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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87화 (87/121)

87화

그 위압감에, 루시는 저도 모르게 주춤하며 물러났다.

‘이, 이 여자 뭐야.’

전에 보았을 때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복장이 바뀐 까닭인가? 아니면 상황이 바뀌어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뭔가 훨씬 대하기가 어려워진 느낌이다.

루시는 마른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무슨 일이시죠, 로즈릴 영애? 사람을 불렀으면 용건을 말씀하시는 게 예의랍니다.”

“용건? 딱히 없어요. 구면을 보니 반가워서 말이에요.”

은발의 여자, 테레지아가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루시에게로 다가와 팔짱을 꼈다.

“난 손님이라서 살바토르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루시 양의 친숙하고 귀여운 얼굴을 봤더니 어찌나 반가운지.”

“뭐, 뭐죠? 갑자기 웬-”

“우리 친하잖아요, 루시 양. 내가 갈 곳이 없다고 하면 집도 내어 주는 사이 아니에요?”

루시가 일전 갈 곳이 없으면 찾아오라며 테레지아의 처지를 비꼬았던 것을 꼬집는 말이었다.

해석하자면, “네가 오죽 무례하게 굴어서 난 또 우리가 막역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알았지 뭐니.” 정도가 될까.

“루시 양. 내가 알아보니 루시 양이 나보다 세 살 동생이더라고요. 그래서 언니된 입장으로 충고 하나 하겠는데.”

테레지아가 팔짱을 단단히 낀 채로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루시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아니, 오감을 의심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테레지아의 이마에 알 수 없는 기호가 푸른 빛으로 새겨지나 싶더니, 그녀의 몸 전체에 푸른 빛무리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부턴 상대가 누군지 알고 덤벼.]

그리고 뇌리에 꽂히듯이 새겨지는 목소리까지.

테레지아는 그 말을 마치고 끼고 있던 팔짱을 놓아 주었다.

그 즈음에는 조금 전 루시가 보았던 것도 환상이었다는 듯, 테레지아는 다른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되어 생글거리고 있었다.

“잘 알겠죠? 마음 써 줘서 고마워서 그래요. 그럼 조심히 가 봐요.”

테레지아는 그 말을 끝으로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서 가 버렸다.

순식간에 회랑에는 루시 혼자만이 남아 있었다. 처음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루시는 테레지아가 사라지고도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보았던 모습이 도저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언젠가 영상구를 통해 흐릿하게 보았던 누군가의 모습이 그 위로 겹쳐졌다.

은발에 금안, 그리고 푸른 빛무리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사람.

그건 이 제국 누구에게 물어도 한 사람만을 꼽을 것이다.

“……칼릭스트 공녀?”

멍한 루시의 목소리가 회랑을 공허하게 울렸다.

* * *

‘나 좀 성격이 나쁜가?’

뭐, 어쩔 수 없지.

그러게 누가 가만히 있던 사람을 건드리래.

‘상대를 보고 덤볐어야지.’

난 받은 건 무조건 두 배로 돌려주는 사람이라고.

테레지아, 아니, 티스베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다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 회랑에서 만났던 루시를 마지막으로, 그녀는 제게 면박을 주고 간 세 사람을 아주 알뜰히 응징해 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실 이 정도는 응징이라고 하기도 힘들지.’

그냥 경고지, 경고.

만약 그들이 티스베에게 한 짓이 조금이라도 더 심했더라면 그녀 역시 이 정도로 끝내진 않았겠지만.

이 정도는 티스베도 얼마든지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줄 수 있었다.

물론 괘씸죄가 있었으니 경고 한 마디 정도 해주긴 했지만, 어쨌든.

‘이만하면 나쁘지 않네.’

티스베는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며 제게 몰리는 시선을 느꼈다.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일 때와는 또 사뭇 다른 시선이었다.

그때는 동경과 질시로 가득한 시선이었다면, 지금은 그보다는 호기심에 가까운 느낌.

‘대체 저 여자는 공작님과 무슨 관계인 걸까?’

‘어떻게 그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공작님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던 거지?’

라는 느낌이다.

개중에는 단순히 귀족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전에서도 형식적으로나마 이 땅의 주인이 귀환한 것을 축복하는 의미로 고위 사제들을 보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바로 티스베가 노리는 부분이기도 했다.

며칠 전.

“내가 그러지 않을 수 있게 해 줄게요.”

소어의 파트너 문제로 티스베가 이렇게 말을 꺼냈을 때.

그는 어딘지 조금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물었다.

“그,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하죠. 그냥 나랑 입장하면 되는 거잖아요. 고민할 게 있나.”

