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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84화 (84/121)

84화

그러나 소리가 들려온 것은 문 쪽이 아니었다.

창문, 그것도 발코니 쪽이었다.

몇 번의 똑똑 소리가 더 들리고 나서야 소어는 커튼 너머에 누군가 서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커튼이 채 가리지 못한 창문 너머로 햇볕이 내려앉은 강물을 고스란히 담은 것처럼 아름다운 은발이 비치고 있다는 것도.

굳이 커튼을 젖히지 않아도, 그 너머에 있는 것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티스베?”

소어는 너무 놀란 나머지, 서류를 정리할 틈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급히 발코니로 다가가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밤 공기와 함께 달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내렸다.

잉크를 부은 듯 검은 밤을 배경으로, 소어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했던 사람이 서 있었다.

“아직 안 자네요, 소어.”

크림 같은 은발이 바람결에 부드럽게 흩날렸다.

누구에게나 매정한 살바토르의 바람은 티스베에게만은 다정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볍게 머리칼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그녀를 그토록 돋보이게 만들어 줄 수 없을 테니.

“들어가도 될까요?”

“……아. 물론입니다. 들어오세요.”

소어는 그제야 자신이 멍하니 티스베를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를 안으로 들이자, 어디선가 꽃향기가 느껴졌다.

티스베가 몰고 온 걸까?

저도 모르게 의문한 순간, 티스베의 손에 들린 것이 그제야 보였다.

프리지아와 백합으로 엮인 꽃다발.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하지만 선물을 어렵게 구해서, 지금 주고 싶었어요.”

보다시피 금방 시드는 선물이라.

티스베가 그렇게 말하며 소어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제게 주시는 겁니까?”

“그럼 여기 당신 말고 누가 더 있어요?”

티스베가 퍽 우스운 농담을 들었다는 듯 가볍게 목을 울려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소어는 현실감이 영 돌아오지 않는 기분이었다.

‘꽃.’

꽃이라니.

일단 선물을 받아본 적도 손에 꼽지만, 개중에서도 꽃 선물은 처음이었다.

나머지 선물도 전부 티스베에게서 받았다는 것이 조금 놀라울 지경이지만, 어쨌든.

꽃다발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티가 났다.

그만큼 아름다웠다는 뜻이다.

너무 얼떨떨한 기분에, 소어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응당 나와야 할 감사하다는 말이 아니었다.

“살바토르에서…… 꽃을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렇죠. 사실 지금은 이 꽃들이 날 계절도 아니고.”

하지만 그런 것쯤은 티스베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지역으로 가서 구해왔어요. 갔더니 튤립이 너무 예뻐서 좀 흔들렸는데, 당신이라면 이 조합을 기억할 것 같아서요.”

프리지아와 백합.

이걸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그들이 처음 만난, 정확히 말하자면 재회한 날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꽃인데.

“기억…… 합니다. 물론.”

소어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심장이 주제도 모르고 너무 뛰어 댔던 까닭이다.

가슴이 벅찼다. 너무 기쁘면 눈물이 난다더니, 그는 너무 설레서 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표정이 제대로 관리되지가 않았다.

그동안은 항상 긴장하는 마음을 가지고 티스베를 대해 왔는데, 이번에는 티스베가 기습한 탓에 그런 마음을 준비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던 탓이다.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느라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인상을 쓴다기보다는, 얼굴을 구기는 행위에 더 가까웠다.

마치 레몬을 통째로 삼켰을 때처럼.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미간만 있는 대로 찌푸린 모양새가 되어 버렸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선물을 받아 든 손이 떨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결국 그는 제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꽃을 감싼 포장지 위로 툭, 눈물이 떨어졌다.

그 모습에 티스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 소어. 울어요?”

“아닙니다. 그냥, 꽃 선물은 처음이라 너무 감사해서…….”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소어가 붉어진 낯으로 해사하게 웃었다.

꽃을 든 청년의 모습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였던 걸까.

만약 해바라기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소어를 향해 피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소어의 웃음은 맑고 밝았다.

