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중요한 건 수도에서 온 주교의 눈을 피해, 다른 사제들에게 스스로를 ‘테레지아 로즈릴’이라고 인식시키는 것이다.
‘이대로 그냥 신전에 들어가면 당연히 붙잡히겠지만.’
다행히도 여긴 신전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인식을 만들어 놓고 친분을 얄팍하나마 만들어 둔다면, 다음에 신전으로 들어가는 건 일도 아니게 되겠지.
‘뭐, 혹시 모르니 베일은 쓰고 가야겠지만.’
이런 외모로 신전에 가면 칼릭스트 공녀님으로 오해를 받는 경우가 잦아서 그렇다고 둘러대면 될 일이다.
사실 칼릭스트 공녀 본인이지만 말이다.
티스베는 칼뱅과 간단한 말을 몇 마디 더 주고받고, 소어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연회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무색하게도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딱히 무언가를 한다기보다는, 기척을 죽이고 사람들 틈에 섞여 있기만 하는 것이다.
마치 수면을 떠다니는 수초처럼.
‘저 모습 때문에 내가 소어를 유난히 챙긴 것도 있었지.’
아직도 소어와 처음 연회를 갔던 날이 잊히지 않는다.
소어가 극도로 말수가 적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 날이기도 했다.
그때도 티스베는 유명인사였기 때문에 소어와 단둘이 있기보다는 헤어져서 이곳저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삼삼오오 모인 곳을 돌아다니는 쪽이었다.
‘사실 대부분이 그렇게 하지.’
파트너와 시종일관 찰싹 붙어 있는 커플은 거의 없다.
티스베 역시 그날도 교류하던 다른 영애들, 그리고 영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한창 즐겁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목이 말라 잔을 집을 생각으로 몸을 돌렸는데.
그 자리에 시선을 떨어트린 채 서 있기만 하는 소어를 발견하고 만 것이다.
정확히 티스베가 소어의 손을 놓은 자리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그 사실에 티스베는 화들짝 놀라 소어에게로 달려갔다.
-소어! 여기서 뭐 해요? 여기 계속 서 있었던 거예요? 다리 아프지 않아요?
-저는 보기보다 체력이 좋습니다, 티스베. 조금도 아프지 않으니 걱정 마세요.
-아니, 그래도요. 기왕 연회에 왔으니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즐겁게 놀면 좋을 텐데. 여기 있으면 지루하잖아요.
-당신을 기다리는 일은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언젠가 돌아올 것을 알고 있기에 보람차기까지 하다며, 소어는 밝게 웃었다.
-기다리다 보면 이렇게 당신이 돌아와주시지 않습니까. 저는 좋습니다.
정말 바보같고 순진한 말이었다.
티스베가 소어를 더없이 착하고 순진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녀는 향수를 느끼며 소어에게로 다가갔다.
익숙한 치맛자락이 시야에 잡히자, 소어의 낯 위로 확연한 반가움이 떠올랐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을 반가워하듯 선명한 기색이었다.
“대화는 즐거우셨습니까?”
“덕분에요. 기다리는 게 지루하진 않았나요?”
“당신을 기다리는 일은 제게 있어 언제나 큰 기쁨입니다.”
소어가 해사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는 티스베의 꽃 선물을 받은 날 이후로, 티스베에게 더는 필요 이상으로 차갑게 굴지 않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밖에서는 적당히 데면데면한 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수도에서처럼 하지는 못하지만.
이 정도의 미소를 보여주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아마 파트너를 하기로 한 이상 어느 정도는 친분이 있어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 그랬겠지.’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
뭐,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고 해도 나쁘지 않고.
티스베는 마주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생각했다.
‘이제는 그렇게 마냥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알던 소어와 크게 다르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물론 살바토르 성으로 와서 본 모습들이 자신이 그간 알아 온 소어와 너무 달라서 놀라기도 몇 번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알던 소어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단지 약간의 진솔함이 더해졌을 뿐.
여전히 그 시선은 자신을 원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눈이 마주칠 때마다 별가루가 튀는 것 같다.
상대가 유난히 특별해 보이고, 그 미소는 평소보다 아름답게 느껴지고 만다.
