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딜루아 백작영애, 루시 오르펜 딜루아는 오늘 기분이 나빴다.
어찌나 기분이 나쁜지 평소 좋아하던 리본을 달고 새로 맞춘 드레스를 입어도 전혀 기분이 나아지지가 않았다.
덕분에 루시의 하녀들은 두 시간째 그녀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그녀가 이토록 기분이 나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공작님께서 나를 선택하지 않으시다니!’
바로 그들이 살고 있는 이 영지의 주인, 살바토르 공작의 파트너로 지목 당하지 못했다는 점.
‘아빠는 바보야.’
아버지, 딜루아 백작이 호탕하게 큰소리를 치며 나갔던 게 며칠 전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딸, 아빠가 널 공작부인으로 만들어 주마!
그 말에 루시가 얼마나 설레했던가?
‘공작부인이 되면, 아니, 공작님의 손을 잡고 연회장에 발을 들이기만 해도 난 북부 사교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어!’
그러면 아일로 자작영애, 그 졸부 계집애도 날 다시는 비웃지 못하겠지.
그동안 아일로 자작영애가 본인 가문의 부를 믿고 얼마나 설쳐 댔던가?
사들인 산에서 운 좋게 다이아몬드 광맥이 발견되면서 그야말로 떼부자가 된 게 아일로였다.
자작영애 주제에 백작영애인 제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비웃음을 날리는 걸 보면서 화를 삭여야 했던 게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현재 북부 사교계에 나이와 입지가 비슷한 영애는 오직 그 둘뿐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늘 비교 대상이 되곤 했다.
그리고 현재 가장 뜨겁게 사교계를 달구고 있는 건 역시.
‘공작님의 파트너가 누가 될 것인가이지.’
소어 아르망 살바토르.
감히 닿을 수 없는 절벽 위의 꽃이나 다름없지만, 북부 사교계의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손을 대 보길 원하는 바로 그 남자.
우수에 찬 푸른 눈동자가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고, 곧은 금발 아래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와 수려한 낯이 또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북부 사교계 최고의 미남이 바로 그였다.
단지 살바토르 공작에게는 이미 약혼녀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섣불리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얘기 들었어요? 공작님이 파혼을 하셨대요!
-그, 그게 정말이에요? 공작님이 파혼을 하셨다고요?
-그렇다니까요. 공작님의 측근인 라스 경께서 파혼장 작성을 위해 살바토르의 직인을 가지러 왔다고 했으니 틀림 없어요!
모두가 손을 대지 못하고 침만 삼키고 있던 살바토르 공작이 갑자기 자유로운 몸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얘기가 퍼지자마자 모두가 소어와 말 한 번 섞어보기를 희망했다.
소어가 불미스러운 일로 추방을 당했다가 돌아온 것 정도는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헀다.
어차피 이곳에서 살바토르는 지배자 가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과연 누가 살바토르 공작님의 환영회 파트너가 될까?
모두가 이 주제에 열띤 토론을 했다.
살바토르 공작의 환영회 파트너가 된 여자가 그의 부인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으니까.
결국 말이 환영회 파트너이지, 과연 누가 공작부인이 될 것인가를 두고 하는 토론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개중에서도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는 둘이었다.
딜루아 백작영애, 루시 본인과 아일로 자작영애.
그리고 루시는 그동안 자신이 살바토르 공작의 파트너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루시, 네가 살바토르 공작님의 파트너가 되지 못한다면 과연 누가 될 수 있겠느냐? 아일로는 부유하긴 하지만 혈통 면에서는 역시 우리에게 밀리는 곳이지. 그리고 아일로가 아무리 부유하다 한들 살바토르의 부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러니 분명 혈통이 더 좋은 우리를 선택하실 게다!
딜루아 백작은 이런 말들로 루시의 허파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연회 당일인 오늘이 되기까지도 루시에게는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초대장이 오지 않았다.
그러니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갔던 루시의 허파에서 구멍이 술술 새게 된 것은 당연한 일.
심지어 그걸로도 모자라 연회장에 온 지금은 속이 쓰리기까지 했다.
‘내가 아니라면 분명 아일로에게로 초대장이 갔겠지.’
그 재수 없는 계집애가 공작님의 손을 잡고 들어오면 또 얼마나 그걸로 기를 세우려 할까.
더 끔찍한 것은, 이러다가 아일로 자작영애가 진짜로 공작부인이 될 경우의 일이었다.
고작 자작영애 따위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니!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다.
그러니 당연히 루시가 오늘 기분이 잡쳐서 연회고 뭐고 가고 싶지 않을 수밖에.
