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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약혼자가 내 꽃길을 방해한다-83화 (83/121)
  • 83화

    소어 아르망 살바토르.

    지고한 살바토르의 주인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미간을 주물렀다.

    칼데일에 있든 살바토르에 있든 보는 것은 늘 흰 것인데 어째 살바토르에 있을 때만 눈이 이렇게 피로한지.

    그가 없는 동안 쌓인 업무 때문에 근 며칠 간 계속 철야를 했더니 피로가 쌓여 있었다.

    ‘아니, 사실 업무 때문은 아니겠군.’

    소어는 사흘 밤낮으로 전투를 해도 지친 기색 없이 제 발로 걸어 돌아오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고작 철야 좀 했다고 이렇게 피로한 기분이 들 리 없다.

    사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벌써 보름이 지났나.’

    칼데일을 떠나 살바토르로 돌아온 지 보름하고도 이틀 째.

    소어는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피로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원인은 전부 그의 알량한 욕심이 만들어 낸 자충수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바꾸어 말하자면.

    ‘티스베.’

    그녀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난 보름 간 소어는 매일 두 번씩은 파혼 숙려 기간을 받아들인 제 선택을 후회했다.

    ‘이렇게 힘들 줄 몰랐지.’

    단순히 티스베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을 이기지 못해 선택한 길이었는데.

    막상 겪어 보니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를 너무 얕봤다.’

    티스베만 보면 자동으로 헤헤거리며 풀리는 얼굴과 없는 꼬리가 붕붕대는 기분을 주체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수도에서 보낸 지난 3년.

    일주일에 한 번씩 티스베와 시간을 보냈더니 소어의 몸은 이미 티스베에게 제대로 길들여져 있었다.

    티스베와 눈이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활짝 웃음이 나려고 했다.

    티스베가 말을 걸면 눈꽃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목소리가 자동으로 튀어나오려 했다.

    모퉁이 너머에서 티스베가 웃는 소리가 들리면 한 번이라도 그 모습을 구경하고 싶어 안달이 났고.

    간혹 티스베가 산책하는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발이 젖지 않도록 그 앞에 붉은 융단을 깔아드려야 하지 않나 싶어 무심코 하인을 불렀다가 정신을 차리기 일쑤.

    ‘분명 파혼 숙려 기간을 가지는 동안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는데.’

    어째 날이 갈수록 티스베에 대한 마음은 커지다 못해 이젠 몸까지도 주체가 안 되는 지경이었다.

    예전에는 그나마 다른 집에 살고, 일주일에 한두 번 보는 게 고작이었는데.

    이제는 층계 하나만 내려가도 마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하루에도 스물네 번씩 티스베가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요약하자면, 아주 죽을 맛이었다.

    ‘이러면 안 된다. 이러면 안 된다.’

    대체 이 문장을 얼마나 되뇌었던가?

    티스베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티스베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성호를 그어 가며 저 문장을 주술처럼 되뇌었다.

    ‘티스베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필사적으로 모른 척 해야 해.’

    티스베와 소어는 지금 서로 모르는 사이라는 설정이었다.

    물론 그녀에게 가명을 쓰라고 한 것은 소어 본인이기는 했다.

    정말로 살바토르에서는 그가 파혼을 한 줄 알고 있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가 있기도 했다.

    ‘다른 놈들이 티스베에게 괜한 관심을 보이게 둘 수는 없으니까.’

    티스베는 제국 전체의 인기인이었다.

    사실 현 시점에서는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만약 티스베가 살바토르 성에 방문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녀를 귀찮게 굴 게 분명했다.

    ‘물론…… 티스베가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입장이라는 건 좋지만.’

    호의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반감을 가진 사람 또한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굉장히 높은 확률로 그들은 티스베를 공격하려 들 것이다.

    ‘특히 장로들.’

    소어가 다시 살바토르의 주권을 가져간 것을 내심 못마땅해 하는 그들은 분명 소어와의 약혼 관계 같은 것을 들먹이며 티스베의 인격을 모독하려 할 게 뻔했다.

    혹은 돼먹지 못한 떨거지들이 티스베에게 껄렁대며 말 한마디 붙여 보려 애쓰겠지.

    그리고 소어는 그걸 곧이곧대로 참아 넘길 자신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의 성격 상 당장 목을 치고 혀를 자르려 하지 않을까.