만약 이곳의 모든 사람이 나를 배척하려 든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도, 제 손을 잡고 있는 이 한 명만은 제 편일 테니까.
‘정말…….’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티스베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 소어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윤곽을 잡아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챈 건 다름아닌 소어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티스베를 향해 있었으니까.
‘또 저런 눈으로.’
또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본다.
그녀는 지금 스스로가 얼마나 홀린 듯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예전에는 저런 눈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소어가 제 욕심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티스베는 눈을 빛냈다.
그럴 때마다 소어가 할 수 있는 건 당장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게 전부.
‘도망가라고 알려드린 건데.’
그럴수록 오히려 더 깊게 다가오니 이를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은 티스베에게 질 수밖에 없으니 티스베가 먼저 그를 밀어내 주어야 할 텐데.
파혼 숙려 기간은 전혀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으면 또 모를까.
‘어떻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아지기만 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건지.’
이대로는 속수무책으로 그녀를 놓아주지 못할 것 같았다.
티스베는 조금 더 그를 경계해야 했다.
그가 본인에게 전혀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했다.
그리고 서둘러 그를 그녀의 인생에서 지워버려야 할 텐데.
“소어. 연회 지루하지 않아요?”
티스베가 또 무슨 생각이 든 건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보이며 묻는다.
다른 때였더라면 곧이곧대로 얘기했을 것이다.
-조금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지만 이제 소어는 자신이 지금 해야 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았다.
허리를 숙여 그녀의 귓가 근처에 입을 가져간 소어가 나직이 소곤거렸다.
“여기는 제 연회인데요, 티스베.”
“그러니까 말이에요.”
티스베가 못된 장난을 꾸미는 악동처럼 킥킥 웃었다.
“나랑 좋은 거 하러 가지 않을래요?”
* * *
그들은 그대로 연회장에서 도망쳤다.
소어가 손을 내밀자마자 티스베는 그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렇게 밖으로 뛰쳐나간 이들이 한 것은 정말 별 것 아닌 일이었다.
성 안의 복도를 숨이 차도록 뛰는 것.
그리고 아무도 없는 빈 방의 창문을 열어젖히고, 음악도 없는 엉터리 왈츠를 추다가 서로의 발을 밟으면 그대로 부둥켜안은 채로 깔깔대는 것 등.
전부 현숙하고 멀쑥한 신사와 숙녀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들이었다.
아마 말을 지독하게 듣지 않는 말썽꾸려기 꼬마나 좀 할 법한 일이 아닐까.
그러나 두 사람 모두 한 번도 말썽꾸러기로 살았던 적이 없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티스베는 좀 말괄량이이기는 했다.
단지 티가 나지 않았을 뿐.
성 안을 이곳저곳 들쑤시며 잔뜩 말썽 따위를 부린 뒤, 보는 눈을 피해 소어의 집무실로 숨어든 티스베가 벅찬 숨을 몰아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하! 하하! 와, 나 이런 거 진짜 오랜만에 해 봐요!”
“해본 적이 있으셨습니까?”
“그럼요. 후우, 이런 짓도 안 하면 무슨 재미로 살아요?”
“티스베는 어릴 때부터 무척 차분하고 성숙하셨을 것 같아서, 놀랍습니다.”
“물론 내가 성숙하긴 했죠.”
환생을 했으니까.
그녀가 성숙했던 순간을 따지자면 응애하고 태어난 순간부터를 따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재미없게 살기만 했던 것은 또 아니라서.
‘가끔 술에 취하면 이렇게 놀고 싶을 때도 있단 말이야.’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못된 짓을 저지르는 걸로 깔깔댈 수 있던 어린 시절처럼.
연회장에서 마셨던 술들이, 한 차례 정신없이 웃고 뛰고 나자 조금씩 취기로 변해 올라오기 시작했다.
취기에 젖은 티스베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왈츠를 추듯 집무실 한 가운데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그런 티스베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팔을 감아 지탱해주며, 소어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요즘은 당신의 몰랐던 부분들을 알아가는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싫어요?”
“맹세컨대 무엇이 되었든 당신이라면 싫다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요?”
소어의 팔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있던 티스베가 나른하게 미소 짓더니, 몸을 세워 소어의 입술에 손끝을 얹었다.
“우연이네요. 나도 그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