“하지만…… 당신은.”

정체를 숨기고 있지 않으냐는 말이 소어의 목까지 차올랐다.

그가 끝내 뱉지 못한 말을, 티스베가 대신했다.

“나는 지금 테레지아 로즈릴이죠. 그게 뭐 어때서요? 테레지아가 파트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소어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지금 당신이 들고 있는 명단은 암묵적으로 정해진 혼담 내정자들입니다. 개중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다면 가신들은 분명 불만을 토할 겁니다. 무엇보다도 그 가문들에서 가장 반발이 심하겠지요.”

“그럼 이 가문들만 입막음을 하면 되겠네요? 내정자들이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감히 언성을 높일 수는 없을 테니까.”

“……이론 상으로는 그렇긴 합니다만, 그 셋은 현재 살바토르에서 가장 영향력이 센 가문들입니다. 권력으로 찍어누를 수는 없을 겁니다.”

“음, 그렇긴 하겠죠. 하지만 권력으로 찍어누를 생각은 없어요. 어쨌든 입막음만 하면 된다는 거잖아요?”

그럼 됐지.

티스베는 생긋 웃었다.

오직 영문을 모를 소어만이 의아함에 눈매를 좁힐 뿐이었다.

그렇게 현재.

소어에게 했던 말대로, 티스베는 ‘권력으로 찍어누르지 않고’ 세 가문의 입막음을 훌륭히 마쳤다.

‘굳이 권력을 쓸 것까지 있나.’

테레지아 로즈릴로 알려진 여자가 사실 티스베 루이사 칼릭스트 공녀일 거라는 사실만 혼담 내정자들에게 살짝 흘려 주면, 그들이 알아서 가문으로 돌아가 저들 보호자의 입을 다물게 할 것이다.

분명히 살바토르 공작과 파혼했다고 알려진 그녀가 살바토르 공작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는 건, 게다가 가명까지 쓰면서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건 척 보기에는 살바토르 공작이 뭔가의 술수를 꾸미고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다들 영향력 있는 가문이라고 했으니 괜히 자기 여식을 들이밀어서 눈 밖에 나느니, 입 닫고 있는 게 현명하다는 걸 눈치 채겠지.’

게다가 확실하지 않은 일로 함부로 말을 옮겼다가 어떤 결과가 날지도 모르니 더더욱 그들은 입을 닫고 있게 될 터였다.

아주 간단한 이치다.

하지만 티스베가 노린 것은 비단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저 사제들.’

굳이 묻지 않아도 그들은 살바토르령 토박이들이었다.

‘애초에 이런 행사에 외지인을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지.’

무엇보다 티스베가 알아 본 바로 수도에서 온 주교는 무척 콧대 높게 굴고 있었다.

이런 행사에 참여해서 형식적인 축복이나 해주겠다고 할 리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면 티스베가 이토록 당당하게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았으리라.

-마흘론, 살바토르령 인근 지부에 은발에 금안인 여자 있어?

-찾아보면 한둘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럼 그 사람들 최대한 나랑 닮게 만들어서 신전으로 보내. 날짜는 이날로.

신전에 티스베로 추정되는 여자가 나타난다면 그 얼굴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 수도 출신 주교가 반드시 자리에 남아야 한다.

‘하지만 주교가 내 얼굴을 완벽하게 알 수 있을 리 없지.’

매일 보는 사이도 아니고, 가끔 한 번씩 지나가면서 본 게 전부일 테니까.

그러니 연회 시기에 맞추어 정말 작정하고 비슷하게 만들어 내보낸다면 분명 갈팡질팡 할 테고.

그러다 보면 정말로 수도 출신 주교가 연회 참석을 희망했더라도 참석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긴 약간의 틈.

티스베가 노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사제들에게로 다가가,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테레지아 로즈릴이라고 해요.”

“주신의 가호가 당신께 깃들기를. 주교 칼뱅입니다. 영애께서는 무척 아름다운 눈동자와 머리칼을 가지셨군요.”

“아, 칼릭스트 공녀님과 무척 닮은 색이지요? 우연히 타고났는데, 성녀님과 같은 색을 가질 수 있어 영광이라고 늘 생각한답니다. 주신께 기도를 드리러 조만간 신전에도 찾아뵐게요. 직접 맞아주신다면 정말 기쁘겠어요.”

“물론입니다, 영애. 연통을 주신다면 제가 직접 맞아드리지요.”

“정말요? 기쁘네요!”

칼뱅의 사람 좋은 미소를 보며, 티스베가 방긋 웃었다.

체크메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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