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내가 꿈을 꾸는 걸까?’
소어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혹시라도 이것이 꿈이라면, 제발 빨리 깨어나게 해달라고.
제 저열한 욕망을 듣고도 티스베가 자신을 경멸하지 않는 꿈이라니.
꿈이라도 과분했다.
이대로 깨어난다면 베개에 머리를 박고 아침을 저주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정말 이대로 그 일선을 넘어버린다면, 제 배를 찔러서라도 꿈에서 깨지 않기를 바랄 것 같았다.
하지만 꿈은 이대로 쉽게 그를 놓아 줄 생각이 없는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 소어의 다리에 테이블 모서리가 닿았다.
더는 퇴로가 없었다.
티스베는 이미 가까이 다가와, 품에 안기다시피 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 어려운 건 아니잖아요. 한 번 해보면 알 것 같아요.”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티스베, 제발-”
“그것도 해 봐야 아는 거죠.”
당신이 날 원한다면 내게도 그 감정을 알려줘요.
어떤 선율보다도 감미로운 그 유혹의 목소리에 소어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는 진실로, 더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하여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마지막으로 거절의 말을 내뱉었다.
“티스베,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도 티스베가 다가온다면 그는 오랜 기갈에 시달린 이가 물을 마시듯 티스베에게 매달릴 터였다.
그러나, 매번 곧장 돌아오던 대답이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소어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티스베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그 얼굴은 눈을 감기 전과는 사뭇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발견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표정.
무엇보다 그녀는 소어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티스베가 바라보고 있는 건 소어가 아니라, 소어의 너머에 있는 무언가였다.
소어의 너머 책상 위에 놓인 서류.
그것도, 소어가 파트너로 골라야 할 영애의 초상화들이 하나씩 담긴 서류.
티스베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아차린 소어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지난번에 티스베가 찾아왔을 때에는 서랍 안에 잘 갈무리해 두었는데, 이번에는 너무 놀란 탓에 정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 탓에 서류는 그 자리에 고스란히 놓인 채 남겨졌고.
지금은 티스베의 시야에 들어오고 말았다.
최악의 상황, 최악의 방식으로.
“티, 티스베.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이건-”
“……이래서였군요. 날 원한다면서 밀어낸 건.”
침묵 끝에 티스베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걸음이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 걸음은 실망해서 물러났다기보다는, 오히려 흥미를 담고 있는 걸음이었다.
티스베는 소어를 두고 책상을 빙 돌아 그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곳으로 가 앉았다.
“흐음. 딜루아 백작영애, 그리고 아일로 자작영애. 첼시아 백작부인의 질녀도 있고. 다들 한 가닥 하는 집안들이네요.”
서류에 적힌 이름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소어는 빠르게 핏기를 잃고 희게 질려 갔다.
이제는 거의 백짓장처럼 하얘져서는,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티스베. 그, 그건…….”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던 소어가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변명해도 좋은 대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뺨을 맞는대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질책이 아니었다.
“음? 왜 그래요? 설마 내가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해서?”
하하, 티스베가 가볍게 웃었다.
감정 표현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한 티스베이니, 그 웃음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그에 소어는 의아해졌다.
“화를…… 내지 않으시는 겁니까?”
“뭐 이 정도로 그래요. 당연히 예상한 일이었어요.”
그렇다.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냐면, 어제 라스가 환영회가 열릴 거라는 소식을 가져왔을 때부터.
-아가씨, 그 얘기 들으셨어요? 곧 여기서 환영회가 열린다네요.
-환영회가 열린다고? 그럼 소어도 참석해?
-그렇죠? 아무래도 주인공인데.
-그럼 파트너는 누가 하는데?
티스베의 질문에 라스는 사탕을 입 안 가득 훔쳐 먹다 걸린 어린 아이 같은 표정이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X됐다.’라는 표정을 지었다는 뜻이다.
이 일은 굳이 티스베가 아니더라도 정황을 아는 이라면 얼추 예상할 만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티스베는 계획을 조금 앞당겼다.
-프리지아와 백합. 무조건 그 두 가지여야 해, 마히.
-요즘은 날이 추워서 프리지아가 씨가 말랐는데요…… 다른 꽃은 안 됩니까?
-안 돼. 무조건 프리지아와 백합이야.
계획은 아주 명확하고도 간단했다.
미인계.
거기에 약간의 추억 보정 곁들이기?
