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교황이 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교단 내부의 반대 의견이 워낙 강해서 말입니다. 언제까지고 억누르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능구렁이 같은 칼뱅의 얼굴을 떠올린 티스베의 미간이 슬쩍 좁혀들었다.
분명 처음에는 사람이 좋아 보인다는 평가를 내렸던 칼뱅의 미소는 어느새 의뭉스럽고 꿍꿍이가 가득한 이미지로 탈바꿈한 지 오래.
‘아마 그 말이 마냥 과장은 아니겠지.’
교황이 수도의 사제들을 제국 전역에 풀고, 본인마저도 이 먼 살바토르령까지 왔다는 것부터 사사하는 바가 컸다.
이 정도면 거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수준이겠지.
물론 엄살도 좀 있겠지만 말이다.
‘가늠하기로는 아마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그 정도가 칼뱅이 티스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티스베에게 주어진 기간은 그보다 짧았다.
‘이제 살바토르에 머무르기로 한 시간이 보름밖에는 남지 않았어.’
그때까지 소어와 이 약혼 관계를 둘러싼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사실,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난 소어가 좋으니까.’
하지만 칼뱅으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게 된 이 시점에, 소어에게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그동안은 문제가 생기면 혼자 달아날 수 있었어.’
그러나 지키고 싶은 게 생기면 그렇게 할 수 없다.
칼뱅은 살해 협박의 끝에 소어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나저나, 살바토르 공작님과는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이시더군요. 분명 이곳에는 파혼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 것 같던데.”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약혼자 간의 사이가 각별한 건 드문 일인 터라. 보기가 좋아 그렇습니다. 앞으로도 두 분이 화목하게 지내시기를 바라지요.”
칼뱅은 티스베의 신분을 알고 있는 데다, 그녀가 신분을 숨기고 있다는 것까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걸 이용해서 어떻게 또 여론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티스베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지긋지긋하게도.
‘내 일에 소어를 끌어들일 수는 없어.’
그러니 소어와 약속한 한 달이 다 가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소어에게 파혼에 대해서도 얘기하자.
나는 당신과 더 함께하고 싶다고.
당신이 있는 곳에 나도 있을 거고, 내가 하는 일에 당신도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그런 말을 들으면 소어도 분명 좋아하겠지.
티스베는 그들의 첫 키스 이후,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자꾸만 숨으려고 하던 소어를 떠올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제발, 더는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지금은 당신을 다치게 할 것 같아 두렵습니다.”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치게 할 것 같아 두렵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지 소어의 두 손은 엄지를 안으로 말아 넣은 채 꾹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희게 뼈마디가 불거진 손 위로 티스베의 손이 닿자 소어의 주먹이 움찔하며 물러났다.
티스베는 그 모습이 퍽 귀엽다고 느꼈다.
제가 꽉 쥐면 터지는 무언가도 아닌데, 꽃송이를 움켜쥐라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반응하며 덜덜 떨고 있으니.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묘한 장난기가 발동하는 건 제 성격이 나빠서였을까.
“소어, 날 봐요.”
자꾸만 도망치려는 소어의 손등 위로 제 것을 부드럽게 덮고, 아이를 어르듯 부드럽게 속삭이자 시큼한 것을 먹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구겨져 있던 소어의 얼굴이 조금씩 펴졌다.
그렇다고 붉어진 얼굴이 다시 희어지지는 않았지만.
티스베의 손끝만 닿아도 움찔거리며 도망치고 싶어 하는 주제에, 조금 전까지 입 맞춘 얼굴을 보면 인내할 수 없을 것 같다며 고개조차 들지 못하던 주제에.
소어는 티스베의 말 한마디조차 거역하지 못했다.
이토록 순종적인 남자를 어떻게 귀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티스베는 손을 들어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소어의 뺨을 매만졌다.
확연히 열기가 오른 뺨을 손끝으로 쓸다 천천히 손바닥으로 감싸 안자 그에 맞추어 소어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길에 순종하며 고요히 눈을 내리까는 사내의 얼굴은 마치 곧 제게 떨어질 형벌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소어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티스베, 부디 용서하십시오.”
티스베는 소어가 왜 그토록 제게 멀어지라 했는지 깨달았다.
