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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94화 (94/121)
  • 94화

    처음으로 눈을 떠 에스텔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멱살을 붙들 뻔했다.

    꿈에서 깨기 전까지 눈물이 마르지 않았던 까닭에, 제 뺨에 물기가 없는 것이 오히려 낯설 지경이었다.

    ‘단순히 지겹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젠 역겹고 증오스러워.’

    꿈에서 깨고 난 이후에, 티스베는 그것이 책 속에서 자신이 맞았던 결말임을 알아차렸다.

    어쩌면 그녀의 현재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일.

    ‘세상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어.’

    단지 그녀만이 달라져, 이런 결과를 만들었을 뿐.

    여전히 세상은 손바닥 뒤집듯 추앙하던 이를 매도하는 일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쉽게 뱉은 말 한마디가 돌이 될 수 있다는 건 미처 깨닫지 못하고, 누군가가 유도하는 여론에 생각을 맡길 뿐.

    ‘만약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과연 지금 나는 여기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니겠지.’

    굳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답은 충분히 나왔다.

    단지 전에는 자신이 직접 겪어 본 일이 아니기에 별생각이 없었을 뿐.

    ‘역겨워…….’

    에스텔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괴로웠다.

    지금의 에스텔에게는 조금의 잘못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꿈에서의 기억이 너무 생생했다.

    -정말 실망이에요, 공녀님. 한때나마 당신을 우상으로 여겼던 저 자신이 너무 부끄러울 지경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경멸 어린 눈으로 자신을 보던 에스텔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았다.

    대체 네가 무얼 알기에 나를 그딴 눈으로 보느냐고 외치고 싶었다.

    너는 내가 발버둥 쳐 온 것을 아느냐. 네가 그 순진무구한 미소로 가져간 모든 것들이 내게는 삶의 전부였다는 것을 네가 아느냐.

    너 하나로 내 인생은 이토록 망가졌는데, 손 쓸 도리 없이 가치를 잃었는데.

    그런 내가 너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이 대체 뭐가 그리 나빠서.

    ‘모든 걸 가져가고도 만족을 못 해서 내 목숨까지 앗아 가려고…….’

    울분에 찬 말이 불쑥 목울대를 치받았다가, 한 박자 늦게 정신이 들었다.

    “공녀님? 괜찮으세요?”

    그제야 제 앞에 있는 것이 자신을 경멸 어린 눈으로 보던 에스텔이 아니라, 그저 걱정만 가득한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걱정을 끼쳤네요. 잠깐 머리가 아파서.”

    “그럴 수 있죠. 혹시라도 어디가 불편하시면 꼭 말씀해 주세요.”

    그 걱정 어린 목소리에 불쑥 가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다음 순간, 강한 자괴감이 티스베의 머리를 후려치고 갔다.

    ‘지금의 에스텔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고작 그 꿈이 뭐라고 자꾸 이렇게 되는 거지?

    확실한 것 하나는 그 호수에 빠졌다가 나온 이후로 제 상태가 도저히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 이렇게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하다가는 정말로 큰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았다.

    ‘신탁은 이런 것까지도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나보고 재앙이 될 거라고 한 건가.

    성녀로 살아가라고 일평생 사람을 몰아붙여 놓고 이제는 재앙이라니.

    ‘게다가 마물들의 말은 또 무슨 뜻인지…….’

    모두가 자신을 두고 재앙이 될 거라고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아니라는 증명을 하려면 알아봐야 할 일이 많은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머리가 자꾸만 지끈거려서, 티스베는 이불을 걷고 휘청이며 일어났다.

    “공녀님, 조심-”

    “난 괜찮으니 손대지 말아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날카롭게 나갔다.

    뒤를 돌아보자 에스텔이 놀라고 상처받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사과할 마음이 들지 않는 건 왜일까.

    티스베는 입술을 한 번 짓씹고는,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요. 하지만 살바토르 성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소어가 기다릴 것 같아서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그렇게 티스베는 떠났다.

    제 생각에도 퍽 구차한 변명이었다.

    * * *

    한편, 살바토르 성.

    ‘티스베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다니.’

    소어는 깃펜을 내려놓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연회가 있었던 날로부터 시간은 조금씩 가고, 이제는 티스베와 약속헀던 기한이 보름도 채 남지 않은 와중.

    자꾸만 흔들리는 감정이 소어를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되뇌면서도 티스베와 했던 입맞춤이 자꾸만 떠오르는 탓이다.

    입맞춤이라고 표현했지만, 명확히 말하자면 그날 밤은 조금 달랐다.

