는 모든 단추를 꼭꼭 채운 채 의자에 앉았으면서 말이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 자신을 지켜보는 희미한 실루엣을 바라보며, 티스베는 생각했다.

‘아마 소어가 있는 한 내가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일은 없겠지.’

줄곧 생각해 온 일이지만, 소어와 대화를 하고 나니 한층 더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대체 마물들의 말은 무엇이었을까.

‘에스텔은 단순히 내가 가진 힘이 강한 걸 알아봤을 거라고 했지만.’

그랬다기에는, ‘전에도 그랬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티스베가 기억하는 한 ‘전에도’라고 부를 만한 일은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기억이 이렇게 생생한 것도 마음에 걸려.’

기억은 변질되기가 쉬워서, 잊은 것들을 쉽게 거짓으로 채워 넣는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사실 자신이 기억하는 것이 ‘책’이 아닐 가능성도 있지 않나?

‘지금은 원작 말고는 전부 잊어버리기도 했고.’

다른 기억들은 모두 지워졌는데 <괴물꽃>에 대한 것만 남아 있는 것이 영 미심쩍었다.

생각해보면 결말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겠다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내가 회귀를 했거나, 미래의 운명을 가진 채로 태어났을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의아한 건 있다.

회귀든 책 속 환생이든, 분명 <괴물꽃>과 꿈에서 보여 주는 기억들은 동일했다.

에스텔을 질투하다 죽는 티스베.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녀가 공포의 대상, 재앙이 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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