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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93화 (93/121)

93화

그 분홍 머리칼을 본 티스베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에스텔?”

“네! 절 알아보시겠어요?”

에스텔이 반색하며 티스베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는 그 보름 사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기억보다 조금 더 씩씩해진 느낌이었다.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궂은 일이라고는 겪어본 적 없는 여느 귀족 영애다운 얼굴이었다면, 지금은 당장 산을 타고 눈밭을 헤치고 다녀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얼굴.

문제는 그 얼굴을 찾겠다고 티스베가 숲을 뒤지고 다녔던 게 마지막 기억이라는 거지만.

게다가 대체 여기가 어디인 건지, 이 방은 익숙지 않기까지 헀다.

티스베는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이게 대체 무슨…… 콜록, 콜록!”

그러나 이불을 걷으려고 하자마자 폐가 있는 힘껏 쥐어짜지는 듯한 느낌이 들며 발작적인 기침이 터졌다.

“어어, 누워 계세요! 공녀님은 지금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콜록, 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여긴 어디고-”

“여긴 제가 묵는 여관방이에요. 숲에서 쓰러진 공녀님을 발견하고 우선 여기로 모셔왔어요. 공녀님께서 잘못되시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하던 차였는데…… 눈을 뜨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에스텔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게, 그녀가 발견했을 때 티스베는 그야말로 얼음이었다.

비유적인 표현 말고 글자 그대로의 얼음덩어리 말이다.

-얘들아, 대체 뭐가 있다고 그렇게 소란…… 공녀님?!

꽁꽁 언 얼음 안에 갇혀 있는 티스베를 보고는 얼마나 놀랐던지.

그러나 티스베 역시 그 이야기에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내가, 얼음에 갇혀 있었다고요?”

“네! 마물들이 녹여 주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어요. 무슨 일로 숲까지 오셨던 거예요?”

“나는, 그냥…… 에스텔 양이 이틀째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서요. 할 말이 있었거든요. 대체 어디 있었던 거예요? 도저히 못 찾겠던데.”

“아, 저는 잠복을 하고 있었어요. 좀 알아보니까 그 근방에서 마물들이 유난히 많이 사라졌다더라고요. 그래서 마물들 사이에 끼어서 기다리다 보면 대체 무슨 일인지 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잠복을 했죠.”

마물들의 도움을 받으면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숨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에스텔은 정말로 이번에는 그 범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마물들이 전부 숨을 죽이고 도망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무서워, 무서워…….]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나무뿌리 밑에 있으면 안 잡힐 수 있을까?]

[재, 재앙이야. 재앙이 찾아왔어…….]

마물들이 이렇게까지 두려움에 떠는 건 정말 처음 보는 일이었다.

게다가 마물들은 공통된 기억을 공유하는 것처럼, 누구 하나 소식을 묻지도 않고 냅다 도망을 쳤다.

문제는 마물들의 도움을 받아 은신하고 있던 에스텔도 그 손에 붙들려서 강제적으로 함께 도망을 치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자, 잠깐만. 얘들아! 나한테도 설명해 줘!

[그럴 시간이 없어. 도망쳐야 해!]

[저건 재앙이야…….]

[머뭇거리다간 모두 죽을 거야. 전에도 그랬어……!]

-전에도 그랬다는 게 무슨 말이야?

[말해 줄 수 없어.]

[하지만 모두 너를 위한 일이야.]

[너를 잃을 수 없어…….]

언제나 에스텔에게 호의적이었던 마물들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에스텔의 뜻을 따라 주지 않았다.

결국 에스텔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마물들과 함께 어딘가에 웅크려 있어야 했다.

가까스로 은신 상태에서 풀려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

잔뜩 웅크려 덜덜 떨던 마물들이 갑자기 신이 난 것처럼 어디론가 몰려가 웅성거리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대체 뭐가 있었나 했는데, 거기에 공녀님이 계셨어요.”

“얼어붙은 채로…… 말이죠.”

“네!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요.”

재앙이 왔다고 해서 바짝 긴장하고 갔더니, 정작 있는 게 티스베라니.

“공녀님이 가진 마나가 너무 강력해서 마물들이 다들 놀랐나 봐요.”

“……그런 거라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죠.”

“공녀님께서 재앙이라니, 그럴 리 없잖아요.”

에스텔은 정말로 말도 안 된다는 듯 손까지 내저어 가며 웃었다.

그러나 티스베는 웃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그것 때문에 여기로 온 거예요. 교황을 만났는데, 나에 대한 신탁이 내려왔다더군요. 내가 재앙일지도 모른다고.”

돌아가는 상황이, 진실을 품은 채 점점 노골적으로 티스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신탁을 들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던 일이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단순히 에스텔이 마물들의 말을 전해 주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별이 죽으면 무엇이 되는지 알아?]

