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모든 설명에 앞서 변명하자면.
일단 이 말이 정말 헛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것 정도는 티스베도 알고 있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소어라니.’
이 무슨 물을 싫어하는 물고기, 숨 쉬기 싫어하는 사람 같은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티스베는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물고기도 사람도 호흡을 그만두기 마련이니까.
애정이 식는 것 따위는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처음에는 그냥 기우라고 생각했지.”
살바토르 성에 처음 발을 들였던 날.
제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층계를 오르는 소어를 보면서도 티스베는 별 생각이 없었다.
물론 기분이 조금 이상하긴 했다.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 소어는 처음 봤으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소어와 ‘테레지아’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다.
‘테레지아’는 기껏해야 황실에서 온 공문을 주기 위해 칼데일로 온 사람이라는 설정이었으니까.
괜히 알은 체를 하는 게 더 곤란할 것이다.
‘어차피 소어는 계속 성에 있을 테니까, 둘이 시간을 보낼 기회는 얼마든지 있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던 건 살바토르 성에 온 지 사흘 째 되던 날이었다.
‘오며 가며 계속 보긴 보는데.’
뭔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질 못했다.
그렇다고 소어가 티스베에게 시선을 던지는 것도 아니었다.
‘수도에 있을 땐 고개를 돌릴 때마다 눈이 마주쳤는데.’
지금의 소어는 티스베를 봐도 눈사람을 흘끗 보고 지나가는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사실 거기까지는 그냥, 서로 모르는 척을 해야 하니 그렇다고 칠 수 있다.
살바토르 성에 온 이후로 소어가 딱히 티스베를 피해 다니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티스베는 직접 소어를 한 번 찾아가 보았다.
해가 다 지고, 복도를 돌아다니는 사용인도 없을 때.
살그머니 등불과 간식거리를 들고 소어의 집무실 문을 두드려 본 것이다.
“소어, 있어요?”
“……티스베?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덜컹, 뭔가 요란한 소리가 잠시 나나 싶더니 머잖아 문이 열렸다.
흰 원피스 잠옷을 입고 그 위에 두터운 숄을 두른 티스베와 달리 소어는 여전히 낮에 보았던 차림 그대로였다.
흉곽을 조이는 조끼까지 딱 맞게 갖추어 입은 쓰리피스 정장.
단지 조금 피로해 보이는 낯과, 낮에 보았던 것과 달리 조금 흐트러져 내려온 머리칼만이 그에게도 제법 바쁜 낮이 지나갔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티스베를 향하는 새파란 눈동자는 조금 건조해 보였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간식이 먹고 싶어서 주방에 다녀왔는데, 혼자 먹기엔 조금 많이 가져온 듯싶어서요.”
티스베는 그렇게 말하고는 슬쩍 문읖 짚고 선 소어의 팔 너머를 바라보았다.
“들어가도 되나요?”
평소라면 굳이 물을 것도 없이, 소어가 문을 열어 주고 방 안에서 가장 따뜻한 자리로 그녀를 안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소어는 그런 것을 다 잊은 것 같았다.
들어가도 되냐는 물음에 살짝 미간을 좁힌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물론…… 들어오셔도 됩니다. 다만 방이 조금 추울 것 같아 조심스럽습니다.”
“난 괜찮아요. 소어는 춥지 않나요?”
“저는 추위를 잘 타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지난번 방문했던 살바토르 저택에서도 그의 집무실은 꽤 쌀쌀한 편이었다.
티스베가 온 이후에야 방에 온기가 차올랐으니까.
그녀는 그때를 회상하며 구운 과자들이 담긴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건 칼데일에서 오래 지낸 탓인가요? 아니면 살바토르가 워낙 추운 곳이라서?”
“제 생각에는 둘 다 같습니다.”
선대 살바토르 공작인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수도에서 지냈지만, 그녀의 죽음 이후 소어는 줄곧 살바토르령에서만 지냈다.
그 이후에는 칼데일에 가서 지냈고.
“제겐 오히려 여름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사철 추운 것이 익숙하여.”