    굳이 서술해 보자면 티스베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주었던 날이라고 해야 할까.

    ‘밀어내지 않으셨지.’

    자신이 어떻게 굴어도 괜찮다는 듯.

    오히려 먼저 유혹을 해 오는 티스베에 소어는 정신이 다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결국 그가 참지 못하고 티스베에게 매달렸을 때도 그녀는 소어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인내할 줄 모르는 그를 어르듯 쓰다듬고, 끌어안아 줄 뿐.

    거부당하리라 예상한 순간마다 서슴없이 다가오는 접촉에 소어의 머릿속은 고장이 났다.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꿈에서도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어떻게 생각을 굴려 봐도 늘 경멸당하고 버려지는 결말만이 소어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티스베는 그런 소어를 바보로 만들었다.

    그런 우매함이라면 소어는 얼마든지 무지한 자를 자청할 수 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소어는 결국 티스베에게 상처를 입혔다.

    상냥한 티스베는 괜찮다고 해 주었지만 소어에게는 충격이 큰 일이었다.

    제 욕심이 결국 티스베에게 상처를 내고 말았으니까.

    티스베가 받아준다 한들 이런 관계를 정말로 이어가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잠시.

    -테레지아 님이요? 아까 셰일로에 좀 다녀온다고 하셨어요. 늦게 들어올 거라고는 하셨는데, 내일 오실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티스베가 성에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저도 모르게 울컥 그리움이 솟았다.

    굳이 우매함을 자청하지 않아도 이미 바보가 된 지 오래라는 것을 증명당한 기분.

    ‘설마 그 일로 나를 피하고 계신 건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자 착잡함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저 지난번 티스베가 가져다준 꽃다발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을 뿐.

    프리지아와 백합으로 만들어진 꽃다발은 얼음처럼 투명한 크리스털 안에 갇힌 채 소어의 방 안쪽에 잘 놓여 있었다.

    꽃은 빨리 시드니, 최대한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신전에 의뢰해 그 모양 그대로 박제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박제된 꽃다발을 볼 때마다 소어는 티스베가 봄 내음을 몰고 왔던 그 밤을 떠올렸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던 그 순간을.

    그러다 보면, 그때처럼 선물이 없어도 되니 한 번만 다시 그녀가 자신을 찾아 주었으며 하고 바라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지금도 꼭 저 창 앞의 커튼을 걷으면 티스베가 서 있을 것만 같은…….

    “……티스베?”

    감상에 젖었던 소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신이 드디어 헛것을 보는 걸까?

    커튼 너머로 인영이 비친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인영이.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커튼을 걷자, 정말로 헛것이라도 되는 양 서 있는 티스베가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기억 속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어째서인지 잔뜩 지치고, 염세로 물든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척 보기에도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 모습에 소어는 서둘러 티스베를 안으로 들이며 물었다.

    “티스베. 여기까진 무슨 일이십니까? 분명 아까 하녀에게 듣기로는 셰일로로 갔다고 들었는데.”

    “에스텔…… 을 만날 일이 있어서 갔어요. 어차피 거리는 내게 중요치 않은 거 알잖아요.”

    물론 알고 있다.

    그렇게 거리가 중요치 않다면 어째서 여태 들어오지 않은 건지 묻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소어의 목울대를 치받았다.

    하지만 소어는 다른 건 몰라도 인내심만큼은 가공할 만한 사내였다.

    비록 티스베의 앞에서 인내심이 자주 무용해지곤 하지만, 어쨌든.

    그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가 놓고는 몸을 돌렸다.

    “일이 잘 해결되었는지 모르겠지만 피곤하시겠군요. 어서 들어가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 여기로 왔는지는 묻지 않아요?”

    그런데, 티스베가 소어의 등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나 쉬러 온 거예요. 좀…… 기분이 나빠서.”

    “……제가 위안이 될 수 있습니까?”

    “모르겠어요. 지금은 그래요. 당신만 나를 변함없이 좋아해 준 것 같아서.”

    그게 무슨 뜻일까.

    티스베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얼굴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소어는 몸을 돌리려고 했지만, 티스베가 소어의 몸이 돌아간 꼭 그만큼 몸을 나란히 돌려 얼굴을 숨겼다.

    그렇게 꼭 숨바꼭질을 하듯 몸을 돌리길 몇 번.

    자포자기한 소어의 뒤에서 티스베가 낮게 웃는 것 같더니, 목소리가 들렸다.

    “소어, 물어볼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내가 만약 재앙이 된다면 어떨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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