그 목소리를 듣고 호수로 가라앉았을 때.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 티스베는 호수 밑바닥에서 자신을 향해 팔을 벌리는 환영을 보았다.

어딘지 생기를 잃은 저 자신의 모습.

[오직 너만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티스베.]

어쩐지 달콤한 그 속삭임을.

* * *

‘이건 꿈이구나.’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처음 보는 광경인데도 익숙하고, 어쩐지 자연스럽기까지 한 기분이 드는 것이 정상일 리 없으니까.

자신의 의지와는 조금도 없이 몰려드는 이 감정이 정상일 리 없으니까.

“……왜.”

차디찬 감옥.

돌바닥에 널브러지듯 쓰러진 여자가 말라비틀어진 음성을 쥐어짜냈다.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그건 내 자리야. 내 자리란 말이야……. 나는 평생 그 자리를 위해서 살아왔는데, 대체 왜 그 아무것도 아닌 여자가……. 이럴 거면 대체 왜 나는…….”

중얼거리던 음성은 끝내 흐느낌으로 점점 변해 갔다.

그 흐느낌이 다다르는 종착지는 하나.

“나는 대체 뭘 위해서 살아온 거야…….”

휘몰아치는 절망이 그녀의 기도를 틀어막고, 힘이 도저히 들어가지 않는 손끝이 까드득 소리를 내며 돌바닥을 긁었다.

마치 절벽을 기어오르는 사람처럼 그녀는 손톱이 죄 까져 피가 나는데도 바닥을 긁는 걸 멈추지 못했다.

차마 제 가슴을 쥐어뜯을 수가 없어 애꿎은 바닥을 파내는 꼴이었다.

그 여자에게는 부여잡을 만한 것이 없었다.

손에 쥔 것이 없고 쥘 수 있는 게 없었다.

할 줄 아는 것은 그저 아득바득 매달리고 기어올라 기어이 원하는 것을 쟁취해 내는 것뿐.

그렇게 살아온 평생이었다.

“네게 특별한 것이 없다면, 특별함을 연기하기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누구도 너를 인정해 주지 않을 게다.”

태어나면서부터 성녀로 낙인이 찍히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갈고닦아 온 인생.

바란 것은 그저 평범했다.

“외롭고 싶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인생이었다.

부모는 일찍 죽고, 키워 준 할아버지는 너무 멀었다.

주변에 마음을 내어 줄라치면 목에 칼이 들어왔고, 비슷한 위치에서는 그녀를 질시했다.

그래서 그녀는 성녀라는 이름에 매달렸다.

“외롭다는 건 좋은 징조다. 네가 딛고 선 그 자리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정상이라는 뜻이니 말이다. 그러니 더는 우는소리 하지 말거라.”

할아버지인 알마스는 늘 이렇게 말했으니까.

그럴 때면 조금 서럽기는 했지만, 늘 마냥 외롭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성녀님 덕분에 춘궁기를 넘길 수 있었어요!”

“성녀님은 제 우상이세요!”

이따금 꽃을 주는 아이들을 만나거나, 제게 무구한 얼굴로 환히 웃어주는 이들을 만날 때면 외로움도 달래지는 듯했다.

‘그래, 나는 이걸 위해 존재하는 거야.’

제국을 구할 성녀.

모두에게 사랑받는 성녀.

그녀의 긍지와 자부심은 모두 그곳에 있었다.

‘내가 성녀라서 힘들고 외로운 거라면.’

그런 거라면 마땅히 참아 낼 수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었으니까.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견뎌내야 하는 거니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고작 한 사람의 등장에 손댈 틈도 없이 무너졌다.

에스텔 일레르. 아니, 이제는 에스텔 일레르 칼릭스트라고 불리는 여자.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여자는 무참하게 내던져졌다.

그녀를 지탱했던 긍지는 사라졌다. 자부심이었던 것은 그녀를 수치스럽게 했으며, 그녀를 환한 미소로 칭송했던 이들은 그녀에게 돌을 던졌다.

그렇게 그녀는 누군가의 우상에서 한순간에 사기꾼으로 전락해 버렸다.

‘나는 모두를 지키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그녀를 지켜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단 한 사람이 있기는 했다.

“저는 당신의 결백을 믿습니다.”

자신에게 속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하던 바보 같은 약혼자.

하지만 그도 이제는 에스텔에게 독을 먹인 죄로 수감되었을 테니 의미가 없다.

아마 3일 뒤 나란히 단두대에 목이 매달리겠지.

“흐흐, 으흐흐…….”

여자는 바닥에 엎어진 채 광소를 터트렸다.

풀리지 않은 의문과 울분, 복수심과 인간에 대한 증오가 광인의 안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은 티스베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심지어는 꿈에서 깬 지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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