-소어가 나에 대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분명 이거에 넘어올 거야. 제가 아무리 마음을 정리하려고 해도 첫만남의 추억은 못 이기지.
티스베의 예상은 적중했다.
소어는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한 것이다.
‘어쩌면 키스까지 갈 수도 있었겠지만…….’
소어 너머에 있는 초상화를 보자마자 그런 생각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소어한테 화가 나서가 아니라, 그제야 소어가 자신을 피해 왔던 것에 대한 열쇠가 맞추어 진 기분이었다.
그러니 화가 나기는 커녕 여태 묘하게 굳어 있던 마음까지도 다 풀릴 수밖에.
‘살바토르에서는 나와 소어가 파혼한 줄 알고 있을 테니, 이 정도는 당연하지.’
어쩐지 요즘 성에 한껏 꾸민 여자들 오가는 게 늘었더라니.
너무 예상한 답지를 받아본 기분이라, 티스베는 웃음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답지를 내고 만 소어에게는 그저 두려운 상황일 뿐.
“화를 내셔도 괜찮습니다. 정말, 달게 받을 자신이 있습니다.”
“아니에요. 당연한 일인데 화는 무슨. 나도 약혼은 일찍 했지만, 당신이 수도로 올라오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과 파트너를 했어요.”
그 말에 소어의 낯이 우뚝 굳었다.
“……다른 사람과, 파트너를 하셨다고요. 혹시 누군지 알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알다시피 사교회 한 시즌에는 연회가 쉼 없이 열리잖아요. 그런 걸 다 기억하긴 힘든데. 대부분 이미 다 결혼했어요.”
“아하…….”
그제야 굳어 있던 소어의 낯이 조금이나마 풀렸지만, 티스베는 서류를 들여다보느라 그 무엇도 눈치 채지 못한 상태였다.
‘예상하긴 했지만, 나랑 파혼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소어한테 이렇게 혼담을 들이대?’
허 참, 이 약혼녀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이가 없어서.
심지어 이 얼굴들 제법 낯이 익다.
“살바토르 성에 체류 중이시라고요? 저런, 공작님의 호의에 빌붙어야 할 만큼 사정이 좋지 않으신가봐요. 혹 갈 곳이 없으시다면 저희 저택으로 오셔도 된답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공작님께 괜한 추파를 던지는 건 추천하지 않아요. 그분은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으시니까.”
“수도 귀족이 이 먼 곳까지 오다니, 놀랍네요. 되도록 환영회 전에 떠나줬으면 좋곘군요. 괜히 분위기를 흐리지 말고.”
티스베가 살바토르 성에서 머물고 있는 외지인이라는 걸 알자마자 연적에 대한 견제와 텃세를 한껏 부리던 여자들.
정말 대놓고 발톱을 꺼내놓은 수준이었지만, 수도 사교계에 비하면 고양이 할퀴는 수준이다.
‘거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수법들로 망신을 주니까.’
이 정도면 귀엽다 싶어 티스베는 그들이 멋대로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칼릭스트 공녀님은 대단하시지만, 저는 공작님께서 공녀님의 혐의를 뒤집어 쓴 거라고 생각해요. 공작님께서 굳이 그럴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러게 말이야. 나도 그게 궁금했는데, 그냥 내가 좋아서 그렇다고 하더라고…….
“공작님은 조금 차가운 분이시지만, 그분처럼 바른 분도 없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지요.”
네 아버지는 도덕을 다시 배우셔야겠구나.
“분명 그 악녀가 본인 평판을 위해 공작님을 이용한 거라구요!”
그 악녀는 평판 말아먹고 이곳에서 떠나는 게 목표였답니다.
역시 살바토르여서 그런지, 소어에 대한 미화 정도가 상당히 높았다.
어쩌면 소어의 멋들어진 외모와 과묵한 탓에 생긴 신비로운 분위기가 그런 효과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티스베와 소어가 재판으로 엮이고 결국 파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상 이 정도 추측은 양호한 정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잠자코 들어줄 이유는 없는 법.
‘무엇보다 살바토르에서 내 이미지가 이렇게 나쁘면 곤란하기도 하고.’
그렇잖아도 슬슬 이 상황이 짜증이 나고 있었으니까.
“소어, 이 사람들 중 한 명이랑 파트너로 연회에 참석하고 싶어요?”
“네? 전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조금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죠? 그럼 내가 그러지 않을 수 있게 해 줄게요.”
티스베가 생긋 웃었다.
어쩐지, 소어에게는 불길한 기분이 드는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