소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살며시 붙잡고 있던 손목에 억센 손아귀가 족쇄처럼 덜컥 채워지나 싶더니,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던 입술에 반대쪽 손이 닿았다.
그 무례한 침범은 그에서 그치지 않았다.
엄지가 젖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러 입술 틈을 벌려내나 싶더니, 곧바로 다시금 입술이 맞닿았으니까.
그제야 티스베는 처음 그들이 한 키스는 고작 가볍게 숨을 맞대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그것보다는…….
‘정말 많이 참았구나, 소어.’
처음 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소어는 목을 졸린 사람이 숨통을 부여잡듯 티스베에게 매달렸다.
사탕에 비유하자면, 소어는 사탕을 잇새로 깨물어 먹을 것처럼 굴었다.
통제할 수 없는 파도를 둥근 유리구슬 안에 가두어 입 안에서 굴린다면 아마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그렇게 거칠게 키스해 놓고, 소어는 자신이 주체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소어는 결국 티스베의 입술과 손목에 자국을 내고 말았으니까.
물론 티스베가 걱정 말라며 곧장 물병자리의 치유력으로 자국을 말끔하게 지워 버렸지만, 어쨌든.
“제가 더 잘 참았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소어는 정말로 티스베의 생각보다 훨씬 과격했다.
그것이 오로지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과격함이라는 것이, 티스베를 웃게 만들었다.
‘이러다 나도 당신을 좋아한다고 하면 벽이라도 부수는 거 아냐?’
잔뜩 심각해졌다가도 그런 생각을 하면 퍽 우스워진다.
칼뱅의 살해 협박에도 도망치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전부 그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꼭, 흑마법사들을 찾아내야 해.’
그리고 칼뱅에게 자신이 재앙이 되지 않을 것을 증명해야 한다.
“알레샤, 셰일로로 가자.”
티스베는 물고기자리를 소환해, 에스텔과 헤어졌던 도시인 셰일로로 향했다.
셰일로는 살바토르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도시로 살바토르에서는 그야말로 엎어져 봐야 코 닿는 거리였다.
‘금방 돌아올 수 있겠지. 긴 이야기를 나눌 것도 아니니까.’
하여 떠나는 티스베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채로.
* * *
“……에스텔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티스베의 말에 여관 직원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벌써 이틀째예요. 그렇잖아도 조금 이상하다 싶어서 수색을 부탁해 놓은 상태고요. 탐험을 하느니 마느니 하더니, 어디 실족이라도 한 거 아닌가…….”
“불길한 소리는 됐어. 내가 찾아볼 테니 그만 가 봐.”
“알겠습니다, 닻별 님.”
조디악에서 통용되는 암호명을 말한 직원이 허리를 꾸벅 숙이고 나갔다.
현재 티스베가 있는 곳은 에스텔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도시, 셰일로였다.
그리고 이 여관은 셰일로에 위치한 조디악의 크고 작은 지부들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지부였고.
-여기는 내가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에요, 에스텔. 전언이 있다면 이곳 직원에게 맡겨요. 그럼 하루도 되지 않아서 내게 연락이 올 테니까.
그렇게 분명 말을 전해 두었었는데.
숲으로 탐사를 간 에스텔이 전언도 없이 돌아오지 않았다니?
‘그렇잖아도 어제 장치로 확인해 봤을 때, 셰일로 인근에 마나가 대량 포진해 있는 것이 보여서 영 불안했는데.’
혹시 그게 에스텔이 돌아오지 않는 것과도 연관이 있나?
부디 직원의 말대로 단순하게 실족이라도 한 거라면 좋으련만.
‘적어도 숲에서 에스텔이 죽을 가능성은 없으니까.’
에스텔은 마물들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숲에는 보이지 않을 뿐 다양한 마물이 잔뜩 득시글거리고, 개중 9할 정도는 에스텔에게 호의적이었다.
-한 번은 호수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호수에 잠들어 있던 마물들이 절 도와줘서 살았어요.
일면식 없던 사이에도 발 벗고 나서서 에스텔을 구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숲에서 사고가 나서 못 돌아오는 것은 아닐 게 확실했다.
티스베는 고민하다, 숲으로 직접 향했다.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데 그냥 두기도 그렇고.’
천리안도 있으니 직접 찾아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한창 둘러보고 있던 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