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체크메이트인 줄 알았는데, 이거 완전.
“제대로 당했네요.”
“과찬이십니다. 살바토르 공작의 환영회라면 응당 가서 축하해 드려야지 않겠습니까.”
무려 성녀께서 아끼시는 약혼자분이신데.
칼뱅이 온화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방 안을 가득 채우던 중압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콜록, 콜록!”
잠깐이었지만 티스베는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이건 권능을 빌어오는 것 따위가 아니야.’
마나를 이 방 안에 가득 채워 밀도를 있는대로 높인 거다.
마치 성역에서처럼.
단지 성역은 워낙 장소가 넓고 자연적으로 조성된 환경인 탓에 조금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게 전부였다면, 조금 전은 정말로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대체 마나가 얼마나 많아야 이런 짓거리를 할 수 있는 거지?’
과연 교황은 교황이라 이건가.
티스베가 인상을 찌푸리며 식은땀을 훔쳐내는 사이, 칼뱅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런 과격한 만남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영애께서 저희의 청을 전부 거절하시는 통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하하, 당신들이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야죠. 날 매도해 놓고 이제 와서 좋은 관계를 맺자고 하면 퍽이나 그러겠어요.”
“물론 그 일에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쪽도 이쪽의 임장이 있는 터라.”
어느 무덤을 가도 사연은 다 있는 법.
변명조차 되지 못하는 칼뱅의 말에 티스베는 날카롭게 웃었다.
“그래서, 이렇게 만났으니 영상구라도 하나 찍어서 올려야 하나요?”
“영애께서 무엇을 오해하고 계시는지는 알겠습니다만, 제가 영애를 뵙길 청한 이유는 그게 아닙니다.”
“그럼?”
“우선은 그 대단한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함이죠. 영상구를 보니 신성력과 마법을 구분 없이 사용하시던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라니.
그건 그냥.
“노력의 결과 아닌가요?”
“하하, 노력해서 다 되면 누구나 그렇게 하겠지요. 그건 영애께서 뱀주인자리를 타고나셨기 때문입니다.”
조디악의 13번째 별자리.
“신성에도, 마성에도 속하지 않는 유일한 별자리를 타고난 데다, 마나 친화도는 여태껏 측정된 것 중 최고치. 그러니 영애께서 속성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별자리를 다루실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이 당신이 성녀인 이유이기도 하다며, 칼뱅이 빙긋 미소지었다.
뱀주인자리는 사실상 황도 12궁에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는 별자리.
그 별자리를 타고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마나 친화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뱀주인자리를 타고나서 모든 별자리를 다룰 수 있는 무속성에, 마나 친화도까지 남다르다면 그거야말로 신이 내려 준 성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학구심 때문이었지요.”
“……그럼 또 뭐가 있다는 거죠?”
“밖에 알릴 만한 내용이 아니라서 알리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당사자에게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이어진 칼뱅의 말에, 티스베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얼마 전, 영애와 관련된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 * *
티스베는 살바토르 성으로 돌아와, 제 방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분명 떠날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어떻게 돌아왔는지 도저히 가늠이 되질 않았다.
‘신탁이라니.’
칼뱅과의 만남은 티스베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첫 번째가 뱀주인자리에 대한 내용이었고, 두 번째는 그녀가 미처 모르고 있던 몇 가지 진실들이었다.
“성좌를 소환하는 것은 신전 내에서도 무척 극소수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영애께서는 본인이 얼마나 대단한 걸 할 수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네? 하지만 그리 어렵지 않던데요. 마법식을 외워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마나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게 대단한 겁니다. 그리고 별자리들과의 공명도가 그렇게 높은 것도 범상치 않은 일이고.”
대부분 별자리가 소환에 응하는 경우는 자신들의 별자리를 타고난 이들이 부를 때 뿐이라며, 칼뱅은 허허 웃었다.
“저도 별자리를 소환할 수 있는 건 오직 둘 뿐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거절당했지요. 교황의 자리가 만약 소환할 수 있는 별자리의 수로 결정되었다면 분명 영애가 교황이 되었을 겁니다.”
“그럼, 교황을 결정하는 기준이 따로 있나요?”