큰소리를 쳐놓고 결국 이런 결과를 만든 아버지에게 연회에 가기 싫다고 떼를 써 봤지만, 딜루아 백작은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강경했다.
결국 루시는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을 하고 연회에 올 수밖에 없었다.
‘뭐, 멋지긴 하네.’
살바토르 성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살바토르 공작이 처음으로 칼데일에서의 긴 시간을 마치고 공작위를 계승하여 돌아왔을 때.
그리고 두 번째가 지금이다.
오래 북부를 지켜 온 살바토르답게 연회장의 규모는 상당했다.
그 사치스러움 역시 마찬가지.
“이 정도면 수도의 어느 연회에도 뒤지지 않겠는걸요.”
“사실 수도의 가문들이 워낙 떵떵거려서 그렇지, 살바토르에 어떻게 비하겠습니까?”
다른 이들도 오늘의 연회가 마음에 들었는지, 저마다 한 마디씩을 보태고 있었다.
그만큼 연회는 멋졌다, 그러니 이런 연회에 자신이 주인공으로 딱 등장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시 생각해도 정말 배가 아팠다.
‘오늘 그 여자는 안 보이네. 가서 망신이나 줄까 싶었더니.’
연회장을 둘러보던 루시가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은발에 금안을 가진, 테레지아 로즈릴이라던 그 수도 여자.
갈 곳이 없어 살바토르 성에서 체류하는 주제에 살바토르 공작을 향한 시선이 사뭇 남다르다는 게 보여 어이가 없었다.
‘제깟 게 주제도 모르고.’
비록 얼굴만큼은 무척 예쁘긴 했다.
루시를 비롯한 북부인들이 대부분 콧대가 높다는 걸 고려헀을 때, 그녀의 콧대는 특히 아름다웠다.
딱 적당한 높이와 크기에, 다른 이목구비와도 또렷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길게 늘어뜨린 은발과 어딘지 기품 있는 태도가 묘하게 몽환적이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탓에, 분명 수도에서도 적잖이 인기가 많았겠다 싶은 얼굴이었다.
‘이미 꼬리에 남자를 셋이나 달고 있었지.’
그녀의 주위에 셋이나 있던 기사를 떠올린 루시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그렇게 남자를 주렁주렁 달고도 모자라 살바토르 공작님을 향해 흑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 대니 어이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무슨 말을 해도 시큰둥한 표정인 게 마음에 안 들어.’
만약 살바토르 공작을 향한 그 주제넘은 눈빛만 아니었더라면 루시도 그녀에게 제법 호의를 가지고 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수도 귀족, 그것도 그렇게 아름다운 귀족 영애를 만날 일은 굉장히 드무니까.
하지만 같은 것을 노리는 입장이 된 이상 선처는 없다.
‘흥, 꼬리에 매달고 다니던 기사 하나쯤 끼고 뻔뻔하게 얼굴을 디밀 줄 알았더니.’
그랬더라면 적잖이 면박을 주어 쫓아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화풀이를 할 상대를 찾지 못한 루시가 입술을 삐죽이려는 찰나,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살바토르 공작님께서 드십니다!”
시종의 우렁찬 목소리에 모두가 행동을 멈추고 목을 길게 뺐다.
개중에는 루시도 있었다.
‘설마 아일로? 정말 아일로랑 들어온 건 아니겠지?’
아일로가 아니라면 첼시아 백작부인의 질녀라던 그 바보 같은 여자애?
그밖에도 무수한 얼굴들이 루시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살바토르 공작이 파트너와 함께 발을 들였을 때.
루시를 비롯한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은 그야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 저게 뭐야.’
이유는 간단했다.
살바토르 공작의 파트너가 바로 그 은발의 여자, 테레지아 로즈릴이었으니까!
* * *
군중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아니, 정말로 그 여자랑 같이 등장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수도에서 오신 분이라더니. 설마 각별한 사이신 걸까요?”
“공작님께서 그렇게 다정하게 행동하시는 건 처음 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바토르에 적을 둔 예의로 살바토르 공작, 소어에게 인사를 건네고 갔다.
그러나 그 모두의 눈빛에 혼란과 당혹이 담겨 있었던 것은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었다.
루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소어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표정관리가 되지 않아 서둘러 연회장을 벗어났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무시했던 그 여자가 정말로 공작님의 파트너가 되어 나타나다니?
성큼성큼 회랑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 오르펜 딜루아.”
뒤를 돌자, 얼마 전 연회에서 보았던 여자가 서 있었다.
오만하고 우아한 눈빛을 한, 은발의 여자.
“우리 구면이죠?”
아주 위협적인 분위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