    수도에서의 살인이야 문제가 되더라도 살바토르령의 영주인 소어가 살바토르에서 하는 살인은 문제가 되지 않으니 더더욱 참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티스베 앞에서 칼부림을 할 수는 없는 법.

    그런 의미에서 소어의 선택은 탁월했다.

    그의 안타까울 정도로 완벽하게 조련된 신체 사정에 대한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칼데일에서는 괜찮았으니 살바토르에서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때는 티스베를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탓일까?

    그도 아니라면 티스베에게 분명 경멸을 받을 거라 생각해 긴장하고 있었던 탓?

    ‘아니…… 괜한 희망 때문이겠지.’

    티스베가 살바토르령으로 같이 가겠다고 했을 때.

    기쁘지 않았다면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한 달 뒤에 티스베가 어떤 결론을 내리든, 지금 당장 그를 선택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소어의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적어도 티스베가 그와 함께하는 것을 한 번은 고려해 주었다는 것이니까.

    눈물이 날 정도로 과분한 일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티스베의 곁에는 자신이 어울리지 않았다.

    이제는 킬리안의 말에 동의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더 좋은 사람이 필요했다.

    티스베를 위험에 빠트리지도 않고, 가벼운 살의조차 참지 못해 그녀를 곤란하게 하지도 않는.

    그녀를 그 무엇보다도 아껴 줄 수 있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누군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내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서 소어는 티스베의 앞에만 가면 무의식적으로 풀려 버리는 제 몸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티스베와 눈이 마주치면 매정하게 돌려 버렸고, 목소리는 최대한 건조하게 냈다.

    며칠 전 티스베가 밤중에 간식 접시를 들고 찾아왔던 날에도 그랬다.

    -그럼 우리가 결혼한다면 나도 여기서 살겠네요.

    분명 별 의도 없었을 그 말이 얼마나 달콤했던지.

    티스베가 자신을 선택해 준다면 제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노라, 당장 무릎을 꿇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허락된다면 분명 그는 티스베에게 구애했을 것이다.

    가장 처절하고 가장 비참하게.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게 티스베를 위하는 길일 테니까.’

    소어의 시선이 조금 전 내려놓은 서류를 향했다.

    그가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것은 곧 살바토르 성에서 있을 연회의 참가자 명단이었다.

    개중에서도 소어의 파트너로 내정된 여자들.

    살바토르의 주인이 간만에 돌아왔으니 마땅히 연회를 여는 것이 순리인 법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그 의미가 달랐다.

    최근 살바토르 성을 드나들고 있는 것은 가신과 장로들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자녀도 함께였으니까.

    “제 딸아이가 각하의 환영회에서 뵙기를 고대하고 있더군요.”

    “혹 그 아이를 기억하십니까? 제 손녀딸인데, 어릴 적에 한 번 뵌 적이 있었지요.”

    “이제 혼기가 꽉 찬 아이랍니다. 좋은 혼처를 찾아야 할 텐데, 허허.”

    그들은 소어에게 더는 약혼자가 없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와 제 자녀를 엮어 보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마치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마음 같아서는 어릴 때처럼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각하의 나이가 적지 않으신데 여태 자식이 없다니, 이는 큰 문제입니다.”

    “후계를 생산하셔야 저희가 안심하고 살바토르의 명운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소어는 유일한 살바토르의 적통이었고, 그는 후계를 생산할 의무가 있었다.

    그가 정말로 누구를 마음에 담았든 결혼은 불가피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오죽하면 뭔가를 먼저 말하는 법이 없는 듀이조차 이렇게 말을 할까.

    “각하, 불미스러운 일로 상심하셨을 것은 알고 있지만…… 이제는 결혼을 생각하실 때입니다.”

    “제가 내정자 몇을 추려 볼 테니, 개중 연회에 함께 입장할 파트너를 고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신과 장로들이 분명 적잖이 난리를 칠 거라는 이야기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파트너가 된 여자와 가장 먼저 혼담을 추진하려 하겠지.

    ‘티스베가 보는 앞에서 다른 여자와 연회에 입장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기분이다.

    그 탓에 소어는 이 문제를 일주일이 넘도록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고민을 마쳐야 할 때가 왔다.

    소어가 다시금 서류를 집어 들려는 순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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