“물론입니다. 신탁을 들을 수 있는지가 바로 관건이지요.”
신탁은 미래를 엿보고 현재에 조언을 남겨주는 목소리.
“세상에 공개하지 않을 뿐 신탁은 자주 들려옵니다. 그리고 이를 잘 이용하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예를 들어…… 영애가 가지고 있는 마도서. 그 마도서가 정말 우연히 영애의 앞에 떨어졌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티스베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기분이 적잖이 나빴다.
마도서를 가지고 있는 거 알고 있는 것도 모자라 그게 제 손에 들어오도록 유도까지 했다니.
“그럼 살바토르의 환영회에 온 것도 설마?”
“주신께서 도우셨지요.”
“……허.”
완전 사기꾼이다.
미래를 알려주는 놈이 붙어 있는데 저런 놈을 어떻게 이겨?
결국 어떤 수를 썼더라도 티스베는 칼뱅과 만나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티스베가 여태 이토록 넋이 나간 것처럼 있게 된 것은 비단 그 때문이 아니었다.
칼뱅이 오늘 티스베를 만나러 온 궁극적 이유.
‘신탁.’
그것이 티스베를 여태 심란하게 했다.
칼뱅이 말하기로, 그에게 전달된 신탁은 딱 세 줄이었다.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 그는 마지막 별로 만들어진 마지막 오류이니. 별이 빛을 잃는 날 재앙이 탄생하리라.]
칼뱅은 신탁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 신탁이 내려왔을 때, 신전에서는 당신을 죽여야 한다는 의견이 빗발쳤습니다. 그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보자면 당신이 꼭 재앙이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게다가 최근 당신께서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는 걸 아주 훌륭하게 보여 주셨고.”
정말이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저 오류와 재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는 입장이었기에 더더욱.
티스베는 말하자면 이레귤러였다.
이 세상의 규율에서 벗어난 존재.
신탁이 없이도 미래를 알고, 정해져 있던 미래를 깨부순.
‘오류는 내가 환생을 한 걸 얘기하는 걸까? 아니면 원작의 내용을 바꾼 것을?’
자신이 여태 원작을 바꿔 온 것 때문에 재앙을 막을 수 없게 되기라도 하는 걸까.
신탁은 지나치게 모호했고, 티스베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너무 많았다.
그녀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칼뱅은 그런 반응을 짐작했다는 것처럼 빙그레 웃었다.
“걱정 마세요. 그런 결론을 내렸다면 저희가 이렇게 앉아 있었겠습니까? 저는 신탁을 오래 받아 본 만큼,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탁이 내려온 이상 그를 좌시할 수도 없다며, 칼뱅이 말을 이었다.
“저는 영애를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영애의 눈부신 재능이 아깝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증명이 필요합니다.”
티스베가 재앙이 아니라는, 혹은 재앙을 만들지 않으리라는 증거.
“그걸 증명해내지 못하신다면…… 저도 조금은 마음 아픈 결정을 해야할지도 모르겠군요.”
칼뱅은 그렇게 말하곤 작별을 고했다.
정말이지, 아주 온화한 살인 협박이었다.
‘빌어먹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잖아도 재앙급 마물을 막을 생각이었는데.
거기에 신탁까지 더해지자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신탁만 보면 내가…… 별을 죽이고 재앙을 불러온다는 것 같잖아.’
게다가 오류에 대한 부분도 마음에 걸렸다.
본디 지금쯤 죽었어야 하는 티스베가 살아 있다는 걸 신탁이 질책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탓이다.
‘내가 죽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걸까?’
<괴물꽃>의 전개를 너무 망가뜨렸던 걸까.
하지만 그렇게 죽고 싶진 않았는데…….
‘……이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어.’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신탁이 죽으라고 한다고 곧이곧대로 죽어줄 수는 없었다.
이제야 겨우 제 마음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오랜 시간을 돌아 겨우 회귀지를 찾은 셈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죽으라고?
‘그럴 수는 없지.’
티스베는 몸을 일으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면 예정대로 움직여야 했다.
<괴물꽃>에 나온 재앙을 찾아내 결백을 증명하는 거다.
“에스텔을 만나야겠어.”
나직이 읊조리는 목소리가 결의에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