“그렇군요. 그럼 소어는 앞으로도 계속 여기서 지낼 생각인가요?”
“예, 그럴 생각입니다.”
“그럼 우리가 결혼한다면 나도 여기서 살겠네요.”
추운 것도 금세 적응이 될까 싶어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때문에 말을 뱉고 나서야 티스베는 제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소어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놓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저는…… 일어나지 않을 일을 가정하지 않습니다.”
그 단정적인 어조에,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는 변명이 목 뒤로 사라졌다.
저도 모르게 발끈하게 된 탓이다.
“그럼 나랑 정말로 파혼할 생각이에요?”
“지금 저희가 가지고 있는 것이 파혼 숙려 기간 아니었습니까?”
결국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나와 파혼을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파혼장을 드렸던 순간부터 저는 진심으로 당신과의 파혼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는 단 한 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소어.”
티스베의 말문이 막혔다. 소어의 굳어진 얼굴이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는 무표정한, 그러나 동시에 조금은 슬퍼 보이는 얼굴로 티스베를 가만히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성 안에는 보는 눈이 많습니다. 괜한 말이 나돌까 두려우니 다시 밤중에 찾아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티스베는 밖으로 쫓겨났다.
소어는 언제든 원할 때 나가라는 듯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어떻게 더 앉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그 자리에 더 앉아 있다간 언성을 높이게 될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신이 내밀었던 ‘파혼 숙려 기간’이라는 것이 소어에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고 만 탓이다.
‘나는 파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는 거였는데.’
소어는 그것을 숙려 기간 동안 파혼을 받아들이며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갖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예 남남처럼 지내 보면서, 그것에 익숙해지자고.
다시 떠올려도 입맛이 썼다.
심지어 소어가 티스베에게 고백했던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나는…… 그날 밤에 잠도 못 잤는데.’
소어는 본인의 고백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티스베는 그날 밤 잠든 소어의 얼굴을 보며 계속 소어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던 말과, 자신 때문에 욕망을 배웠다는 말.
-티스베, 저는 줄곧 당신을 원해 왔습니다.
기갈에 허덕이는 듯 느껴졌던 그 말까지도.
아마도 소어가 거르고 걸러 겨우 내뱉었을 그 말들은, 곱씹을수록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소어의 욕망이 나를 침범할까 두렵다면.’
침범을 허락한다면 대체 어디까지 나를 집어삼킬 수 있을까.
그토록 순도 높은 열망은 처음이었다.
자신을 순수하게 원하는 그 마음이,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설렘이라는 감정을 도로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나도 소어를 같은 마음으로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돌이켜보자면 그 누구도 사랑해 본 적 없는 인생이었다.
사랑받기를 원했던 적이 없으니 누군가를 사랑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평생 혼자 살 생각이었지.’
어쩌면 두려웠다는 말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세계는 이미 자신을 한 번 매몰차게 죽인 적이 있으니까.
혹자는 누구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을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는 악녀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
그것이 티스베였다.
그 누구에게도 마음 붙일 수 없었던 인간이 어떻게 누군가를 감히 사랑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소어의 확고하고도 열렬한 마음 앞에 티스베의 생각은 조금 변모했다.
그래서 파혼 숙려 기간을 내민 것이다.
적어도, 소어가 그렇게 티스베를 내쫓기 전까지는 그런 마음이었다.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해. 예전에는 소어가 날 위해 해 준 것들이 당연했는데, 이제 아니라는 걸 알게 됐잖아. 그런데 아쉬운 한편 기분이 좋더라고.”
“그건…… 누구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왜? 가식이라고 싫어할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티스베는 그것이 가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어떻게 가식인가.
“그럼 이제 어쩌실 겁니까? 적당히 돌아오시려고요?”
“마히. 너 아직도 날 몰라?”
“예?”
티스베가 느슨하게 턱을 괴었다.
의미심장한 미소가 티스베의 만면 가득 걸려 있었다.
“이딴 식으로 포기할 거면 시작도 안 했어.”
뭐? 나에 대한 마음을 정리해?
심장 내놓고 기다려, 소어.
그 알량한 마음을 완전히 박살 내 주지.