‘분명 좋아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덕분에 티스베는 얼떨떨해진 기분으로 소어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발개진 눈매 사이로 파란 눈동자가 한 번씩 드러났다가 모습을 감추고, 눈물에 엉겨 붙은 긴 속눈썹이 어딘지 가련하고 청초한 느낌을 냈다.

뭇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자태.

그래서였을까, 불현듯 나쁜 마음이 든 건.

티스베는 손등으로 소어의 눈가를 쓸어 주다가, 그대로 뺨을 가볍게 스쳤다.

눈치 채지 못한 채 두 사람의 거리는 이미 보폭이 겹칠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둘만이 존재하는 공간.

야심한 시각과, 누구의 것일지 모를 거센 심장소리.

공간을 메운 모든 요소들이 그들을 충동질하고 있었다.

그 충동에 먼저 답한 것은 티스베 쪽이었다.

“소어.”

티스베의 손이 소어의 것에 겹쳐졌다.

흉터와 굳은살로 썩 보기에 좋지 않은 손가락 사이로 미끈한 티스베의 손가락이 미끄러져 들어가며 안쪽 여린 살을 건드렸다.

그렇게 두 손이 맞물릴 즈음.

봄내를 몰고 온 이가 속삭였다.

“키스할래요?”

* * *

변명하자면, 소어의 인내심은 오늘 너무 많이 시달렸다.

가신에 장로에 그들의 자녀까지 만나야 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는 이어진 철야까지.

만약 그것이 정사각형의 모양을 띠고 있었다면 아마 지금쯤은 모서리가 닳고 닳아 원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서리가 닳은 창으로는 바람을 제대로 막을 수 없는 법.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입은 올곧았으나 그의 손은 티스베의 손을 한층 더 강하게 붙들고 있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것만 같았다.

욕망이 이성을 잠식해 가는 것이 느껴졌다.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는데,

제 뱃속을 달구는 적나라한 욕망에 제 낯이 다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지금 제 낯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몰라도 분명 제법 볼만 할 것이다.

욕망에 져 버린 인간의 표정이란 대개 비슷할 테니.

기갈에 시달리는 얼굴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간신히 무언가를 참고 있는 듯한 얼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애원하는 얼굴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원망하는 얼굴일지도.

그러나 어느 쪽이든 보기 좋은 얼굴은 분명 못 될 텐데.

“해보기 전에는 몰라요.”

티스베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저를 원하십니까?”

소어를 원한다고 말하는 듯한 얼굴.

무언가에 홀린 듯이 상대만을 향하는 맹목이 느껴졌다.

그제야 소어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그녀와 같은 표정이겠구나.

소어의 질문에 티스베는 혼란스러운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요. 이런 게 원한다는 감정인가요?”

“무얼 느끼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소어의 엄지가 티스베의 손목 안쪽 여린 살을 뭉근히 쓸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당신한테 입 맞추고 싶었어요.”

마른 팔 위로 살짝 도드라진 힘줄을 타고 부드럽게 올라가는 손길에는 노골적인 의도가 물들어 있었다.

소름이 돋는 것과 비슷한 감각에 티스베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 여린 떨림마저 소어를 자극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저는 당신을 갖고 싶습니다, 티스베.”

낮게 가라앉은 사내의 목소리가 깊게 깔렸다.

“당신의 호흡을 구속하고, 당신이 지칠 때까지 저만을 담게 하고 싶습니다.”

제 이름을 불러대는 입술을 머금고, 그녀라는 존재를 음미하고 싶었다.

어떤 말도 달콤하게 발음할 줄 아는 당신이었으니 분명 원망의 말 역시도 감미롭겠지.

당신이 나를 노려본다면 그 눈빛을 먹고 제 욕심은 더 커질 게 분명하고, 어떤 애원의 말도 당신을 구할 순 없으리라.

제가 가진 감정이란, 당신을 숭배하는 만큼 그 맹목으로 당신을 짓이기고 싶은 마음인 탓에.

“이게 제가 당신을 원하는 방식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난 누군가를 원해 본 적이 없어서.”

가볍게 흘러나온 대답에 소어의 낯빛에 실망이 서렸다.

그러나 그것이 다 올라오기도 전에, 티스베의 손등이 소어의 뺨에 닿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알려줘요.”

무엇이 상대를 원한다는 감정인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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